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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월 13일 월요일
[(녹)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힐라리오 주교 학자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시작입니다. 1,1-6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곧 충만한 계시의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결정적인 자기 계시’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말씀과 일거수일투족, 그 행동과 삶을 통하여 왜 그분께서 구세주 하느님이신지, 하느님의 생각과 마음, 하느님 눈에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그분의 제자요 아들딸인 우리는 진정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연중 시기는 바로 그러한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와 그 신비를 차례차례 배워 가며 그분을 만나고 친밀해지는 시간이지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일은 바로 제자들을 부르신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다른 모든 공적 활동에 앞섭니다. 공동체 형성이 하느님 나라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홀로’가 아닌 ‘더불어, 함께’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이며, 제자들은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합니다.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우리말 번역도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가 되라고 하십니다. ‘사람 잡는 어부’라고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잡는 것’과 ‘낚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은 낚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낚는다는 것은 낚시로 한 마리 또는 몇 마리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며 잡을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더욱 친밀하고 인격적인 환대의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김동희 모세 신부)
우리의 하느님은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선구자 요한이 무대를 잘 꾸며놓고 구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일종의 바톤 터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이 집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4-15)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인류 구원 사업의 첫 협조자인 초기 사도단을 부르십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네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제자단을 부르시는 광경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이지 전격적이고 뜻밖의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잘 배운 사람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대사제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열심히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그물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그물을 손질하여 내리고 있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시고, 자신들을 눈여겨보시며, 이윽고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제자들의 성소 출발점을 묵상하니, 어찌 그리 제 성소 여정과 판박이인지 놀랄 지경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하루 온 종일 설계실에 앉아 도면을 바라보고, 도면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는 갑작스레 제 뒷덜미를 잡고 낚아채셨습니다. 정말이지 얼마나 난감하고 당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당시 저는 수도 생활에 대해서는 단1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많이 아플 때였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는데, 나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인데, 나같은 사람도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엄청났습니다.
사실 제 학창 시절 내내 생활 기록부에는 늘 이런 표현이 반복되었습니다. ‘지극히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임.’ ‘남앞에 나서기를 힘들어하니 발표력을 키울 필요가 있음.’
어딜 가면 늘 구석 자리를 찾았고, 주변 사람들과 교류도 잘 하지 않고, 하루 온 종일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제 안에 갇혀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런 저를 부르시고, 다양한 과정을 통해서 저를 단련시키셨습니다.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저를 집어 넣으셔서 재창조하시고 당신 말씀의 봉사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십니다. 당신 사업의 협조자로 완벽한 사람, 똑똑한 사람,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저처럼 한없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성탄 사건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깊숙이 개입하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구차스럽고 죄투성이인 우리 한명 한명의 인생 여정 안에도 분명히 육화강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이 깊은 상처 사이에 탄생하십니다. 때로 따분하고 한심한 우리 각자의 하루 하루 그 안에 탄생하십니다. 때로 너무 스치스러워 얼굴을 들기조차 힘든 죄스럽고 남루한 우리 삶 속에 탄생하시고 현존하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2년입니다. 어느덧 42년이 지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 입구에는 교가를 돌에 새겨놓은 표지석이 있었습니다. 교가의 내용은 비장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진세(塵世)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의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베리타스(VERITAS)” 저의 사제 성소는 두 가지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정의 분위기입니다. 5대를 이어오는 천주교 집안이기에 삶의 중심에는 늘 ‘성당’이 있었습니다. 태어나면 당연히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가 있었습니다. 학교는 안 갈 수 있어도, 주일 미사는 빠지면 엄하게 혼났습니다. 첫영성체 교리를 배워야 했고, 기도문을 다 외워야 했습니다. 부활과 성탄 때는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찬 성당에서 미사 참례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주일학교 친구들입니다. 신학교에 가겠다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저도 친구들과 함께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같은 본당 출신 3명이 신학교에 들어갔고, 사제의 길을 함께 가고 있습니다. 교가에 나오는 대로 진세를 버리고, 이 몸마저 버리고,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치지는 않았지만, 큰 과오 없이 여기까지 온 것만도 하느님의 크신 은총입니다.
오늘의 본기도는 이렇습니다.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저는 여기에 하나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늘 우리 곁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길은 나의 거짓된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낡은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과 공기가 늘 우리 곁에 있듯이,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하느님 나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장소의 개념으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단의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3차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단순한 3차원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버리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모든 권한과 능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첫 번째 제자들도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죽으면 살리라’라는 말처럼 모든 것을 버릴 때,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조금은 불편하고, 손해 보는 것 같고, 남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가치 있고, 소중하며, 참된 행복을 주는 그런 자리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분명 빛이 나는 자리는 아니었고, 물질적인 이익이 보장되는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고, 그 길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2025년의 1월도 많이 지났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사람 낚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사람 낚는 사람
사람 보는 사람
사람 만나는 사람
사람 헤아리는 사람
사람 낚는 사람
사람 믿는 사람
사람 바라는 사람
사람 사랑하는 사람
사람 낚는 사람
사람 품는 사람
사람 섬기는 사람
사람 떠받드는 사람
사람 낚는 사람
사람 낳는 사람
사람 살리는 사람
사람 북돋우는 사람
사람 낚는 사람
오늘의 성인
성 힐라리오(Hilary)
신분 : 주교, 교부, 교회학자
활동지역 : 푸아티에(Poitiers)
활동연도 : 310/320?-367/368년?
같은이름 : 힐라리우스, 힐러리
프랑스 중서부 푸아티에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성 힐라리우스(Hilarius, 또는 힐라리오)는 귀족 집안 출신이었으나 스스로 성서를 공부한 뒤에 이교 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개종하기 전에 이미 결혼하였기 때문에 아내의 반대를 뿌리치고 350년경 고향 푸아티에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강력하게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배격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아리우스파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지아(Phrygia)로 추방되었는데,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리스의 신학 사상에 심취하여 대 신학자로 성장하였다.
그는 서방 교회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로 공경을 받았다.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이다. 또 그는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 음률을 붙인 찬미가를 활용하였다.
그는 마태오 복음서와 시편의 주해서를 만들었으며, 그의 제자이자 후에 투르(Tours)의 주교가 된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와 함께 갈리아 지방에서 수도원 제도를 장려하였다. 그는 367년 또는 36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1851년 5월 13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성녀 베로니카 (Veronica)
신분 : 수녀
활동지역 : 비나스코(Binasco)
활동연도 : +1497년
같은이름 : 베로니까
성녀 베로니카의 부모는 이탈리아 밀라노(Milano) 교외에서 힘든 노동을 하며 살던 가난한 사람이었다.
너무나 가난하여 딸에게 학교 교육을 시키지 못하여 베로니카는 글을 읽을 수조차 없었으나, 어머니의 신심에 힘입어 하느님의 사랑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성실하고 일 잘하는 여자로 손꼽혔고 또 지극히 겸손하였다.
그녀가 들일을 할 때에는 동료들과 가능한 멀리 떨어져서 잡담보다는 하느님을 관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그녀는 밀라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들어갈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입회했을 때부터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하였고 또 읽고 쓰기를 익혔다.
그러나 학업이 극히 부진함으로 원장은 만일 그녀가 세 글자를 알지 못하면 내쫓겠다고 하였다. 첫 번째는 마음의 순결이었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죄나 과오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하여 매일 묵상하는 내용이었다.
3년의 준비기간 동안 그녀는 이 모든 것을 규칙 그대로 실행하여 모범적인 수도자로 변신하였다. 그 후 그녀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속에서 탈혼에 빠졌고, 또 가끔씩은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예언한 날에 선종했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는 52세였다고 한다.
성녀 베로니카에 대한 공경은 1517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승인되었다.
복자 고데프리도 (Godfrey)
활동년도 : 1097-1127년
신분 : 수사
지역 : 카펜베르크(Kappenberg)
같은 이름 : 고데프리두스, 고드프리
고데프리두스(Godefridus, 또는 고데프리도)는 독일 카펜베르크 성의 백작이며 뮌스터(Munster) 교구 내에 있는 베스트팔렌(Westfalen)의 대지주였다. 그가 젊은 아내를 맞이하였으나, 성 노르베르투스(Norbertus, 6월 6일)의 영향을 받고 카펜베르크 성을 에워싼 광대한 땅을 제공하여 수도원을 짓게 하였고, 자신도 아내와 의논한 뒤에 수도자가 되었다. 그의 이런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긴 집안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인내하여 아내와 딸들마저 수녀가 되게 하였다. 그는 자기 영지에 구호소를 비롯한 자선 기관을 설립하는 한편 묵상기도에 전념하였으며, 환자와 순례자의 발을 손수 씻기는 일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