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년의 미소
이해인 수녀
‘……자주 만나지 않아도 마음속에 있는 사람, 우리는, 우리 형제들은-이제는 태고적 같기만 한 어린 날로부터 그대와 한 형제 되어 한줄기 강물을 타고 흐르는 여정이 되었다네. 눈감아도 보이는 그 강물은 언제나 그리움 그 자체, 잊을 리가 있겠는가, 그대를…….’
지금은 이름난 화가로 활동 중인 진의 언니 엽서를 받고 나는 문득 옛 생각에 잠긴다. 나는 열 살 먹은 소녀로 돌아가게 하는 한 소년의 그리운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그 삼 형제 이름 가운데 ‘진’자가 들어가므로 나는 그들을 묶어서 ‘진형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나는 늘 새침하고 조용한 아이, 책 속에 파묻혀 꿈을 꾸는 아이였다. 4학년 때 나는 5반 부반장이었고 소년 진은 3반 반장이었는데, 그 애는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외모도 이국적이어서 여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반은 달랐어도 나 역시 호감을 갖고 있던 차에 한 번은 3반 담임 선생님이 편찮으셔서 며칠 결근을 하셨는데 그 반 반장과 임원들이 문병을 가고 싶어도 집을 몰라 못 간다는 애길 전해 들었다. 마침 나는 그 여선생님과 한 동네에 살고 있었고, 그 여동생과도 친구여서 내가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을 방문하던 날, 우리는 그 댁에서 준비한 맛있는 과자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 이후로 나는 장난기 가득하지만 따뜻하고 인상적인 소년 진의 미소를 기억하며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기 때, 혜화동 성당에서 함께 첫 영성체를 받은 친구임도 알게 되어 집에 와 사진을 보니, 하얀 너울을 쓰고 잔뜩 긴장해 있는 내 옆에 푸른 띠를 두르고 손을 모은 그 소년이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5,6학년 때 그는 사생대회에서 입상을, 나는 백일장에서 입상을 해 나란히 상을 받는 영광도 안게 되었다.
서로 반이 달라 접촉할 기회가 없던 우리는 졸업 전에 꼭 한 번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짧은 순간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비원 돌담길을 끼고 나는 친구 집을 향해 걷고 있었고, 그는 반대편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는데 우리는 새삼 반가우면서도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웃음만 교환했다. 참으로 따스하고 정감 어린 표정으로 미소 짓던 진 모습은 어린 내 가슴을 콩콩 뛰게 하였고,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걷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 후론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문득문득 그가 궁금하고 보고 싶기도 했으나 알 수 없었다. <빨강 머리 앤> 남자 주인공 길버트 모습에서 자주 그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이 끝날 무렵 하루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던 오빠의 성당 선배인 B 아저씨가 당신의 먼 친척뻘 되는 댁이라며 나를 데려가셨는데 그 집이 바로 진형제들 집이었고, 나는 뜻밖의 반가움 속에 모든 가족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중학생이 된 소년은 더 멋져 보였고 수줍은 듯하면서도 내가 늘 좋아했던 그 미소로 정답게 대해 주었다.
나를 포함해 그와 그의 누나들, 그리고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정신적인 스승 역할을 했던 B 아저씨 영향으로 우리는 성직자, 수도자를 가장 아름다운 미래의 꿈과 이상으로 지니게 되었다. 진 역시 사제직을 지망하여 소신학교에 들어갔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일반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나는 생각보다 빨리 대학도 포기하고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었다.
그와 나는 열심히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내가 수녀원에 오고 나서는 몇 번 연락을 끝으로 자연 멀어지게 되었다. 가끔 그의 누나들로부터 그가 프랑스 유학 중에 아리따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공부가 채 끝나기도 전에 결혼했으며, 아이도 셋이나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그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그는 캐나다 퀘백시 유능한 도시환경 건축가가 되어 한국을 다녀갔고 텔레비전에 출연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의 누나들은 내게 가끔 얘기하곤 했었다. 오래 전 일이지만 흰 눈 내리던 어느 겨울날, 동생이 마당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줍고 있어서 살펴보니 강아지가 다 뜯어 놓아 읽을 수 없게 된 내 편지봉투 속 시 조각들을 하나라도 더 찾으려고 낱말을 맞추고 있었는데. 그 정성스런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항상 나의 시를 제일 먼저 읽는 독자가 되어 주고, 어른이 되면 제일 먼저 나의 시집을 묶어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싶다고 말하던 친구, 수도자로서 멋있게 살려면 판에 박힌 고루한 사고방식을 가져선 안 되며 생각의 폭을 더 넓혀야 한다고 충고하던 친구, 때로는 조개껍질과 도화지에 이름다운 그림도 그려 주고, 수녀원에 뜻을 둔 내가 나를 좋아하던 다른 소년 때문에 괴로워하며 다른 생각을 할라치면 정색을 하며 “그도 나도 널 좋아하지만 벨라뎃다(필자의 세례명)소녀는 하느님 외 누구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너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우리는 마음이 아프더라도 슬픔을 견뎌야하고, 너도 마찬가지야” 하고 짐짓 오빠라도 된 것처럼 단호히 말해 주던 좋은 친구를 나는 수녀원에 와서 더욱 고마워할 때가 많았다.
나의 첫 시집을 보면 그가 제일 기뻐할 것 같기에 간단한 사연과 함께 우편으로 보낸 일이 있는데 돌아온 답은 뜻밖에도 ‘시집은 간데없고 웬 반공서적만 봉투 안에 몇 권 들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번번이 훼방꾼이 나타나는 것도 심상치 않아 난 그 후로 아예 연락을 안 하는 게 현명하겠다고 판단하고 열심히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못 만난 세월 동안 많이 변했을 그 친구를 종종 기도 중에 기억하는 가운데 나는 어느새 중년 나이로 수도서원 25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그해 나는 우연히 수녀원 심부름 겸 초청강의도 할 겸 캐나다 토론토에 갔다가 본래는 예정에 없던 몬트리올에서 강의 관계로 이틀을 묵게 되었다. 그곳 본당 신부님께 혹시나 하고 그의 이름을 댔더니 대뜸 잘 안다며 그 자리에서 즉시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주셨으나, 아직 퇴근 전이어서 우리는 저녁 미사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친구는 전갈을 보내 우리의 다른 일정을 취소하게 하고 그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자고 초대했다. 하도 오랜만이라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그 옛날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프랑스풍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집 현관 앞에서 친구도 이젠 중후한 아저씨가 되어 환히 웃는 얼굴로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맞아들였다.
“이게 분명 꿈은 아니겠지? 30년 만이야. 그렇지? 며칠 전엔 내가 코스모스 꽃을 보다가 문득 네 생각을 했었는데……. 정말 이상하다……. 텔레파시가 통한 것 아닐까?”
그는 몇 번이나 말하며 내게 포도주를 따라 주었고 옛이야기에 꽃을 피우는 우리 모습을 내가 처음 보는 그의 부인과 아이들도 바라보며 함께 기뻐했다. 멋과 낭만이 넘치는 소설가이기도 하신 K 신부님은 식사 중에 우리 만남을 축복하는 특별기도도 해주셨다.
“너무 오랜만인데도 어색하지 않고 반말이 절로 나오네”하고 나도 친구에게 웃으며 이야기했다(‘이런 자연스러움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참으로 순결하고 애틋한 우정을 나누었기 때문이겠지?’ 하고 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시종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또 물었다.
“너, 수녀원에 간 것 후회 안하니?”
“아니.”
“수녀로서 행복하니?”
“응.”
“그럼 됐어.”
다정한 작은 오빠같이 말하던 그는, 내가 떠나던 날 이른 아침 몬트리올 공항에 나와 팀이 구상해서 만들었다는 도시건축 예술 관련 불어 서적 한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최근에 아버지 죽음을 통해 느낀 것. 그동안 체험한 자신의 인생, 신앙, 예술에 대해 짧은 시간이지만 담담하고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30년 만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2년 전 가을, 캐나다에서 가져온 단풍잎 몇 개가 지금도 내 책갈피에서 고운 추억의 빛깔로 불타고 있다. 단풍잎 속에서 그 옛날 소년 진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건넨다.
“생각나니? 네가 수녀원에 가기 전에 내게 주었던 그 빨간 노트 말이야. 내가 제일 소중히 생각하는 그 노트는 아마 누나가 갖고 있을 거야.”
“그래, 그런데 넌 그 귀한 노트를 내가 대학에서 처음으로 사귄 여자 친구에게 내 허락도 없이 보여 주었잖아. 그 애가 너와 헤어지고 나서 이별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나한테까지 찾아왔던 일 너는 모르지? 자기는 떠나지만 나더러 요한의 영원한 친구로 남아 달라는 부탁을 하러 일부러 수녀원까지 왔다고 해서 나는 누군지도 모르고 면회실에 나갔다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곤란하고 마음이 아팠겠네?”
“아니야, 그래도 너에겐 고마운 일이 더 많아. 어린 시절에도 그토록 어른스럽고 절제 있게 행동한 네가 지금도 무척 기특하고 신기하게 생각될 때가 있어.”
“고마워. 어쨌든 앞으로도 좋은 시 많이 쓰고 건강해. 알았지?”
“응, 알았어. 나도 늘 너를 위해 기도할게. 그런데 있잖니. 비행기가 하늘로 뜨고 나서 이제 어쩌면 너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눈물이 나서 조급 울었어. 나 우습지?”
“아니….”
아직도 투명한 그리움이 묻어 있는 캐나다 빨간 단풍잎 속에서 친구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첫댓글 수녀님 보고 자파^^
고운 글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