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2:1-10,구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2장은 바울이 자기 변호를 하는 1장에서의 연속입니다. 본문에는 바울과 그의 일행이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한 이유는 바울의 이방인의 사도직을 공식적으로 인정과 괸련된 내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예루살렘 총회는 A.D.49년에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한 이방인의 할례시행에 관한 문제, 구약 의식법 준수문제등을 논의한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총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십사 년 후' 라는 단어는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을 첫번째 방문하고 나서 14년 후를 지칭하는데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예루살렘을 총 5번 방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 말씀은 세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건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성을 변증하고 공식적으로 인준받으려 하고 했는데 율법주의자들이 이방인 디도에 대한 할례시행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에 대한 할례를 단호히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는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을 배격하는 의미이고. 또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임을 공식으로 인정한 사실을 밝히면서 또 바울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신적 기원성을 가지고 있음을 유대 율법주의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영적인 교훈을 깨닫고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1,2절에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 두 사람을 데리고 갔는데 바나바와 디도입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의미이고'디도''공경하다'의 의미입니다. 이들이 유력한 자들, 즉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을 제출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당시에 모든 교회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공인을 받으므로 정당성도 확보되고 이단이라 몰아 붙이는 유대주의자들의 공격도 차단하기 위함이라 볼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이 처음부터 예루살렘에 의해 사도직을 전수 받은 것도 아니고 복음을 전수 받은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 교회의 권위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역시 동일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엡4:4-6절에서 말씀합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해야 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8:18,19), 요한 사도도 말씀합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위에서 위배되지 않는다면 그 결정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이고 교회의 일원임을 고백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체험적인 확신을 고집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주님으로부터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을 것이 필요 없다고 하면 그것은 질서를 깨는 교만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도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을 제출하여 교회적인 공인을 받는 것은 참 진리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예외가 될수 없습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은사)가 있다면 반드시 교회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예언을 한다고 하면 교회에서 검증이 되어지고 허락하시면 당당하게 사역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절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은 하나님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고 악령도 동시에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에게도 중요하고 교회에도 중요한 일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마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비진리와 타협하는 것은 진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이방인 디도에게 할례를 억지로 받지 않게 했다고 하십니다. '억지로''에낭카스테'는 '재촉하다''강권하다''강제로하다' 란 의미의 동사 '아낭카조'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강제로 당하게 하였다'란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물리적인 강요, 압박, 정신적인 부담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누구도 디도에게 할례받으라고 강제로 강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 수장인 베드로도 야고보도 강제하지 않았는데 율법주의자들만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여 실제로는 예수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세워진 구원의 효율성, 완전성을 헤치는 것이어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반대한 것입니다.
4절에 '가만히 들어 온 거짓 형제''투스 파레이삭투스 프슈다델푸스'에서 가만히는 스파이처럼 몰래 들어온 자라는 의미입니다. 왜 가만히 들어 왔을까? 기회를 얻으려고, 왜, 파괴하고 헤치려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즉 할례받은 유대인만 구원이 있다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선민 사상에서 나온 혈통적 구원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라고 분명한 선을 그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5절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할례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지키기 위해 복음을 훼방하는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한번 들여다 봅시다, 다른 사람은 제쳐 두고라도 자신과의 타협은 하지 않는지요? 사실은 저는 많이 합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자신과 너무도 많이 합니다. 사람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변명때문에 또합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말씀보다 더 의식하는 것이 앞에 설 때 우리는 일시적인 편안을 누릴 수 있지만 진리를 수호 할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라도 평등합니다.
6절에 보면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유력''도쿤테'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을 의미합니다. 뒤에 나오는 '유력'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지칭하고 있으며 또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이말은 바울이 전한 이신칭의 외에 더하여 준 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 준수, 할레등을 추가 적으로 명하지 않았다, 즉 다른 것이 없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또한 가로안에 있는 말씀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은 그가 얼마나 유명하던지 또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보다 더 뛰어난 자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약2:1절에서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말씀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교회는 다양성을 통해 완전해 집니다.
7-9절에서는 베드로는 할례자에게 바울은 이방인에게 사도로 세움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은 바울에 대해 잘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신경을 쓴 것은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진실한 일군인가, 왜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들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 인정하고 기꺼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서 권위를 인정하고 세워 준것입니다. 그 증표가 교제의 악수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부분에서 나와 달라도 그가 하나님의 일군이라면 인정하고 세워져야 합니다. 이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전12장에서 바울은 사람을 비유하여 말씀합니다. 눈, 코, 입, 손과 발,등등을 통하여 서로 다르지만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 다양성을 통해 교회를 완전하게 이끌어 가십니다. 롬12:4,5,"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아멘.
구제는 단순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10절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구제는 초대교회에서부터 늘 있었던 일입니다. 또한 바울도 이 구제를 사역 초기때 부터 힘써 행하던 일이었습니다. 구제는 주 안에서 주의 피로 하나된 가난한 형제와 자매된 자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인데 이 행위가 주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 이것은 바로 사랑이고 섬김입니다. 그래서 히13:16,"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일이 동성애라고 주로 생각하고 있는데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겔16:49=50), 예수님도 말씀하시었는데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11:41)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사도성을 의심받고 배척받아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내게 직분을 주신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오직 주님만 십자가만 바라보고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합시다. 또한 구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 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안에 있는 주의 형제들을 도우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진정으로 고나의 짐을 나누어 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의정부 등대지기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