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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방 외 9편 / 백수인
아버지의 방
감나무 마른 가지 같은 아버지의 한 생애를 양지바른 산 중턱에 묻어 두고 터벅터벅 돌아왔다 뒤란에 목련이 새하얗게 흐드러진다 하얀 꽃 사이사이 새 소리조차 서글프다
방에 들어서자 아버지는 나보다 먼저 돌아와 계신다 온 방에 아버지가 가득하다 벽에도 이불에도 책장에도 서랍에도 아버지 목소리가 가부좌로 앉아 계신다 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에 문풍지가 바르르 떤다 그때 괘종시계는 벌써 세 점을 친다
톱
그것은 태초의 이빨이다
모든 존재를 물어뜯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치열이다
팔을 자를 수도
다리를 자를 수도
몸통을 자를 수도 있다
한 밤중 잠을 깼다
치매기 있는 아버지
아파트 방문들을 여닫고 다니셨다
“톱이 있어야것는디 어따 뒀는지 못 찾것다야
대가 저렇게 쑥쑥 올라오는디......”
아버지는 포기하고 다시 잠자리에 드셨다
봄볕 서럽게 따뜻한 날
홀로 계신 어머니의 텃밭
사이사이 대나무 순이 쑥쑥 올라오고 있었다
내 손에 어느새 이빨 번쩍거리는 톱 한 자루 들려 있었다
아버지는
튼튼하게 흐르던 강물을 자르고 시간의 둥지 속으로 가셨고
나는 무섭게 솟아오르는 대나무들을 자른다
아버지의 손목시계
지금 아버지의 시계는 내 손목에 있다 초침은 부지런히 두 팔을 휘저으며 강변길을 열심히 걷고 있다 그는 언젠가는 강물이 흐르는 속도에 맞춰 위와 십이지장, 작은창자와 큰창자를 거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이다 거기엔 온갖 시간들이 몰려 웅성거리는 바다가 있을 것이다. 망망한 바다는 끝이 아니다 시계는 파도치는 해변에서도 살아 있고, 구름 속에서도 열심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비가 쏟아질 때도 물처럼 살아 흐를 것이다. 열심히 강변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원래 시계는 아버지의 팔목에 있었다 진지를 잡수실 때나 산책을 하실 때나 텃밭에서 잡초를 뽑을 때나 항상 아버지의 팔목에 있었다 화장실에 가실 때나 텔레비전을 보실 때나 주무실 때에도 항상 아버지의 왼쪽 팔목에 감겨 있었다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 깊은 숨을 몰아쉬는 찰나에도 초침은 거기에서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시계 속으로 걸어들어 가시어 열심히 강변길을 걷고 있고 강물은 삶의 시간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일기장
-마당
헤드라이트가 지나간 뒤의 어둠은 아찔하다 어둠을 등에 지고 골목을 돌아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당이다 마당에서 다시 문을 열면 또 마당이다 다시 문을 열면 또 마당이다 나는 밤새 마당에서 마당으로 다시 마당에서 마당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수 천 겹의 마당을 만들어 놓고 마당을 지고 마당 속으로 가셨다.
아버지의 마당에선 총소리가 났다 겨울 유치 가지산 골짜기 얼음 사이를 흐르는 물소리가 났다 솔바람 소리가 얼음보다 차가웠다
총소리가 아니라 공사장 다이나마이트 터지는 소리였던가 물소리가 아니라 무논에 써레질하는 소리였던가 솔바람 소리가 아니라 눈 내리는 밤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였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당은 늘 기울어졌다 기울어진 마당을 돌면 멀미가 났다 멀미 속엔 바닷물이 가득 출렁거렸다 비린내가 울타리 사이로 빠져 나갔다 빠져나가도 마당이다
마당이 기운 것이 아니라 돌담이 쓰러졌던가 멀미가 아니라 이명이었던가 이명 속에 소나기 내리는 들판이 있었던가 울타리 사이로 빠져 나간 게 비린내가 아니라 거름 냄새였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당에서 빠져나가도 또 마당이었다는 기억만 또렷하다 헤드라이트가 지나간 지 오래다 수많은 별빛들이 쏟아져 온 마당에 쌓이고 있었으나 마당을 지고 가신 아버지는 이 마당에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의 일기장
-유배
흥건하다 땀이 흥건하다 피가 흥건하다 고통이 흥건하다 걱정이 흥건하다
아버지는 아들을 강제로 제주도로 보냈다 사실 보낸 건 ‘시대’였다 아니다 아버지의 작은 가슴이었다 제주행 비행기는 취해 비틀거렸다 프로펠러가 가끔 헛돌았다 짙은 구름이 프로펠러에 감겼다 풀리곤 했다 창 밖에 내려다보이는 작은 섬들이 하나 둘 하늘로 솟구쳤다가 사라졌다 섬들이 다시 조용히 가라앉고 흰 구름이 흐믈흐믈 녹아내릴 때 늙은 새는 가지에 겨우 앉았다 새가 가지에 다다르자 차디찬 사슬이 아들의 온몸을 가두었다 한라산 꼭대기 떠도는 구름이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제주시가지는 멀쩡한데 성판악 부근엔 폭우가 내렸다 5.16 횡단도로가 바람에 뒤뚱거렸다 도로엔 이념 감옥의 죄수들, 땀과 피가 흥건했다 도로는 산을 이미 둘로 쪼개 놓았다 성판악에선 간혹 카랑한 총소리가 골짜기를 둘로 쪼개곤 했다 그때마다 한라산이 순간 움푹 파이곤 했다
천지연폭포는 끊임없이 산을 토해내는데 산은 ‘시대’처럼 물처럼 지리하게 흘렀다 그리하여 마지막 바다에 닿는 것은 늘 흥건한 부끄러움이었다 파도는 너무 게으르게 철석거리며 슬픈 뱃고동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저승 같은 이어도가 저만치서 자꾸 손사래를 쳤다
장작패기, 혹은 ‘화려한 휴가’
고향집 마당 돌담 곁, ‘해당(海棠)’이라는 나무 한 그루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늘 가득 수천 송이 꽃 활짝 피우는 5월이면 어머니는 늘 “우리 두 늙은이만 보기 참말로 아까워야”하시며 반색이셨습니다 때를 맞춰 고향집 마당에 서면 온통 꿈속 같은, 그건 하늘에 걸린 꽃밭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그 아름다운 자태의 나무, 잎이 마르기 시작하더니 가지까지 시름시름 말라갔습니다 읍내 정원사 불러 영양제 링거를 맞히기도 하고, 백방으로 애써 봤지만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이듬해 봄 되어도 영영 잎을 피우지 못한 나무의 주검,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안타깝고 짠한 마음 그지없었습니다 그 때 곁에서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습니다 “니 아부지가 한 달 내내 그 밑에서 시퍼런 도끼날 세워 장작을 팼으니, 날이면 날마다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 맴이 오죽했겄냐 그걸 보다 못해 자결한 거여”
아버지의 가지산⁕
아버지는 빨치산이었다
장흥 유치 보림사 뒷산 가지산에서
허벅지에 총을 맞고 잡혔다
그 후 평생을 그 가지산을 등에 지고 사셨다
논에 물 대러 갈 때에도
마을회관에 나갈 때에도
면사무소나 군청에 갈 때에도
그의 등엔 항상 가지산이 업혀 있었다
아버지가 짊어진 가지산에는
천년고찰의 목탁소리 대신 총소리가
쨍하고 울리곤 했다
미전향장기수 리인모 선생이 판문점을
지나 북으로 갈 때에도
아버지의 가지산에선 총소리가 났다
겨울 산골짜기 얼음 깨지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병실에서 의료진이 회진을 돌 때면
“나는 죄 없는디, 왜 나를 잡으러 온다냐?”
속삭였다
“나는 아무 죄도 없는디....”
아버지는 끝내 그 산을 부리지 못하고
산속으로 가셨다
2018년 4월 27일 9시 30분
남북의 두 정상이 손을 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찰나
나는 티브이 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때 큰 산 무너지는 우레소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가지산을 부려버린 아버지가
빈 몸으로 활짝 웃고 서 계셨다
*가지산(迦智山): 전남 장흥군 유치면(有治面) 봉덕리(鳳德里)와 장평면(長平面) 병동리(屛洞里)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510m. 달마(達磨)의 선법(禪法)을 처음 전한 통일신라 헌덕왕(憲德王) 때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開山)한 보림사(寶林寺)가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빨치산의 본거지 중 하나였다.
섣달그믐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아무도 기거하지 않은 냉랭한 사랑채 아궁이에 군불을 땐다 칠 년 동안 비어 있던 가마솥이다 잔별 가득 영혼처럼 반짝이는 샘물을 길어 빈 세월을 채운다 바람에 구르던 낙엽 몇 잎이 불쏘시개다 불을 붙이자 매운 연기에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눈물을 훔치며 몇 번을 붙이고 또 붙이자 이내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한 철 뙤약볕을 머금고 있는 콩깍지 몇 뭇을 태우고 한 철 비바람을 보듬고 있는 깻단을 태우고 또 태운다 그리고 부러진 소나무 가지를 불타는 아궁이에 집어넣는다 한겨울 산골짜기를 훑고 지나가는 솔바람 소리 들린다 할아버지 한 평생이 소나무의 나이테로 환하다 아궁이 안에서는 세상 모든 게 벌겋게 타오르다 결국은 새까만 숯으로 사라진다
나는 따끈한 아랫목에 할아버지 자세로 눕는다 할아버지 카랑한 기침 소리 들린다 섣달그믐 밤이 유성처럼 흐른다
벌초를 하며
할머니는 땅 속에 앉아 아직도 배추와 무를 다듬고 계신다 석양에 비친 내 허기의 그림자를 보시곤 배추 뿌리를 하나 깎아 내 입에 넣어 주신다 노을 한 점을 삼킨 듯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할머니의 웃음 같은 금니가 반짝 내 눈을 스쳐 지나간다 앵앵앵 돌며 풀잎을 자르던 예초기 날이 돌멩이에 닿았는지 사나운 금속성을 내며 허공으로 퉁긴다 할머니는 땅 속에 앉아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시는 것인지 사념의 풀잎들이 늘 웃자라 있다 나는 그 뿌리에 닿도록 날을 눕혀 무성하게 자란 근심의 잎사귀들을 깎아낸다 동백기름 바르고 은비녀를 지른 가지런한 할머니의 쪽진 머리, 오늘따라 윤기가 유난하다
벚꽃 지는 날
초가집 무너지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깼네
참 희한한 꿈이네
날 밝기 기다려
고향집에 전활 걸어 할아버지 안불 물었더니
요즘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고 하네
98세를 강건하고 꼿꼿하게 살아가시던 할아버지
이승에서 마지막 한 번 뵈어야겠다고 문을 나섰네
길가에 벚꽃 환하게 피어 온 하늘이 밝네
그날 고향집 가는 길은 얼마나 멀던지
걷다가 보면 허방을 짚고
가다가 보면 눈앞엔 열 길 절벽이네
한식경 논둑길을 돌다보면 큰 강이 앞을 가로막네
가파른 산길을 가다가다 뒤돌아보니
벚꽃 만개한 길 아래 내가 홀로 발가벗고 서 있네
벚꽃 세상은 순간이대
며칠 지나 눈 내리듯 꽃은 지고 있었네
할아버지의 한 생애도 순간
벚꽃처럼 “초속 5cm”로 지고 있었네*
*일본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만든 3부작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에 나오는 대사에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cm래.
■ 시작노트 ------------------------------------------------------------
나는 산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나 줄곧 거기서 살았다. 자연 그대로의 삶이었다. 여름밤이면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평상에 누워 은하수 흘러가는 길을 보곤 했다. 석유 등잔불 아래에서 숙제를 하고 책도 읽고 일기도 썼다. 겨울밤이면 산골짜기를 불어 내려오는 깊은 바람 소리를 들으며, 문풍지 떠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곤 했다. 초등학교까지 왕복 2십리를 매일 걸어서 6년을 다녔다. 읍내 중학교, 고등학교까지는 왕복 30리가 넘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소와 돼지, 염소와 개, 붕어와 피라미, 제비와 솔개와 비둘기, 메뚜기와 방아깨비와 매미, 소나무와 감나무, 오리나무, 팽나무, 참나무, 유자나무, 그들과 함께 살았다. 그리고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막내 삼촌(아재), 막내고모, 나, 동생 둘 이렇게 열 식구가 대숲 밑에서 함께 어울려 살았다. 그리고 사랑채에서는 항시 일꾼들이 북적였다.
우리 집 우물가에는 수백 년이나 살았을 고목 감나무가 있었다. 열매는 비록 작았지만 가을이면 수없이 많은 붉은 열매를 달고 있었다. 밑동에는 가끔 땅벌들이 들어와 집을 짓고 살기도 했다. 그 나무의 둘레는 아이들 서너 명이서 팔을 이어야 잴 수 있을 정도였고, 키는 아주 커서 동구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의 설을 쇠고 이튿날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해수병으로 몇 년을 고생하시다 일생을 마치신 것이다. 그 이후 몇 년이 지났을까 어느 해 그 무성했던 감나무가 죽었다. 이어서 몇 해 후 소태나무 두 그루가 죽고, 유자나무도 죽었다. 다 늙어 죽은 것이다.
나는 도회에 나와 대학을 다니고 도회에서 직장에 다니며 아이들을 키웠다. 어느 해 여름 전주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했었는데, 이튿날 내가 묵던 호텔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다.
죽은 나무들 자리에 새로운 나무들을 심었다. 감나무, 목련, 장미, 철쭉, 대추나무, 배롱나무, 금목서들이 새 식구로 자라나 때 맞춰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었다. 까치, 산비둘기도 날아들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또 흘렀다. 도시의 뒷골목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벚꽃 흩날리는 봄날이었다.
우리 집은 나로부터 10대조 ‘지장(之章)’ 할아버지가 새로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장은 서환과 서오를 낳고, 서환은 계태와 계의를 낳고, 계태는 희방을 낳고, 희방은 사시와 사형과 사보를 낳고, 사시는 운희를 낳고, 운희는 기래를 낳고, 기래는 춘흠을 낳고....” ‘춘’자 ‘흠’, 그가 내 할아버지시다. 고향집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났다.
어느 가을, 뒷 사립문 옆에 있던 그 무성하던 해당나무가 죽었다. 봄이면 연붉은 꽃이 하늘을 가렸었는데 그가 아무 이유 없이 풀썩 쓰러지고 만 것이다. 몇 년 후에 다행히도 죽은 그 나무 자리에서 열댓 걸음 떨어진 곳에 어린 해당의 싹이 돋고 있었다. 지금은 돼지우리 뒤로 옮겨 심어 놓았더니 봄이면 제법 화려한 꽃을 피운다.
어느 날 감나무 밑에서 아버지는 나에게 불쑥 물으셨다. “너는 장래 뭐가 될라고 생각하냐?” 나는 “시인이요!”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내가 국어 교사, 시인이 되길 바랐다. 아버지는 일제 때 소학교에서 일본인 선생님한테 시를 배우던 시절이 그리웠을 것이다. 사범학교 다니면서 시인을 꿈꾸었던 그 시절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시대’에 쫓겨 살면서 이루지 못했던 꿈을 아들을 통해 비추어보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 줄곧 좋은 시인이 되라고 내 등을 두들겨주었다. 병석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면서도, 나더러 막걸리 한 사발 나누자던 아버지. 나는 내 시집 한 권을 드렸다. 생전에 내 시집 한 권을 다 읽으셨을까, 내가 응급실에서 그의 손목을 잡고 있을 때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아버지의 손목시계는 여전히 째깍째깍 부지런히 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시집 올 때도 고목이었다는 단감나무 한 그루는 지금도 살아있다. 지금 그 보금자리 고향집에 가면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아직 살아 있는 나무들과 그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과 창고 앞 서성이는 고양이들과 함께 살고 계신다. 텃밭에는 배추, 상추, 고추, 오이, 가지, 도라지, 마늘, 무, 고구마, 감자들이 언제나 우리 어머니의 마음을 단단히 지켜주고 있다.
ㅡ 『우리詩』 2019년 3월호
첫댓글 멋진 소시집 잘 읽었습니다.
아버지 연작시들이 애잔하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