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1일
제목 광야에서 누린 행복
본문 요1:19-34
세례요한의 인기는 아이돌 스타들의 수준을 능가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세례 요한 이야기로 넘쳐났습니다. 그의 눈빛은 강력하게 빛이 났고, 그의 말에는 정의가 넘쳐흘렀습니다. 그는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엘리야라 불렀고, 메시아로 오해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 삶의 현장은 거친 광야입니다. 물이 없고 더위와 추위에 시달려야 하는 최악의 환경입니다. 불편으로 충만한 광야였지만, 요한에게는 최고의 행복한 곳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만남으로 행복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했습니다. 요한은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배 속에 있을 때 친족 마리아의 방문을 받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어찌된 일인가”라며 감격의 찬양을 합니다. 이때 엘리사벳의 배에 있던 요한은 마리아의 배 속에 있던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기뻐했습니다.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어노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예수님을 만난 행복을 누렸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예언만 했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세, 사무엘,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는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11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요한은 인간적인 면에서 매우 불행했습니다. 30세에 자손도 없이 슬프게 생애를 마쳤습니다. 억울한 고통을 당했고, 광야의 불편함을 겪었지만, 그의 영혼은 행복으로 넘쳤습니다. 그 이유는 구주 예수님을 만나고 마음에 모셨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세례요한에게 잘 어울리는 행복한 찬양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본 것만으로 행복으로 충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큰 자일까요? 예수님을 만난 자입니다. 누가 행복한 자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을 했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의 부활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본 것만으로 선지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명예를 얻었고 높은 수준의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요? 비록 우리들의 형편은 광야처럼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자들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모신 우리가 큰 자이며, 큰 행복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미 내 안에 예수님이라는 행복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활성화를 하면 행복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햇빛 아래 살면서 손발을 주신 것과 입고 먹을 것을 주신 것과 가족과 이웃이 있음을 감사한다면 행복의 꽃이 활짝 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우리가 큰 자이며, 행복한 자입니다. 반드시 행복한 결말을 누리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세상과 연결해 주므로 행복했습니다
요한이 행복한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과 세상을 연결해 주는 일 때문입니다. 요한은 “네가 누구냐?”라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요한복음 1:23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고, 예수님을 세상과 연결해 주기 위해 외쳤습니다. 고독한 길이었지만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다른 사람과 연결해 줄 수 있음은 자신이 먼저 예수님과 연결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기 사명이 분명했습니다.
사람은 삶의 이유가 확실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면 삶이 고달파도 견딜힘이 생기고 자신의 처치를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사명이 분명하면 거친 광야를 걸어도 행복할 수 있고 웃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며,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요? 물질은 잠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함도 조금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항구적인 행복은 예수님과 연결될 때만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다른 사람과 연결해줄 때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연결은 생명에 연결됨 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큰 일은 생명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족과 이웃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일도 예수님을 연결해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공급해 주는 일도 귀하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연결해 주는 것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연결되는 것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을 “주 앞에서 큰 자”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세상과 연결해 주는 일은 정말 큰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모든 이웃을 예수님께 연결해 주는 사명을 다하십시오. 그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도 행복하고, 결과도 행복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높임으로 행복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어도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36-37에 보면 그는 자기 제자들까지도 자기 곁에 두지 않고 예수님에게 돌려 드렸습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예수님만 드러내는 데 전념합니다. 자신에게 쏠려 있는 군중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로 돌렸습니다. 요한복음 1:29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는 불의한 헤롯을 꾸짖다가 옥에 갇혔고 억울하게 목 베임을 당해도 서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퇴장으로 예수님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음을 행복해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므로 예수님은 등장하고 자신은 무대 뒤로 사라짐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앞세움이 요한의 행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사촌 동생이자, 어릴 때 친구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예수님을 전능한 분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요한복음 1:15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라고 함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드러냄이 요한의 행복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3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라고 했고, 요한복음 1:34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졌고 바른 지식이 바른 신앙을 갖게 했습니다. 말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하였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어야 할 분으로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을 전부로 삼았고, 예수님을 높이 드러냄을 행복으로 삼았습니다.
결론/요한 누린 행복은 예수님을 만남에서 왔고,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일과 예수님을 높여드림에서 온 것입니다. 요한에게는 예수님이 행복의 시작이며, 진행이며, 결론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을 구원 주로 믿는 행복, 예수님을 세상과 연결해 주는 행복, 예수님 높여드림으로 오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런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