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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제1장 해설
앞 주 목요일(11.9)부터 공산당선언을 공부합니다. 한 선생님이 정독을 하면 나머지 선생님들이 의견을 주고 받는 형태입니다. 총 4장이어서 1장씩 공부합니다.
우리 사회가 더 풍요롭게 인간답게 사는데 인문사회과학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상상력을 무한데로 넓히는데 비해서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처럼 현상에 나타난 본질을 밝히어 더 나은 세상을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이 말하기를 사회주의(공산주의)가 히틀러(나찌즘-전체주의)와 같다고 합니다. 이런 말은 어느 대선 후보가 연설 중에 나왔습니다. 히틀러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진보세력을 박멸한다고 했습니다. 같은 편이면 박멸하지 않겠죠. 나아가 20~30대의 삶이 파편화된 개인주의에 갇혀 있어서 생존에 필요한 요구를 조직적.집단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기에 더욱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헌법에 보장한 노동3권과 근로기준법을 초.중.등 제도교육에서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를 알지 못한 채 직장생활을 합니다. 자본은 최대한 이윤추구를 노동력은 인간재료만 취급하는데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생각도 행사도 못합니다. 자본운동 논리상 자본집적.집중으로 빈부격차는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여기에 우리나라는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으로 더욱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무리 객관적 현실이 어려워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은 진리입니다. 중.고교 사회교과에서 이 법이 등장한 것은 10~4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 이론이나 주체사상은 폐쇄된 연구실 책상에서는 올려질 수 있으나 대중과 함께 이야기하기에는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 희대의 악법이 사라져서 이런 이론을 자유롭게 공부하고 실천하면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 인식을 바꾸어야겠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 경제상황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에 쌓여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이런 진보적 사상 공부와 실천을 통해서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공산당선언은 대학 때부터 종류를 달리 하는 몇 권의 책으로 봤습니다. 볼수록 새롭습니다. 제1장 내용 중 생각나는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 동맹을 맺었다.
반정부당치고, 정권을 잡고 있는 자신의 적들로부터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은 경우가 어디 있는가? 또 반정부당치고, 더 진보적인 반정부당이나 반동적인 적들에 대해 거꾸로 공산주의라고 낙인 찍으며 비난한지 않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한국사회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있는 공산당은 커녕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헌법에 보장하고 있는 생존권을 위해서 파업이나 시위를 할라치면 지금도 서민 일부는 비난합니다. 이는 오랜 세월 반공주의 교육.언론에 길들여져서 자기 검열로 레드 콤플렉스로 자신을 가두고 이를 검증이라고 하듯 파업이나 시위조차도 비난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동업 조합의 장인과 직인, 요컨대 서로 영원한 적대 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 왔다. 그리고 이 투쟁은 항상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다.
예전에는 역사상의 각 시기마다 거의 어디서나 사회가 각종 신분으로 완전히 분열된 상태인 각종 사회적 위계 질서가 발견된다. 고대 로마에는 귀족·기사·평민·노예가 있었고, 중세에는 봉건 영주·가신(家臣)·동업 조합의 장인·직인·농노가 있었으며, 다시 이 계급들 하나하나가 다 특수한 등급들로 나뉘어 있었다.
봉건 사회가 몰락하고 생겨난 현대 부르주아 사회 또한 계급 모순을 폐기하지 못했다. 이 사회는 다만 새로운 계급들, 억압의 새로운 조건들과 투쟁의 새로운 형태들을 낡은 것과 바꿔 놓은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 즉 부르주아지의 시대는 계급 모순을 단순화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사회 전체가 두 개의 적대 진영으로, 즉 서로 대립하는 두 계급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더욱더 분열되고 있는 것이다.}
사적 소유로 문명 사회가 된 이래 역사는 분열된 계급투쟁의 역사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두 계급으로 단순화됩니다. 현상적으로는 여러 직업,계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의 집적.집중은 강화되어 대자본은 소자본을 합병하여 이들을 pt화시킵니다. 경제활동인구 25% 이상이-선진국은 15% 이내-자영업에 종사합니다. 이 쁘띠 부르주아지는 코로나를 거치면서 매우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상대적 과잉인구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정규노동자는 산업예비군으로 끊임없이 전락합니다.
경기침체로 정부 지원책으로 많은 좀비건설업이 존재하고 이는 곧바로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지면서 금융위기를 실시간으로 걱정하게 합니다. 특히 신용대출인 PF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금융기관들이 생산과 유통의 원활함을 위해서 너무 심하게 창조한 가공자본-주류에서는 신용창조-이 드디어 가치의 규제를 받아 거품이 곧 터질 상황입니다. 현재 정부정책은 위기를 단지 연장하면서 위험을 더욱 키우고 있습니다. 통계상으로 GDP를 초과한 가계부채가 더욱 증가하여 가처분소득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려운 계층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줄어들어 생존권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자영업자나 기업부채도 엄청납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정부는 부유세나 투기세금을 줄여주는 악수를 두었습니다. 세수의 천문학적 부족이 발생합니다.
엄혹한 상황에서 정부 정책으로 경제 모든 부문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외환보유액 급격한 감소, 한미일 가치동맹한답시고 미일에 몰빵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시장의 상실로 수출액의 급감으로 갈수록 무역적자의 확대, 중국 정부의 연구개발비의 집중투자로 많은 부문에서 우리 수출품을 대체하고 있는 이때, 우리는 연구개발비를 축소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가파른 금리인상과 환율인상-미국보다 금리가 2% 이상 낮아서 소위 달러 등 외국자본의 이탈로 인한 환율인상, 환율인상은 외국에서 수입한 상품의 가격상승, 임금은 미미한 인상으로 민중의 삶은 더욱 힘들어집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전쟁, 이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와 민중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도 부족할 판에 외유나 다니고 우크와 폴란드에 거의 받지 못할 엄청난 전쟁비용을 대고 있으니 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미국 종속국(신식민지)이라도 그래도 민중이 대표를 선출한 형식적 주권국가인데 미제가 하라는대로 하다가 한국미래가 처참하게 무너져도 상관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를 인지도 못하고 정신승리로 잘되거라고 믿고 있는지 암담함만 미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이래 계급 간 투쟁은 눈에 띄게 하거나 은밀하게 하거나 내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모순인 노-자간 투쟁은 당연히 해결해야 하나 이 모순이 외화된 우리 민족은 미제와 한국의 신식민지 상황에서 이 주요모순이 시급하고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계급.계층을 뛰어넘어 민족이익에 복무할 모든 세력이 대동단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민중의 생존권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 부르주아지 자체가 기나긴 발전 과정의 산물이며, 생산과 교환 방식에서 일어난 있따른 변혁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각 발전 단계에 발맞추어 정치적 진보도 함께 이루어졌다. 봉건 영주의 지배 밑에서는 피억압 신분이었고 코뮌에서는 무장을 갖춘 자치 단체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독립한 도시 공화국(독일과 이탈리아에서와 같이), 또 다른 곳에서는 납세 의무를 지닌 군주 국가의 제3신분(프랑스에서와 같이), 그리고 매뉴팩처 시기에는 신분제 또는 절대 군주 국가의 귀족에 대항하는 세력, 즉 대군주 국가 일반의 주된 토대였던 부르주아지는 대공업과 세계 시장이 형성된 이래 현대의 대의제 국가에서 마침내 독점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했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권력은 부르주아 계급의 전체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이다. 국가권력이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봉사하나 민중의 형식적 선거제도와 집회나 그 외 자유, 권리 등으로 이 권력을 견제하고 민족과 민중이익을 위해서 일정하게 복무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인 한에서 명백하게 한계가 있습니다. 국가권력을 민중과 민족이익에 봉사하는 세력이 집권하면 당연히 상부구조인 국가는 이를 위해서 복무할 수 있습니다. 비록 계급을 탈각한 국가권력이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에서 아주 혁명적인 역할을 해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획득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목가적(牧歌的) 관계를 파괴했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을 타고난 상전들에게 얽매어 놓고 있던 온갖 봉건적 속박을 가차없이 토막내 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는 노골적인 이해 관계와 냉혹한 '현금 계산'외에는 아무런 관계도 남지 않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광신, 기사적(騎士的) 열광, 속물적 감상 등의 성스러운 황홀경을 이기적인 타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교환 가치로 해체했으며, 특허장으로 보장되거나 투쟁을 통해 얻어진 수많은 자유 대신에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 즉 상거래의 자유를 내세웠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정치적 환상에 의해 가려져 있던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도 잔인한 착취로 바꾸어 놓았다.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영예로운 것으로 생각되어 왔고 사람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보아 오던 모든 직업에서 그것들이 갖고 있던 후광을 빼앗았다. 그들은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들을 자신이 고용하는 임금 노동자로 만들어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가족 관계에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상의 껍데기를 벗겨 순전히 금전 관계로 바꿔 버렸다.}
자본주의는 예전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감상적인 인간가치로 맺어지는 모습에서 모두 냉정한 계산으로(교환가치)로 바꾸어 놓습니다. 가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은 노동력을 재생산.유지하여 판매합니다. 여기서 가족은 임금(자본가 입장에서는 불변자본)이란 수입으로 생존에 필요한 모든 상품을 시장에서 구입합니다. 직장이 없어서 소득이 없으면 <변신>에서처럼 벌레 취급당합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에서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가족 또한 계산적일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가정 경제는 사유재산이 더욱 발전함에 따라 한층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농경민에게 있어서의 공동적 가정 경제란 그 토지의 공동경작과 마찬가지로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공동적 가정 경제의 설립은 기계의 설비의 발전, 자연력 및 기타 많은 생산력의 이용을 전제로 합니다. 개인 경제의 폐지는 가족 그 자체의 폐지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폐지하는 것 외에도 다른 교리에 입각한 것인데, 다름 아니라 가족을 폐지하는 것입니다. 가족 폐지! (중략) 현재의 가정 곧 부르주아 가정은 어떤 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까? 자본, 사적 이익이 완전히 발달된 형태로, 가족은 부르주아 중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주아 가정의 존재는 프롤레타리아들의 가족 부재 그리고 만연한 매춘성매매라는 수고 덕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착취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들의 아내를 착취하고 부모는 사적인 이득을 위해 그들의 아이들을 착취합니다.
공산주의 사회가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남녀 간의 관계를 개입할 사람이 없는 순수한 사적인 문제로 전환시킬 것이다. 그것은 사적 재산을 배제하고 공동체 기반으로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이런 식으로 전통적 결혼의 두 가지 근원인 사유 재산에 뿌리를 둔 의존성,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성이 사회주의에서 제거됩니다. 더불어 아이들에 대한 의존성도 제거됩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핵가족이 자본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가족은 노동력을 유지.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사회의 필수적인 기능을 합니다. 그럼에도 자연과 더불어 가족의 이 기능은 가치 생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아주 당연시합니다. 그래서 GDP에 포함된 가치와 포함되지 않은 가치생산은 다릅니다. 가족은 동시에 소비단위입니다. 현 계급구조를 재생산하도록 수동적 수용을 가르칩니다. 동시에 문명역사와 함께 사적 소유의 상속은 계급불평등을 가져옵니다.
현대 가족은 농업 서비스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노예뿐만 아니라 농노의 개념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사회는 보이지 않은 끈에 의해 강하게 임금에 종속된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가족은 추후 사회와 국가와 같이 보다 확장적인 공동체로 전파되는 모든 모순을 함축하고 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상호간에 오롯이 마음을 공유하지는 않지만 다른 구성원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그 어떤 타인보다도 가족 구성원들이 더 잘 압니다.
가족이 가격의 개념이 없어도 분열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가족 구성원이 실제로 서로의 행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때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최선의 상호적 돌봄을 바탕으로 가족은 지식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문제와 인센티브 불안정성 문제를 극복합니다.
가족은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이란 경제적 동기가 매우 강하게 작동한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신자유주의하에서 가정공동체에 교환가치가 깊게 침투하여 그렇지 않아도 아주 힘든 노동에 소득도 시원치 않은데 가족 간에 경제적 동기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가족해체도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출산과 급속도로 고령화되지만 돌봄문화도 아주 미흡한 실정입니다. 노인들이 요양원에 가는 것을 지옥가는 것보다 더 싫어합니다. 복지제도가 강화되면 훨씬 이런 부정적인 현상이 완화될 것입니다.
사유재산이 사라진 상태에서 한 국가를 대가족으로 보는 것은 과도기적으로 계급이 사라진 국가가 계획과 조정이 필요한 것처럼 가족의 긍정적인 측면에서 필요하다고 봅니다.
공동적 가정 경제는 어떤 사회도 실현한 적이 없기에 역사가 발전하면서 만들어가야 하는 개념입니다. 원시공산사회처럼 난혼이나 군혼 등은 아닙니다. 인간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국가나 사회가 책임진다면 남녀간의 관계나 그 아이들, 노인네들에 대한 삶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겠죠.
{부르주아지는 생산 도구를 끊임없이 변혁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생산 관계와 더 나아가 사회 관계 전반을 혁신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반면에 종전의 산업에 종사하던 모든 계급들의 첫번째 생존 조건은 낡은 생산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있었다. 생산의 계속적인 번혁, 모든 사회 관계의 끊임없는 교란, 항구적인 불안과 동요가 부르주아 시대를 그 전의 모든 시대와 구별해 준다. 굳어지고 녹슬어버린 모든 관계는 그에 따르는 부산물들, 즉 아주 오래 전부터 존중되어 온 관념이나 견해와 함께 해체되며, 새로 생겨나는 모든 것조차 미처 자리를 잡기도 전에 이미 낡은 것이 되고 만다. 신분적인 요소와 정체된 것은 모두 사라지고, 신성한 것은 모두 모욕당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마침내 자기의 생활 상태와 서로 간의 관계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자기 생산물의 판로를 끝없이 넓히고자 하는 요구는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지상의 모든 곳을 뛰어다니게 한다. 부르주아지는 가는 곳마다 정착해야 하고, 가는 곳마다 뿌리를 내려야 하며, 가는 곳마다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부르주아지는 세계 시장을 이용하여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반동배에게는 매우 비통한 일이었지만, 부르주아지는 공업의 민족적 지반을 발 밑에서부터 허물어 버렸다. 예로부터 내려오던 민족적 공업이 파멸되었거나 나날이 파멸되어 가고 있다. 이 민족적 공업은 새로운 공업, 즉 현지 원료를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가장 먼 지역에서 운반되어 오는 원료를 가공하고 그 나라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소비되는 공산품을 만드는 공업에 밀려나고 있으며, 이 새로운 공업을 도입하는 것이 모든 문명 국가의 사활의 문제가 되고 있다. 국산품으로 채워지던 옛 수요 대신에,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며 풍토도 아주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온 생산물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새로운 수요가 생겨난다. 낡은 지방·민족적 단절과 국산품에 의존하던 생존 대신에, 민족들이 서로 전면적으로 교류하고 전면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나타난다. 이것은 물질적 생산에서나 정신적 생산에서나 마찬가지다. 각 민족의 정신 활동의 성과는 공동 재산이 된다. 민족적 일면성과 배타성은 더욱더 있을 수 없게 되고 수많은 민족·지방적 문학으로부터 하나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 도구의 급속한 개선과 한없이 편리해지는 교통수단으로 모든 민족, 심지어는 가장 미개한 민족까지도 문명화한다. 그들 상품의 싼 가격은 모든 만리 장성을 쳐부수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집요한 증오까지도 여지없이 굴복시키고야 마는 무기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하며, 이른바 문명을 받아들이라고, 즉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농촌을 도시의 지배 밑에 종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거대한 도시를 만들고 도시 인구를 농촌 인구에 비해 크게 늘림으로써, 인구의 대부분을 우매한 농촌 생활에서 건져 냈다. 부르주아지는 농촌을 도시에 종속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미개국과 반(半)미개국을 문명국에, 농업에 종사하는 인민을 부르주아적인 인민에, 동양을 서양에 종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생산 수단, 재산, 인구의 분산 상태를 점점 없앤다. 그들은 주민을 집결시키고, 생산 수단을 집중시키며, 재산을 몇몇의 손에 집중시켰다. 그 필연적 결과는 정치의 중앙 집권화였다. 서로 다른 이해 관계, 서로 다른 법률, 서로 다른 정부, 서로 다른 관세를 갖고 동맹 관계를 통해서만 겨우 연결되어 있던 독립적인 각 지방들이 하나의 정부, 하나의 법률, 하나의 국민적인 계급 이해를 갖고 하나의 관세 구역 안에 사는 하나의 국민으로 결합되었다.
부르주아지는 100년도 채 못 되는 계급 지배 동안에 과거의 모든 세대가 만들어 낸 것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을 만들어 냈다. 자연력의 정복, 기계에 의한 생산, 공업과 농업에서의 화학의 이용, 기선에 의한 항해, 철도, 전신, 세계 각지의 개간, 하천 항로의 개척, 마치 땅 밑에서 솟아난 듯한 엄청난 인구, 이와 같은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태내에서 잠자고 있었다는 것을 과거의 어느 세기가 예감이나 할 수 있었으랴!}
자본주의 세계화는 그 출발점부터 전 세계시장을 중심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중심부-반주변주-주변부로 세계체제화하면서 잉여가치가 중심부로 이전하게끔 작동해왔습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력은 엄청난 속도로 증가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자본 간의 무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개발로 더 좋은 상품을 더 싸게 많이 만들어야만 특별잉여가치를 쟁취하여야만 합니다. 이럴 때 이 정부는 연구개발비를 삭감하는 황당한 정책을 밀어대고 있습니다. 국내외 자본가들은 이윤을 위해서는 가내수공업, 기계화되지 않은 농업 등을 온존하면서 착취합니다. 물론 이들은 대자본과 경쟁에서 결국은 무너집니다.
봉건사회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역사적 과정을 따라야만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맑스는 공산당 선언 러시아 어 제2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직 짜르체제하에 있을 때입니다. “오늘날 이에 대해 가능한 유일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의 혁명이 서구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가 되어, 그리하여 양자가 서로를 보완한다면, 현재 러시아의 토지 공동소유는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되지 않은 국가도 사회주의 이념을 위해 그 민족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체제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전에 존재했고. 지금 현존하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초기로 노자관계가 아주 미흡한 주변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우리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와 교환 관계,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 마치 마술이나 부린듯 그렇게도 강력한 생산 수단과 교환 수단을 만들어 낸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자기가 주문으로 불러낸 저승 사자의 힘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마술사와도 같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공업과 상업의 역사는 현대의 생산 관계에 대한, 즉 부르주아지의 존립과 그 지배 조건인 현대의 소유 관계에 대한 현대 생산력의 반항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면서 부르주아 사회 전체의 존립을 더욱더 위협하고 있는 상업 공황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상업 공황이 일어날 경우, 제조된 생산물뿐만 아니라 이미 이룩된 생산력의 상당 부분도 규칙적으로 파괴된다. 공황 때에는 일종의 사회적 전염병--과거의 모든 시대에는 터무니없는 일로만 보였을 과잉 생산이라는 전염병--이 널리 퍼지게 된다. 사회는 잠시동안 야만 상태로 후퇴하여 마치 기근과 전면적인 파괴전이 모든 생활 수단을 쓸어 간 것같이 보이며, 공업과 상업이 전멸될 것같이 보인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사회가 너무나 큰 문명을 가지고 있고 생활 수단이 너무나 많으며, 너무나 큰 공업과 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생산력은 이미 부르주아적 문명과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가 발전하는 데 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러한 소유 관계에 비하면 너무 방대해져서, 이제는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억제하게 된다. 그리고 생산력이 이 질곡을 극복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부르주아 사회 전체를 혼란 상태에 빠뜨리며 부르주아적 소유가 존립하는 것을 위태롭게 한다. 부르주아적 관계는 자신이 만들어 낸 부를 포용하기에는 너무도 협소해진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어떠한 방법으로 이 공황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거대한 생산력을 어쩔 수 없이 파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시장을 새로이 넓히면서 기존의 시장을 더욱더 철저하게 착취하는 방법으로 극복한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더욱더 광범위하고 더욱 파괴적인 공황을 준비하게 되며, 공황을 예방할 수단도 줄어들게 된다.}
사물이나 사회는 그 자체내에 모순 때문에 문제의 해결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봉건사회에서 영주-농노라는 신분적 관계하에서 상공업자의 성장으로 생산력의 발전은 기존 생산관계로 감당이 되지 않아서 자본주의사회로 전화됩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도 사적 소유와 사회적 생산의 모순으로 주기적으로 공황발생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이윤율저하경향법칙-이를 상쇄하는 요인들이 있습니다-이지만 직접적으로는 과잉생산에 있습니다. 공황이 발생하면 민중의 삶은 피폐하고 필요한 상품들이 이윤창출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기되고 다시 경제는 돌아갑니다.
{늘어가는 기계 사용과 분업으로 말미암아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자립적 성격을 모두 잃어버렸으며, 이와 더불어 노동자가 느낄 수 있는 온갖 매력을 잃어버렸다. 노동자는 기계의 단순한 부속품이 되고,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단조로우며 가장 배우기 쉬운 동작뿐이다. 따라서 한 노동자에게 지출되는 비용은 거의 모두 그 자신을 유지하고 자손을 번식시키는 데 필요한 생활 수단(의 비용--역자)에 국한될 뿐이다. 그런데 모든 상품의 가격은 그 생산비와 같으며, 따라서 노동의 가격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노동의 지겨움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그만큼 임금이 줄어든다. 그뿐만 아니라 기계와 분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노동 시간이 늘어나거나 정해진 시간안에 해야 하는 노동이 늘어나거나 기계의 운전 속도가 빨라지거나 하여 노동의 양도 그만큼 늘어난다.
......노동자에 대한 공장주들의 착취가 끝나 드디어 노동자가 임금을 현금으로 받게 되면, 이번에는 부르주아지의 다른 부분, 즉 집주인·상점 주인·고리 대금업자 등등이 노동자들에게 달려든다.
.....이 단계에서 노동자들은 전국에 흩어진 채 서로 경쟁하는 대중을 이루고 있다. 노동자들의 대중적 결속은 아직 그들 자신이 단결한 결과가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단결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동원해야 했으며, 또 그때에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에 대한 적, 즉 절대 군주제의 잔재인 지주, 비(非)산업 부르주아, 소부르주아들과 싸운다. 그리하여 역사적 운동 전체가 부르주아지의 손에 집중되고, 이렇게 얻어진 모든 승리는 부르주아지의 승리가 된다.
.....프롤레타리아들이 이처럼 계급으로, 따라서 정당으로 조직되는 일은 노동자 자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쟁 때문에 끊임없이 파괴된다. 그러나 이 일은 새롭게 거듭 일어나며 그때마다 더욱더 강하고 굳건하고 위력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부르주아지 안의 알력을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몇 가지 이해 관계를 법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 실례로 영국에서는 10시간 노동법이 통과되었다.
일반적으로 낡은 사회 안의 충돌은 많은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 과정을 촉진한다.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투쟁을 해 왔다. 처음에는 귀족과 투쟁했고 나중에는 공업 발전에 대립하는 이해 관계를 가진 일부 부르주아층과 투쟁했으며, 그리고 언제나 외국의 부르주아지 전체와 투쟁한다. 이 모든 투쟁에서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고 그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그들을 정치 운동에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부르주아지는 자신들만이 누려 오던 정치·일반적 교양의 요소를, 즉 부르주아지 자신에 대항할 무기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한다.}
노동자는 산업이 갈수록 자동화.기계화(자본집적.집중와 연관)됨에 따라 기계부속품을 전락하고 장시간 노동에 저임금에 시달립니다. 이 임금은 단지 노동자가 노동력을 유지.재생산하는 정도의 최소한만 제공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부르주아지는 이마저도 하지 못하고 있어서 지배계급으로 역할을 포기하고 있어서 피지배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는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 자본가는 노동현장에서만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밖 즉 집값 폭등, 교육비 폭등, 육아비 상승, 임대세 상승, 고금리, 고물가로(인플레이션) 등으로 수탈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자본가들은 미국의 압력으로 자본수출이나 상품수출을 제한받고 있는 상태에서 자본축적이 매우 어려운데 독재와 외세에 너무 순종적이어서인지 잘 따르고 있습니다. 만약에 민족적 자본으로써 자각이 있다면 노동자계급과 이북과 연대하여 이를 돌파하여야 합니다. 그 댓가로 남북교류와 노동자계급에게 노란봉투법이나 그 외 것을 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