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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Paradigm Shift 2---‘k-power plant’를 만들자
----------『명품발전소 건설과 운영』 맺는말----------
배움에서 자립까지의 뜨거운 歷程
우리나라 발전설비용량이 약 0.6GW이던 1967년에 한전에 입사하여, 지금은 자취가 사라진 삼척시 정라항 인근 구 삼척화력발전소에서 처음 근무했습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나면서 한국은 새 발전소를 많이 건설하여, 2016년에 총설비용량 100GW를 넘는 세계10대 發電강국이 되었습니다. 감개무량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지에는 하잘것없는 산업시설뿐, 그나마 북한에 집중되어 있던 발전설비. 남북분단 후 1948년 5월14일 북한으로부터의 갑작스러운 斷電으로 남한은 암흑천지였습니다. 남은 산업시설마저도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분단의 땅에서 5.16혁명과 산업화 정책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나라를 성장시켰습니다.
사진은 을지로에 지금도 남아있는 한국전력 최초의 본사 구관입니다. 저 멀리 명동성당이 보입니다.
이 무렵 혁명정부는 조직적인 전원개발을 시작합니다. 전력성장은 경제성장률보다 앞서 나가야 하고, 전기 없는 산업화는 불가능한데, 당시에 전기는 모자라고, 발전소를 건설할 자금이 없으니, 미국의 무상원조와 차관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선박이 들어오고, 발전소가 지어집니다. 이 무렵 삼척, 마산, 당인리 무연탄 발전소 단기용량은 겨우 25MW, 현재는 최대 1,050MW로 약 260배 커졌고, 그 때 운전과 정비는 외국인의 조언과 지도로 수행했습니다.
전 한전 기술본부장 유부웅 선배님의 증언에 의하면, 정부는 육해공해병대 장교 출신 중에서 전역을 앞두고 한전에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을 뽑아서, 이른바 ‘ICA 멤버’라 불리는 42명의 인재들을 미국 ‘벡텔’에 보내 발전소 교육을 시키면서, 1주일에 1회 시험을 치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술을 익히게 하고, 귀국 후에는 성적순으로 발전소 관련 요직에 앉히는 조치를 취합니다. 이어 조선전업에서는 1기생 사원을 뽑는데, 당시 명문대를 중심으로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입사하였고, 이후 3사 통합으로 이뤄진 한전을 훌륭하게 이끌었습니다.
그 후에도 한전사원들은 기술 없는 나라의 설움을 안고 미국-독일-일본 등 선진국 연수교육을 다녀오는 과정에서 기술을 배워갑니다. 저 자신도 네 차례 일본연수를 다녀오며 많은 것을 배운데 대해 한전과 일본 제작사에 감사드립니다.
사진의 책은 1963년에 처음 발간된 발전기술서적의 ‘수정본’으로, 총 5권 중 제5권인데, 영국-미국-캐나다-호주-독일이 합작해 발간한 것입니다. 그 시절 우리나라는 5.16 혁명 후 2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우린 지금도 이런 책 없습니다.
“어둠을 이겨내자 광명의 역군”
저의 어린시절은 6.25 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았던 때. 상이용사들이 잘린 팔에 쇠갈고리를 차고 그 못사는 시골까지 동냥을 다니던 가난한 초가 뒷마당에는 방공호가 남아있었고, 미국원조로 배급된 우유가루와 강냉이 가루를 섞고, 나뭇잎도 따 넣어 밥하던 시절에, 방 한 구석 고콜에서 소깽이(관솔)를 피워 어둠을 밝히던 동네에 어느 날 환한 전기가 들어왔지만, 그 대가로 개천 뚝방에서 마을을 감싸고 돌았던 수백 그루 아름드리 방풍림들이 다 베어져, 지금도 고향의 그 소나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소년은 장성하여, 산업화를 위해 혁명정부가 전략적으로 설립한 국립공전 1기생으로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7년 한전에 입사하여 “어둠을 이겨내자 광명의 역군”이라는 한전 社歌를 부릅니다. 삼척화력발전소 굴뚝에서 뿜어대는 탄재를 맞으며 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삼척화력 직원이 되었지요. 그 후 한전과 서부발전 근무 중 대부분 석탄발전소 현장에 근무하였고, 38년 간 근무 후 퇴사하고 나서도 15년 간 민간기업의 발전분야에서 계속 일했으니,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알 수 없는 단어이겠으나, ‘제한 송전’을 하다가, 드디어 ‘무제한 송전’이 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전기를 많이 생산하게 되면서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집니다. 부산 부두에 들어와 귀중한 전기를 생산해주던 미국의 ‘발전함’(發電艦), 전기가 모자라 때로는 강제로 공급을 차단하던 ‘제한 송전’, 늘 전기가 들어오는 ‘특선’과, 자정이면 전기가 나가는 ‘일반선’, 전기를 훔쳐 쓰는 ‘도전’(盜電), 그런 불법을 찾아내는 ‘천용’(擅用) 같은 전기 용어들이 ‘보리고개’라는 단어처럼 점차 잊혀지는 가운데, 우리네 삶과 가장 밀접한 전기가 제공하는 빛(조명)-열(취사)-힘(동력)을 만드는데 일생을 살아온 수많은 한전 출신 중 한 사람으로서, 이제 전기품질은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점에서 50여년 전 과거를 회상하면 참으로 감회가 깊습니다.
구 삼척화력발전소
학생 신분이면서 군 입대 전인 스무 살에 한국전력 사원이 되어 철없이 우쭐대던 삼척화력(사진①)은 수명이 다해 훗날 철거되었습니다. 역시 지금은 철거된 부산화력3,4호기 시운전요원으로 잠시 근무합니다. 부산화력 옛 공중사진(②)은 한적한 농어촌이었던 감천동, 괴정동 일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동화력 발전소
이어 중규모 국내 무연탄 발전소들이 등장합니다. 가정용 19공탄을 만들기 위해 석탄을 캐는 도중에 걷어낸 저열량 탄이 갱도 앞에 산더미처럼 쌓이자 정부는 석탄산업을 살리려는 정책으로 영동화력(사진 125MW, 200MW), 서천화력을 위시한 무연탄 발전소를 세워 이를 대량 소비하면서 탄광산업을 활발하게 만듭니다. 삼척화력을 거쳐 1979년 초, 영동 2호기 시운전 요원으로 생전 처음 해외연수를 다녀왔습니다. 그 때는 한전직원들도 준공무원 신분으로 표지가 빨간색 Passport를 썼습니다.
보령화력발전소
삼천포와 보령화력이 건설되면서 본격적인 ‘역청탄 500MW 시대’가 열렸습니다. 삼척, 부산, 영동화력 발전소 안에서 날리던 무연탄 가루. 돌가루가 많으니 쇠 파이프가 배겨나지 못하고 닳아서, 발전소 안에도 탄가루가 참 많이 날렸습니다.
그러나 역청탄 발전소는 무연탄과는 전혀 달라서, 그야말로 대단한 변화였습니다. 보령화력 시운전요원으로 두번째 일본 연수를 갔을 때 만난 松島화력발전소는 너무 깨끗해서 신기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야! 나도 이런 발전소 한 번 가져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대로, 그런 깨끗한 보령1,2호기가 건설되어, 신나게 일하며, 역청탄 발전소라는 ‘신세계’를 만나 많은 지식을 흡수하였습니다. 이후에 건설된 발전소는 거의 역청탄용으로, 매우 깨끗합니다.
보령1,2호기는 초기 이름이 고정(高亭)화력이었는데, 준공 초기에는 많은 고장에 ‘고장’화력이라는 나쁜 별명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를 숨기지 않고 ‘公開 處理’하면서 모두가 악착같이 일하여, 1988년에는 화력발전소 최초의 ‘1주기 무고장 운전(OCTF)’을 달성합니다. 이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여 작은 기념품을 직접 도안하여 만든 것이 사진에서 보는 ‘무한대의 의지’입니다. 기념품(사진) 치고는 참 많이 초라합니다만.
이후에는 보령1,2호기가 연속해서 여러 차례 OCTF를 달성했고, 국내 최우수발전소의 영예를 일곱차례나 받았습니다. 그 때 우리는 정말 신나게 일했습니다. 우리는 자체 발간한 계간지 ‘保化’ 기술지에 우리가 했던 Business Process를 상세히 기록, 후진들이 배우고 발전시키도록 했습니다. 어떻게 일했기에 전국 최우수발전소를 일곱번이나 차지할 수 있었는가? 그 내용을.
이런 노력 외에도 우리는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찾기 위한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해마다 1월1일이면 발전부 직원들과 자재부 직원들이 정성들여 장만한 제수음식으로 소장님과 함께 여러 사람이 출근하여 터빈실에서 고사를 지내고, 발전소 진입로변 토정 이지함 선생 묘에서도 安定운전을 기원하던 일이 새삼스럽고, 신입사원이 입사하면 발전소 앞 國思峰과 烽臺山에 오르면서 고생 고(苦)가 아닌 높을 高 ‘高行 극기훈련’으로 정신수련을 시키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그 때 극기훈련생들이 지금 당진, 하동 등 대단위 발전본부의 본부장을 맡고 있어 흐뭇합니다.
그 때 종합기술정보지 『保火』, 직원 문예지 『사락배(士樂岩)』를 계간으로 발간하는 정열을 쏟았고, 발전기술세미나도 여러 차례 개최하여, 기술력 증진에 힘썼으며, 연말에는 ‘보화 한마당’ 잔치도 여러 해 개최하였습니다. 모두가 김영문, 문영권 님 등 상사의 넓으신 배려 덕분이었습니다.
1991년에는 개인적으로 영광스럽게도 한전인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윤판식 본부장님과 많은 동료, 그리고 후배들의 지원으로, 제가 영광을 독차지해서 미안합니다.
후에 국내 초임계압 석탄발전소의 효시 보령3,4 와 5,6호기의 시운전 기전부장으로 연속해서 참여했는데, 그 때 시운전을 하는 도중에도 무척 많은 문제들이 튀어나왔습니다. 한국에 새로운 형식, 고효율 발전소가 도입될 때마다 겪는 시련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 같지만 전혀 당연하지 않은 일입니다. 경험과 기술이 부족했던 시절이니 이해는 가지만, 앞으로는 어떤 형식이 들어와도 고장이 적게 되도록 설계-제작-시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김동주 전 한전 기술본부장께서 보령 소장 때 가르쳐주신 「문제점 관리카드」를 작성하여, 모든 문제점은 다 까놓고 처리했습니다. 당시 그 일 때문에 고통을 겪은 분들도 있겠지만, 보령3~6호기는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초임계압발전소 효시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그 때 시운전 참여자들과 함께 정리한 『시운전 기술자료집 1&2』는 후일 건설된 전국의 수십 기의 후속기에 많은 기술을 제공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여수화력 1년을 거쳐, 보령으로 돌아와, 도합 14년 간 정말 구석구석 발로 뛰어다녔던 보령화력 1~6호기입니다.
태안화력발전소
전력연구원과 태안화력(사진)을 거치고, 2001년 한전에서 분사된 서부발전 본사 운영팀장을 거쳐, 2005년에 태안 제1발전처장으로 38년 간의 한전과 한국서부발전 생활을 마치고, 두산중공업으로 입사합니다.
이런 가운데 국가적으로는, 석탄화력은 말할 것도 없고, 원자력 발전소도 가스터빈 발전소도 많이 건설하여 우리는 연간 10%를 넘는 ‘세계적인 국가전력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2011년 12월, 우리나라는 역사 상 처음으로 무역 1조 달러의 금자탑을 세웠습니다. 정부의 강력한 경제개발정책 아래, 선지적 기업인들과 부지런한 근로자들이 함께 땀 흘려 이룩한 위대한 업적입니다.
이런 성과를 뒷받침하는 데는 산업의 피– 그 大動脈인 전기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국가 산업화 정책의 성공이요, 한전과 발전회사는 물론, 참여하신 모든 산업계의 승리입니다.
사진은 무역센터 코엑스 앞에 설치되었던 ‘무역1조달러달성’ 기념 네온 사인입니다.
저 열두개의 태극 문양 앞에 선 늠름한 ‘1’자.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안정된 전력공급으로 산업화를 뒷받침한 사람들 중 하나로서, 저 장면을 촬영하여 여기 싣는 행운에 또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자리하였던 한전 본사(사진)는 길 건너 맞은편 무역센터 건물 모양이 상징하듯 쭉쭉 전력성장을 이끌었지만, 이제는 자취도 찾지 못하게 헐리고, 지방으로 이전하였습니다. 다섯 발전회사 본사도 모두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망연한 심정으로 추억만 그립니다.
이제 화력발전소 단위용량은 500에서 870MW로 격상되었다가, USC 1000MW 시대를 맞이하여 국내 최초 국산 USC 1000MW 신보령1,2호기가 준공되었습니다. 이렇게 양에서도 규모에서도 눈부신 진전이 있었고, 그에 따라 독자기술도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어, 마지막까지 극복하기 어렵다 여겼던 증기터빈까지도 두산중공업은 기술자립을 하였습니다. 매우 기쁩니다.
53년 발전분야 종사
이 책의 내용은 대부분 한전과 국내∙외
발전회사의 경험이며, 여기에 여러 민간기업에서 배운 발전소 건설 및 설계지식 또한 많이 실었고, 특히 미래비전 또한 제시하였습니다.
햇수로는 54년 간의 경험기록을 精誠들여 편집했습니다. 서부발전 퇴직 후부터 집필했으니, 15년 정도 걸렸습니다. 그 중간 중간에 비매품으로 제본하여 후배들에게 전달도 했고요.
후배들이 이 책에 나온 수천 건의 사례에서 힌트를 얻고, 수많은 아이디어에서 드넓은 생각을 하여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책에서는, 때로는 발주자 입장에서, 때로는 제작사나 EPC회사 입장이 되었지만, 모두가 명품발전소를 추구하려는 내용들입니다.
점심이고 저녁이고, 도시락 뚜껑을 열면 주인의 젓가락보다 탄 가루가 먼저 밥에 내려 앉던 삼척화력 신입사원시절, 확 품어 나오는 불길에 눈썹이 그을려도 긴 쇠꼬챙이로 보일러 안의 Clinker를 찍어 떨어뜨렸고, 해가 지면 이튿날 해 뜰 때까지 30분마다 보일러 옥상에 올라가 ‘울진 삼척 공비’가 침투하지 않는지 순찰하던 버너 운전요원, 도면을 복사하려고 Oil Paper에 Tracing해 가지고 암모니아 가스 냄새 맡으며 청사진을 굽던 일, 대여섯 장 ‘미농지’ 사이사이에 먹지 끼우고 볼펜으로 꾹꾹 눌러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전표를 쓰던 일도, 전지 크기의 ‘갱지’에 차트 글씨를 써 전사 분임토의 발표회에서 발표하던 일도 지금 회상하면 보람찬 추억입니다.
1986년에 박정기 사장님∙ 이종훈 부사장님과 김동주 전무님, 강정섭, 이상영 처장님 등 임원∙본사 소∙실장, 재경 사업소장님들이 임석한 자리에서 ‘바람직한 간부像’을 발표했던 초급간부시절도 있었고, 몇 며칠 밤새기 일하며 고장이 난 발전소를 수리하던 부장시절에 받은 ‘1991년도 한전인상 大賞’은 제 일생일대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전력연구원 그룹장으로 전국규모의 발전기술모임도 개최했고, 한전 분사 후 서부발전 초대 운영팀장으로 간부들과 머리를 맞대고 짠 ACOPS전략을 서부발전 초대 홍문신 사장님과 본사임직원 앞에서 발표했고, Value Innovation 100을 만들어 발전소 경영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리고자 시도했던 태안제1발전처장, 두산중공업과 SK건설에서도 발전부문 기술고문으로서, 여러 차례 강의를 할 때마다 경청해주신 사장님들과 임원님들 감사합니다. 어떻게 하든 “더 잘해보자”는 내용을 말씀드린 것이니, 많은 양해 바랍니다. 아무튼 그 모두가 저에게는 ‘영광’ 또 ‘영광’이었습니다.
이렇게 펼쳐 놓는다고, 마치 제가 모든 것을 다 한 것처럼 말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제가 보람으로 여겼던 것들을 얘기했으니, 좋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후배 젊은이들은 이해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회사’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시절, 버젓이 정년퇴직일이 정해져 있는데도 죽을 때까지 계속 일할 줄 알았던 행복한 착각, 퇴직하고서도 계속 그 때 일하던 꿈을 꾸는 회사, 처자식과 가정사보다는 회사일이 100배 더 소중하던 마음도, 가난을 떨쳐주신 고마운 회사, 처자식 먹여 살려주신 회사, 고마운 마음에 회사만 믿고 노후대책 계산도 없이 살았던 젊은 날의 ‘몰빵’ 삶도, 한전 분사 때 회사 쪽을 향해 백 번 절하던 일도, 돌이켜보면 다 아름답습니다.
요즘, 모르는 지식은 선배에게 묻기보다 인터넷에서 더 빨리 찾을 수 있고, 모든 문서는 수량이 얼마간에 쉽게 복사할 수 있고, 손 글씨 못써도 문제 안 되고, 全紙에다 차트 안 만들어도 되는 시대입니다. 오늘을 사는 후배들은, 우리보다 시간을 버는 그만큼 더 가치 높은 일을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순시한 현장이나 제가 참석한 회의장이나, 아무 때나 마구 들이대는 카메라 때문에 놀래신 분들께는 송구한 말씀 올립니다. 결코 누구의 잘못을 꾸짖거나, 무슨 사적인 이익추구의 증거로 쓰거나, 취미활동으로 촬영한 것은 아닌데, 충분히 오해를 살만 했습니다. 그 사진으로 결코 누구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았고, 모두 교육 강의 등, 건전한 교육자료로 사용했습니다.
디지털 시대, 4차산업혁명의 물결을 타고, 철관 발전소를 지능 발전소로 바꾸자는 ‘Power Plant Paradigm Shift’.
저의 이 바람은 언제 성취될 수 있을까요?
쉬운 예를 들자면, 복합화력은 이미 외관부터 발전소 공장 티가 안 납니다. 겉모양이 그러하니, 이제는 그 안에 일하는 사람들이 단순반복업무 아닌,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수행하는 일이 고급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고를 예방하고, 열효율을 높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인공지능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 게 아니라, AI의 도움을 받아서, 그 덕분에 인간으로서 할 수 없었던 일까지 가능하니, 정말로 가치가 높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석탄화력발전소도 지금은 저탄장부터 옥내화하여 외부에서는 석탄 알갱이를 볼 수도 없어, 조감도 자체가 엄청 변했습니다. 이제는 사원들이 하는 일, 내부 일이 ‘확!’ 달라져야 합니다. 그 정도로, 센서-로봇-자동제어-정보통신 등 첨단기술이 매우 발전했으니, 평소에 하는 일을 바꾸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것을 ‘Power Plant Paradigm Shift’라 합니다.
굴뚝산업의 대명사 석탄화력을 지능산업체로 바꾸자는 저의 이 주장이 널리 퍼지지기도 전에, 국내에서 환경오염발전소라며 퇴출이 시작되었으니, 이 책은 시절을 잘못 타고나 억울합니다. 현직에 근무할 때도 뜬구름 잡는 얘기 좀 많이 했던 장본인이지만, “꿈꾸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도 없다”는 말을 후진들과 다같이 음미했으면 합니다.
발전소의 기본 개념과 구성은 석탄-가스-유동층-원전 등 어떤 형식이든 상당수가 비슷하고, 특히 일하는 방법은 당연히 똑같으니, 어디에서나 적용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석탄 발전소는 금방 없어질 것이 아닙니다. 석탄은 싸고-무엇보다 안전하고-매장량이 많은 자원이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없어지지 못합니다.
[電力회사]인 한국전력, [發電회사]인 한국서부발전, [製作회사]인 두산중공업, [設計회사]인 현대엔지니어링과, [建設회사]인 SK건설을 거쳐, [整備 회사]인 금화C&E에 잇달아 근무하는 홍복을 누렸습니다. 모든 회사에 진심으로 고마운 말씀 올립니다.
이 나라 전력사업발전에 큰 일을 수행하셨던 많은 선배님들이 “너 한 번 맘껏 놀아봐라”는 듯 멍석을 펴 주셨기에 이만큼이라도 편집할 수 있었음에, 많은 선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또 저의 많은 실수와 잘못을 포용해 주신 많은 선배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함께 보람을 일구던 많은 동료들, 가혹한 ‘일 시킴이’로 기억할 많은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함께 표합니다.
두산중공업 윤종준 부사장님, 남동발전 권순영 전무, 현대엔지니어링 염흥수 상무, SK건설 심성걸∙ 문경모 전무 모두 고마운 마음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늘 마음에 의지가 되고 삶의 응원군이 되어주는 친구들, 선ㆍ후배님들, 사랑하는 가족들 모두 다 고맙습니다.
2021년 여름을 넘기면서
저자 김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