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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thcard님의 다시 쓰는 여름향기 엔딩(9-2 회)
편집-여름향기최고 / 사진출처 - 드라마 여름향기
오후 1시쯤이 되어 차가 카라리조트에 도착했다. 멀리 덕유산 꼭대기
가 희미하게 보였다. 혜원은 차가 주차장에 도착할때까지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민우는 안전벨트를 풀고 곤히 자고 있는 혜원을 깨웠다.
그녀가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다.
"민우씨, 여기 어디예요?"
"다 왔어요."
혜원이 얼굴을 찡그리며 차창밖을 두리번거린다.
"어머! 카라리조트네요."
"혜원씨, 배고프죠. 식당가서 점심이나 먹죠."
왼편으로 주차장을 끼고 돌자 카라리조트가 정면으로 들어왔다. 건물
이며 건물을 싸고 있는 화단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울
긋불긋한 카펫이 깔린 식당으로 들어서자 마침 점심시간이어선지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식당 안 왼쪽벽은 옛날 벽화를 흉내낸 추상화들
이 벽면가득 자리잡고 있었다. 두사람을 사람들을 비집고 창가 빈자리
로 가서 앉았다.
"민우씨, 저 벽화들은 없었는데...."
"그러네요. 그런데 식당에 저런 그림들이 있으니 웬지 식당분위기가 산
만한거 같지 않아요?"
"맞아요. 식당은 그냥 눈부시지 않게 간결한게 좋은데 말이죠."
"혜원씨, 여기오면 기억나는거 없어요?"
민우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혜원도 기억이 나는지 식당을 둘러보며
웃었다.
"여기서 혜원씨와 산에서 만난이후 첫 번째로 마주쳤던 곳이죠. 그땐
참 정재씨가 같이 자리하고 있었서 많이도 어색했었죠. 기억나요?"
"기억나요. 그때 참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정
도로 당황했었던거 같아요. 아마 지금 그때 그 상황으로 돌아가라면
아마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아요. 그때 민우씨를 여기서 만났을 때 정말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또 웃었다.
"혜원씨, 뭐 먹을까요. 음식 가지러 가죠."
"민우씨, 여긴 계절이 그래서 그런지 삭막하네요."
"그러네요."
짙은 청록색으로 가득했던 점핑파크는 낡은 잿빛 밴치와 빛이 바랜 잔
디로 을씬년스런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민우와 혜원은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둘은 한가운데에 서자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민우가
장난기서린 표정으로 혜원을 바라본다.
"혜원씨, 우리 그때 그밤의 로맨스를 한번 연출해 볼까요?"
민우가 혜원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때는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었는지 모르겠어요.
혜원이 민우를 보며 싱긋히 웃었다.
"그때는 술한잔씩들 했잖아요."
"맞아요. 그때 민우씨와 맥주를 마셨었죠? 지금 하라면 부끄럽고 간지
러워서 죽어도 못하죠."
그녀는 부끄러운지 양볼이 발그스레해졌다. 하늘에 한무리의 철새들이
가로지르며 나르고 있었다. 그들이 점핑파크를 뒤로하고 상가거리를
지나 3년전 혜원이 운영하던 플라워샆에 도착했다. 갖은 꽃들로 가득
했던 가게는 잡화물가게로 변해 있었다. 혜원은 한동안 쇼윈도우를 바
라보며 기억을 되씹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그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쇼윈도우를 통해보이는 내부는 갖은 기념품들로 어지럽
기 그지 없었다.
"혜원씨, 가요."
그들이 상가단지를 지나 리조트본관에 딸린 뾰족한 첨탑에 이르렀다.
외벽색깔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짙은 노란색 그대로였다.
"민우씨, 저거 우리가 칠했던 색깔 맞아요?"
혜원이 프로포즈방 외벽을 가리켰다. 색깔은 그대로지만 자세히보니
군데군데 가뭄으로 갈라진 땅같이 얼룩이 져 있었고 검게 빛이 바래있
었다.
"아마추어들이 도색했는데 오죽할려구요."
민우가 키득키득 웃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민우씨, 프로포즈방에 꽃이 그대로 있을까요?"
"아마 드라이플라워니까 누가 인위적으로 치우거나 용도변경을 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있겠죠."
그들이 계단을 굽이쳐올라 프로포즈 방문앞에 섰다. 민우와 혜원은 기
대반 우려반섞인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혜원씬 어때요? 그대로 일 것 같아요....아니면..."
"...글...쎄요...지금 느낌이...조금 설레이기도 하는데 만약 꽃이 없으면
너무 서운할 것 같아요. 두려워요... 없을까봐 문열기가 겁나요. 민우씨는
어때..요?"
"난 그대로 있을것 같아요."
"그래...요?"
"자. 그럼 요시...땅 하면 문을 여는 겁니다."
"요시...땅이 뭐예요?"
혜원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민우는 그런 그녀의 표정이 갓 초등학교
에 입학한 궁금증 가득한 소녀의 표정같다는 생각을 한다.
"일본말이예요. 준비 땅 몰라요? 하나 둘 셋이란 말과 같죠. 자,그럼..."
민우가 마치 단거리 경주를 하듯 손바닥에 침을 뱉는 시늉을 하자 혜
원도 입을 앙다물고 두 손바닥을 허리에 대고 비빈다. 민우는 그녀의
표정이 꼭 애기같은 느낌이 들면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자, 그럼, 요...시... 땅!"
두사람이 동시에 문을 밀었다.
"어머! 그대로 있네요."
약간 색깔이 바랫지만 천장에는 노란색 장미가 3년전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혜원은 십년지기를 만난것처럼 좋아했다.
"혜원씨, 여기봐요."
민우가 창문옆 오른쪽벽에 붙은 낙서장을 가리켰다. 그기에는 많은 연
인들이 다녀간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아무렇게나 갈긴 것 같
지만 거의 방명록 수준이었다.
"민우씨, 그래도 이방이 유효하게 쓰이고 있나봐요. 그땐 단지 이벤트
형식으로 만든건데 오래가네요. 누군지 모르지만 관리를 철저히 하나
봐요."
혜원이 낙서장에 쓰인 글들을 읽으며 물었다.
"혹시 정재씨가 관리를 잘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는지도 모르죠."
혜원이 뒤돌아 본다.
"그럴...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카라리조트 소유가 신한그룹으로 되어
있잖아요."
"참! 그렇죠, 그러고 보면 이 방이 가치가 상당히 있긴 있는 모양입니
다. 관리를 지시한 사람도 없을텐데 이렇게 누군가 관리를 하고 있다
는건 그만큼 그때 혜원씨가 이방을 아름답게 꾸몄다는 얘기가 되잖아
요. 웬지 폐쇄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방 이라는 거죠."
"그렇...게 되나..요?"
혜원이 싫지 않은 듯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민우와 혜원은 카리리조트를 뒤로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민우씨, 우리 보성가면 녹차밭 거쳐서 가도록 해요."
"안그래도 그렇게 할려구 해요."
그들이 보성에 도착했을때는 갸날픈 석양빛이 대지를 붉게 물들이고
산골은 오색 영롱한 노을로 덮히고 있었다. 높다란 가로수 사이를 얼
마나 달렸을까 오른쪽 비스듬한 산자락에 위치한 녹차밭이 두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추수가 끝난 뒤라서 그런지 녹차밭은 황량한
들판으로 변해 있었다. 민우가 녹차밭 아래에서 차를 세웠다. 뉘엿뉘엿
지는 석양 빛을 받아 두사람의 얼굴이 붉은 물감을 칠해놓은 것 같았
다.
"민우씨 여기까지 왔는데..."
혜원이 민우를 돌아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민우도 알고 있다는 표정이
다. 차가 녹차밭을 끼고 돌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시멘트도로를 한참
달려 멈췄다. 민우와 혜원은 차에서 내려 아름드리 나무사이를 걸었다.
산중턱에 은혜아버지집이 앙상한 나무가지 사이사이로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민우와 혜원이 마당에 들어서자 마당에는 갈색으로 퇴색한
잔디와 잡초가 가득했다. 예전에는 잔디가 더 많았었는데 지금은 잡초
가 더 많은 것 같았다. 지금의 상태는 몇 년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무성해 있었다. 민우는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 문앞에 섰다. 혜
원은 마당에 서서 민우의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었다. 민우가 노크를
하려다가 손을 내렸다. 문이 잠겨 있었다. 민우가 계단을 내려와 왼쪽
안방문 창문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창문은 커튼이 처져있었다.
"왜요 민우씨? 아무도 없...어요?"
"예"
민우가 쓸쓸히 대답했다.
"꼭..사람이 살지 않는집 같아요...무슨일 있는건 아..닐까요?"
혜원이 민우얼굴을 보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글쎄...요."
민우가 아쉬운 듯 고개를 돌려 문을 한번 쳐다보았다.
"민우씨, 은혜씨 묘에 한번 가봐요."
해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저녘노을 아래에 내려앉은 어둠이
산을 덮고 있었다. 은혜의 묘는 길고긴 산풀들로 가득덮혀 있었다. 그
것은 마치 고슴도치를 덮고있는 가시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오랫
동안 벌초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혜원은 3년전 정재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은혜묘에 와서 민우씨아닌 다른사람과 결혼한다고 은혜에게 말
하면서 꽃다발을 놓고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민우는 민우대로 한날 한
시에 단 몇분의 차이를 두고 혜원이 다녀간뒤에 은혜의 묘에 와서 작
별인사를 하고 은혜와 나눠 가졌던 목걸이를 놓고 갔던 기억을 떠올렸
다. 혜원이 묘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혜원씨, 목걸이 찾아요?"
"예."
혜원이 허리를 숙인채 대답했다.
"민우씨, 목걸이가 없..어요. 민우씨가 분명히 여기 묘 앞에다 뒀다고
했..죠?"
"잡초 때문에 안보이는 거겠죠."
"아녜요. 없는것 같아요. 혹시 은혜 아버지께서 가져가신게 아닐..까
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혜원은 날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묘지주위를 연신 두리번 거렸다.
"혜원씨, 추운데 그만 가요."
"어머니, 저희들 왔어요."
민우와 혜원이 현관을 들어섰다.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그래 어서들 오너라. 혜원씨도."
민우어머니가 주방에서 뛰어나오며 두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그녀가
혜원의 두손을 맞잡았다.
"그래, 혜원씬 어때요. 몸은 괜찮아요? 근데 안색이 전에보다 못한거
같아요."
민우어머니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혜원을 본다.
"아녜요 어머니, 간밤에 잠을 좀 설쳐서 그런가..봐요."
"그래요. 오늘밤에 여기서 푹좀 자도록 해요. 자 어서 앉아요 배도 고
플텐데. 민우도 앉아라. 근데 왜들 이렇게 늦었니? 아침에 출발했다면
서.."
"어머니, 은혜부모님들 어디 가셨는지 모르세요? 가보니 꼭 사람이 살
지 않는집 같았어요."
민우가 대답대신 거실에 앉으며 물었다. 혜원도 민우옆에 앉았다.
"응..그기 들렀다.. 왔구나. 그긴 ...말이..야.."
민우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민우와 혜원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침울해 보였다.
"왜요 어머니..무슨일 있어...요?"
"나중에 얘기할께 그만 저녘들 먹자. 조금만 기다려라."
민우어머니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혜원도 따라들어간다.
민우는 탁자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다.
민우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주방을 한
번 보고는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여보세요? 정아니? 나 민우야."
"응..민우선배. 잘 도착했어?"
"그래 이제 도착했어. 그래 정아는 좀... 괜찮아. 많이 힘들지?"
"아..냐 괜...찮아 민우씨, 그래 혜원이는 아직... 모르지?"
정아는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응..몰라."
"아뭏든 민우씨가 혜원이 감시 잘..해야..해."
"그래..알았어. 그런데 며칠장으로 했어?"
"응. 3일장으로 했어 회사에서는 5일장이나 7일장으로 할려구 했는데
아빠가 3일장을 고집했나봐 부모버리고 먼저 세상뜬 자식은 5일장이나
7일장은 사치라면서 막 화를 내셨어."
"그..래.그럼 내일 모래 올라가면 되겠네?"
"뭐? 모래 올라온다구? 민우씨 안돼! 아직 올라오지마 좀더 있어. 장례
식 끝나고 잠잠해 지면 올라오란 말이야."
"근데..그게 말이..야. 혜원씨가 모래 병원가야해. 그리고 3일장이면 탈
상이 이틀후잖아. 올라가서 정재씨 마지막 가는 모습을 봐야지."
"민우씨, 그럼 혜원이는 어떡하구? 혜원이 병원간다면 혜원이도 같이
올라올거 아냐. 안돼! 민우씨, 올라오더라도 민우씨는 여기 오지말고
혜원이옆에 붙어 있으란 말야."
"걱정마, 그건 내가 알아서 할께."
"민우씨, 정재오빠는 미국에 유학간걸로 할거야. 나중에 혜원이 한테
그렇게 얘기할거야. 민우씨도 그렇게 알고 있어. 알았지?"
"그래...알았어."
"민우씨, 누구 전화예요?"
혜원이 주방에서 나온다. 민우가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 본다.
"응. 그래 알았어 친...친구야! 올라가서 보자. 그럼 끊는다!
예...친구예요. 친구..."
민우가 전화를 접고 호주머니에 넣는다. 혜원이 민우 맞은편에 앉는다.
민우가 소리없는 긴 숨을 내쉬었다.
"민우씨 정재오빠한테 전화한번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서 혜원이 탁자위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른다. 민우
는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어머니. 텔레비젼 코드 뺏어요?"
민우 어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돌아본다.
"그래, 아예 고장난거 같이 해놓았다."
"어머니, 고마워요."
"고맙긴....참 정재씨가 안됐구나... 사람목숨 시간문제라더니...사람이 참
건실해 보였는데..."
"..........."
"그래, 너 혜원씨와 언제 올라 갈거냐, 결혼도 한다더니 당분간 힘들겠
구나?"
민우 어머니가 숟가락으로 가스렌지위에 놓인 찌개를 젖는다.
"모레 조문갔다가 다시 올겁니다. 혜원씨 병원도 가야하구요."
민우 어머니가 돌아본다.
"혜원씨는 아직 가면 안되잖니?"
민우어머니가 놀란표정으로 묻는다.
"병원 때문에 가야해요. 갔다가 바로 다시 내려올께요."
"그....래 니가 알아서 해라. 나도 가봐야 하는데....."
"어머니 괜찮아요. 제가 정재씨한테 안부 전할께요."]
"그래 그렇게 하려...무나. 어서 저녘들 먹자."
"어머! 정아니? 니가 왜 정재오빠 휴대폰을 갖고 있어?"
"응..혜원아. 오빠가 요즘 좀 그렇...잖니 채무 때문에 전화에 시달리잖
아. 그래서 당분간 내가 갖고... 있기로 했어."
"응. 그래? 일은? 정재오빠 일은 잘... 됐어?"
"응. 그래 잘되었어 혜원아 넌 이제 오빠일에 신경... 쓰지마 알았어?
다 잘될테니까. 혜원아 너 그런데 지금 어디야?"
"응...여긴 말이야..."
"괜찮아 혜원아. 오랫동안 푹 쉬다가 와 알았어?"
"그래, 알았어 정아야, 아뭏든 오빠일이 잘되었다니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혜원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근데 정아야, 정재오빠는 어딨어? 뭐해?"
"응 참 혜원아 정재오빠 미국 떠날거야. 지금 준비하고 있어."
"정아야 무슨 소리야? 미국이라니."
"어차피 오빠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날건데 뭐...그래서 미국가서 공부를
좀더 하고 올려구 해, 아빠가 미국 가라고 했어."
"그...래..그럼 언제 갈건....데?"
"응 1월 중순경에 갈거야. 혜원아 넌 신경쓰지마. 알았어. 넌 니 건강이
나 신경써 알았어?"
"응...알..았어."
"그래....혜원아 그만 끊는다."
이틀후.....
민우와 혜원은 서순천 톨게이트를 통과해 남해안 고속도로로 올라섰
다. 진주, 마산이라고 씌어진 예고 이정표가 빠르게 차창밖으로 지나가
고 있었다. 햇살은 눈부시고 날씨는 청명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늘은
더 없이 고요하고 투명했다. 혜원은 비록 이틀이 안되지만 며칠을 쉰 것
같이 몸이 가뿐했다. 하지만 마음한켠은 허전했다. 은혜어머님이 2년전
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은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해도 은혜아버
지가 가끔 민우어머니집에 들렀지만 은혜어머니가 돌아가신후에는 연락
이 두절되었다고 한다. 민우어머니가 은혜아버지집에도 가봤지만 그때
마다 집에 없었다고 했다. 항간에 들리는 얘기로는 보성읍내 친척집에
머문다는 얘기도 있었다고하고 보성읍내에서 은혜아버지를 봤다는 사
람들도 있었다. 어쨋든 은혜아버지가 집을 떠난건 사실인 것 같았다.
혜원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민우도 은혜아버지를 생각하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차가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를 거쳐 경부고속도로에 올라 한
시간여를 달리자 안성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혜원씨, 휴게소에서 좀 쉬었다 갈까요?"
"그래요 좀 쉬었다 가요. 민우씨 뭐좀 드실래요?"
그녀의 표정이 한결 가뿐해져 있었다. 차가 안성휴게소로 들어갔다.
"혜원씬 뭐 먹고 싶은거 있어요?"
"가락국수나 좀 먹고 가죠. 3시간을 달렸더니 출출하네요. 전 화장실
좀 갖다 올께요. 민우씬 휴게소 안에 들어가 있어요."
혜원이 차에서 내리자 민우가 휴대폰을 꺼낸다.
"여보세요?"
"형수님 민웁니다."
"아..민우씨, 그래 지금 올라오는 길이예요?"
"예. 지금 고속도로 휴게소입니다. 대풍형은 있어요?"
"아뇨, 정재씨 아침에 조문간다고 갔어요. 혜원이는요?"
"지금 휴게소에 있어요. 이따 한시간 삼십분후쯤에 도착할겁니다. 이
따 도착하면 형수님이 혜원씨를 좀 데리고 있어요. 전 정재씨 조문후에
혜원씨 데리고 병원에 갈테니까요. 혹시모르니 혜원씨 가게에도 전화
를 해놓을께요."
"그래요 알았어요 민우씨 그럼 이따봐요."
민우는 전화를 끊고 휴게소를 한번보고는 다시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미경씨입니까? 나 유민우란 사람입니다."
"예, 아저씨 안녕하세요?"
"내 얘기 잘들어요? 지금 언니하고 병원갈려구 서울올라가는 중인데
혹시 혜원언니가 가게에 들릴려고 할지 모르니까. 신문이나 라디오 같
은거 다 치워놓아요 알았죠?"
"예. 알았어요 아저씨."
좁은 휴게소는 많은 인파들로 북적 거렸다. 서 있을 공간조차 없었다.
안성휴게소는 주차공간만 전체면적의 오분의 사는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민우씨!"
혜원이 휴게소 식당 중간에 용케 자리를 차지하고 민우를 불렀다.
"혜원씨 재주도 좋네요? 자리를 뺐었어요?"
민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혜원은 민우의 표정이 우스운지 장난
끼가 발동했다.
"그거 모르죠 민우씨?"
"????...."
"제가 미소를 한번 지으면 남자들이 죄다 자리를 비켜줘요."
그러면서 혜원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였다. 민우는 웃음이 터져나왔
다.
"어? 민우씨 정말이예요.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혜원은 민우의 반응에 재밌어 하면서 우동을 먹는다. 민우가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정말이다. 몇 명이 혜원의 얼굴에 시선이 꽂히고 있었
다. 민우는 가만히 생각해본다. 사실 혜원씨 미모면 어디를 가도 남성
들의 시선을 받는다.
"혜원씨, 나 이거 먹기 싫은..데요?
"어머! 왜요?"
혜원이 우동을 삼키다가 민우를 바라본다. 민우가 젖가락을 놓고 다리
를 꼬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댔다. 그녀의 입에서 우동 한가닥이 떨어지
고 있었다.
"질투나서요."
혜원의 입에서 우동입자들이 튀어 나온다.
서울에 도착하자 오후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차가 서울시내를 한참
달려 대풍의 아파트앞에 멈췄다.
"혜원씨, 대풍씨 집에서 좀 기다려요. 잠깐 등촌동 정보문화센터 일 때
문에 미래기획에 좀 갔다올게요. 갔다와서 병원가자구요. 알았죠?"
"알았어요 민우씨 어서 다녀오세요."
혜원이 내리자 차가 굉음을 내며 주차장을 돌아 사라졌다. 혜원이 한
참 동안 차가 사라진곳을 응시하다가 아파트로 들어갔다.
"혜원아, 어서와."
"언니, 잘있었어?"
"얘도 참, 며칠동안 잘있고 자시고 할게 뭐있어. 민우씨는?"
"응...잠시 일 때문에 다녀온다고 했어. 근데 형부는 없어?"
혜원이 거실에 발을 들여놓으며 내부를 이리저리 살핀다.
"응......치...친구 만나..러 나갔어."
"철이는?"
"방안에 있어."
"얘 혜원아, 그래 민우어머니는 잘계셔?"
"응, 잘 계셔."
혜원이 안방으로 들어가자 장미가 뒤따르며 묻는다.
"아니, 근데..철이는 내가 올때마다 잠을 자네. 철이는 내가 보기 싫은
가봐 언니."
혜원이 자고 있는 철이옆에 앉아서는 입을 삐죽히 내민다.
"혜원아, 너 한테 심장을 줬다는 그..은혜씨 집에도 들렀니?"
"응..언니. 근데 아무도 못만났어."
혜원이 철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않고 대답한다.
"왜 집에 아무도 없던?"
"은혜씨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저씨가 보성집을 떠나셨나봐."
"은혜씨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혜원이 고개를 든다.
"응..예전부터 몸이 안좋으셨다고 했잖아."
"그 집도 참 안됐...구나..."
"언니 참! 나 가게 좀 갔다올게."
"가..가게..응..그래 갔다와. 빨리 와야해."
"알았어 언니."
정재네 본가는 문상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대문앞은 각처
에서 보낸 근조라는 글씨가 새겨진 띠를두른 조화들로 도로를 매우고
있었다. 민우가 2층 단독저택의 넓은 마당에 들어서자 마당과 정원에
도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민우가 사람들을 헤치고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민우야!"
민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오른쪽 정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원나
무벤치에서 대풍이 일어나 걸어오고 있었다. 대풍은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형."
"민우야, 왔어?"
"형 아침에 와서 여태 있었어?"
"응, 너 올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
"정아는?"
"정아씬 지금 집안에서 조문객들을 맞고 있을거야. 들어가봐."
"민우씨!"
민우를 부른는 소리에 두사람의 시선이 현관문쪽으로 향한다. 정아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흰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왼쪽가슴에
는 검정색 상장이 붙어있었다. 정아가 민우를 보자 다시 울먹였다. 그
녀의 눈이 퉁퉁부어 있었다.
"민우선배 오지... 말랬더니.."
그녀가 왼손으로 눈물을 찍었다.
"괜찮아. 안오면 평생 천추의 한으로 남을거야."
"그래, 혜원이는?"
"응. 걱정마 혜원이는 대풍이형 집에 있어."
"민우씨, 이따 분향하고 엄마, 아빠 좀 뵙고가 엄마, 아빠가 민우씨한태
할말이 있으시대."
민우가 거실로 들어서자 거실은 향냄새가 그득했다. 관앞에 놓인 커다란
병풍이 민우의 눈에 확 들어왔다. 그 앞엔 영좌가 설치 되어있고 그 위엔
정재의 영정사진이 검은 리본을 달고 웃고 있었다. 영정 양옆에는 촛불
이 타고 있었다. 제상앞에 놓인 향탁에는 향이 물위를 오르는 실뱀처럼
하늘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머! 언니 왔어요?"
혜원이 가게에 들어섰다.
"그래 미경이 수고 많지. 별일 없었니?"
"녜, 언니. 별일 없었어요."
혜원이 가게를 한번 둘러보고는 두꺼운 윗도리를 벗어 옷걸이에 건다.
"그래 주문한 꽃들은 갖고 왔었어?"
"예, 언니. 플라워센터에서 어제 왔다 갔어요. 언니 잠깐만요 차좀 내올
께요."
혜원이 책상에 앉아 장부를 뒤적인다.
"언니참! 이거."
"이게 뭐니?"
미경이 혜원이 앞에 연하장을 내민다.
"예 언니. 이거 어제 왔어요. 누가 보낸건지 모르겠네요. 보낸사람 주소
가 없어요. 언니 이름과 여기 주소만 적혀 있어요."
미경은 싱크대로 돌아서 포트에 물을 붓는다. 혜원은 미경이 건네준
봉투를 이리저리 살핀다.
"누가 보낸거지? 어머 가만 보니 정재오빠 글씨..같네."
혜원이 봉투를 눈앞에 갖다댄다. 미경이 혜원의 정재란 말에 싱크대에
커피포트를 떨어뜨렸다. 혜원이 돌아본다.
"미경아, 다치지 않았어? 왜 그러니?"
"아....아뇨 언니 괜...찮아..요."
미경이 말을 심하게 더듬으며 돌아본다. 미경의 등에 한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언..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슨 소리...라니? 그냥 연하장 일뿐이야."
혜원이 오히려 무슨 소리냐는 듯이 미경을 돌아본다. 혜원이 봉투를 .
뜯었다. 미경의 시선이 혜원의 어깨너머로 쏠리고 있었다.
"혜원아, 정재오빠다. 새해복 많이 받아라. 니가 이편지를 받을때쯤이
면 이틀정도가 흐른 후겠지? 그래 오빠가 없으니 오히려 걱정거리가 없
어서 속이 후련하지? 나도 이제 널 영원히 못본다고 생각하니 시원섭
섭하다. 더 이상 일에도 사랑에도 구속받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시
원한지 몰라. 난 너의 사랑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널 원망하진 않아 다
나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해. 난 이제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어. 아
버지와 어머니가 부모보다 먼저 죽은 불효막심한 자식이라고 저승갈
노자돈을 한푼도 넣어주지 않을까 걱정이야. 잘못하다가는 구천을 떠
도는 신세가 될지도 몰라서 겁이나. 저승갈려면 두둑한 노자돈이 필요
한데 말이야.....후후후...얘기들어보니 돈없으면 저승가기도 힘든다는
얘기도 있더라.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말이야...어쨋든 죽는사람
입장에서는 실로 큰 문제가 아닐수 없잖아...."
혜원은 편지를 읽다말고 겉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녀의 손이 풍맞은 사
람마냥 떨고 있었다. 혜원은 우체국소인과 날짜를 보았다. 봉투에는 글
씨도 선명하게 아현동 우체국이라고 찍혀 있었고 날짜는 12월 27일로
찍혀 있었다. 혜원의 머리가 빠르게 며칠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12월
27일이면 오빠와 속초에서 돌아온 다음날이다. 오빠가 속초에서 돌아
온 뒤 정재오빠가 아저씨 말씀을 안듣고 아저씨집에서 바로 나갔다고 정
아가 얘기했었다. 그리고 27일날 이른 아침에 정재오빠집에 전화를 했
을 때 정재오빠가 받을 전화를 정아가 받았었다. 무척당황하는 것 같
은 정아의 목소리...그리고 얼마후 민우씨가 갑자기 여행을 떠나자고 했
었고 라디오를 못듣게 했다. 어제 보성에서는 정재오빠 휴대폰으로 전화
를 했는데 정아가 받았다. 민우씨 어머니는 텔레비젼이 고장났다고 볼수가
없다고 하셨다.혜원은 3일동안 있었던 일련의 일들이 엉킨실타래처럼 머리
속을 헤집고 있었다.
혜원이 미경을 돌아보았다. 미경이 혜원의 어깨너머로
편지를 보고 있었다. 미경이 흠칫 놀라면서 뒤로 물러선다.
"미...미경아.."
혜원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예...어..언니."
"어..어제 28일 신문..좀 갖고 올..래?"
"어...언..니..어제 신문..없는..데..."
"무슨... 소리니? 어제 신문이 없다니? 그럼 오늘 신문좀 갖고 와."
혜원의 낯빗이 창백하다못해 검게 변하고 있었다. 미경은 눈을 크게
뜬채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저..그러니까..요. 그게 오늘 신문...은 안왔어..요. 신문은 죄다...
폐지 수집하는 아저씨가 갖고 갔어..요."
미경은 등에서 흐른 땀이 식으면서 한기를 느꼈다.
"내가 신문은 월초에 내놓으라고 했잖니!"
혜원의 음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혜원은 한동안 책상에서 손으로 머리
를 괴고 앉았다가 뭔가 생각난 듯 미경이를 돌아보았다.
"미경아, 내가 그저께 준 007가방 좀 갖고올래?"
"가..가방..요,예...언..니 알았어요."
미경이 방으로 들어가서 가방을 갖고 나온다. 혜원이 책상위에 가방을
놓고는 가방을 열고 노트북을 꺼냈다. 미경은 혜원이 뭘 하려는 건지 몰
라 어리둥절한 눈으로 혜원을 바라보았다. 혜원이 노트북을 열고 인터넷
에 접속했다. 혜원은 어느 포털싸이트에 들어가서 몇번 클릭을 하는가 싶
더니 검색창에다 `신한쇼핑센터 박정재`를 입력했다. 곧 화면이 바뀌면서
`신한쇼핑센터 박정재`라는 글이 떴다. 혜원은 `신한쇼핑센터 박정재`를
클릭했다. 다시 화면이 바뀌면서 정재의 사진과 이력이 나오고 맨밑에
`2003년 12월 27일 사망`이라고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