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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3. 각주용어를 끄집어내어 본란에 입력하고 박충원관련 기록물을 별도로 추기하다.
2019.10.23. 문장의 내용이 난해하여 각주와 설명을 보충하여 다시 등록시키다.
文景公朴駱村先生記蹟碑文(문경공 박낙촌 선생 기적비문)
壯陵(장릉)의 冤抑(원억)은 史乘(사승)에 遺傳(유전)되고 六臣(육신)의 忠義(충의)는 竹帛(죽백)에 照燿(조요)하다.
壯陵(장릉)이 廢位(폐위)되어 寧越僻地(영월벽지)에 逺竄(원찬)되고
六臣(육신)의 慘禍(참화)가 잇따라나고
宗戚舊臣(종척구신)은 勿論(물론) 三族滅門(삼족멸문)의 禍(화)가 續起(속기)하여
世情(세정)이 極度(극도)로 陰險(음험)하고 民心(민심)이 畏怵(외출)하여 갈피를 잡지 못할 때에
壯陵(장릉)마저 賜死(사사)되었다.
壯陵(장릉)에 近接(근접)하면 逆徒(역도)로 指目(지목)되는 版局(판국)에
오직 戶長嚴興道(호장 엄흥도)만은 忠誠(충성)으로 乘夜竊負(승야질부)하고
荒榛幽谷(황진유곡)에 倉卒藁葬(창졸고장)하였다.
어제의 어린 君主(군주)가 오늘날 이같은 慘變(참변)을 當(당)하게 되니 어찌 天道(천도)가 無心(무심)하랴
金枝玉葉(금지옥엽)의 靈魂(영혼)인들 어찌 徹天(철천)의 恨(한)이 없으리요.
그러나 嚴戶長(엄호장)마저 死亡(사망)하매 藁葬地点(고장지점) 조차 알 수 없이 風雪(풍설)에 露晒(노쇄)될 수밖에 없었다.
이 後(후)로 고을 郡守(군수)가 赴任(부임)하면 暴死(폭사)됨이 三員(삼원)에 이르니
朴駱村公(박낙촌공)이 中宗三十六年(중종 36년)에 이 郡(군)에 出守(출수)되니
郡吏(군리)가 前事(전사)를 告白(고백)하고 避舍(피사)할 것을 請(청)하였으나
公(공)은 死(사)는 命(명)이라 하고
衣冠(의관)을 整齊(정제)하고 明獨端坐(명독단좌)하던 中(중)
非夢似夢間(비몽사몽간)에 小(소) 主(주)의 命(명)을 받은 差人(차인)이라 하여 끌려간즉
草樹翳檜中(초수예회중)에 小(소) 主(주)가 儼臨(엄림)하시고
六臣環侍裏(육신환시리)에 嚴責(엄책)과 出辟(출벽)할 것을 命(명)하시나
第三座者(제삼좌자)의 奉請(봉청)으로 宥免(유면)되었다.
깨어보니 夢中一事(몽중일사)인지라
날 밝기를 기다려 嚴戶長(엄호장)의 後孫(후손)인 一老吏(일노리)의 前道(전도)로 葬地(장지)를 尋訪(심방)하니
亂山叢薄中(난산총박중)에 小塋(소영)이 夢中所見(몽중소견)과 恰似(흡사)하였다.
公(공)이 汪然(왕연)히 出涕(출체)하고 荆穢(형예)를 芟除(삼제)하며 兆域(조역)을 封築(봉축)하고 松檜(송회)를 심고
鄭重(정중)히 祭祀(제사)를 올릴 때
王室之冑(왕실지주)요
幼沖之辟(유충지벽)이라
適丁否運(적정부운)하여
遜于僻邑(손우벽읍)이라
一片靑山(일편청산)에
萬古孤魂(만고고혼)이시여
庶幾降臨(서기강림)하사
式歆苾芬(식흠필분)하소서
라는 祭文(제문)을 奉讀(봉독)할 때
詞調(사조)가 悽愴(처창)하여 스스로 泣涕(읍체)를 不禁(불금)케 되었다.
그날밤 또한 夢中(몽중)에 一人(일인)이 公(공)의 손을 잡고
前日(전일)의 第三座者(제삼좌자)는 卽我(즉아)라 하니 成謹甫(성근보 성삼문)였다.
君(군)의 忠誠(충성)이 이일을 堪當(감당)하였기에 宥免(유면)을 奏請(주청)한 것이라고 하였다.
公(공)이 惻然(측연)히 感涕(감체)하여 塋域(영역)을 禁護(금호)하고 蒸甞(증상)으로 歲薦(세천)한 後(후)에
비로소 郡灾(군재)와 妖言(요언)이 終熄(종식)되어 在職五年(재직5년)에 郡民(군민)이 心悅(심열)하였다.
公(공) 前任者(전임자)인들 어찌 이런 心情(심정)이 없었으리요마는
威(위) 命(명)이 畏懾(외섭)되어 窒死(질사)하였으나
오직 公(공)은 威禍(위화)에 動心(동심)치 아니하고 千古(천고)의 遺恨(유한)을 풀게 한 것이다.
肅廟朝(숙묘조) 命(명)으로
崇土立石(숭토입석)하고 陵(능)으로 封(봉)하여 莊陵(장릉)이라 하고 位號(위호)를 追復(추복)하고
太廟(태묘)에 附躋(부제)하였다.
萬一(만일) 公(공)의 夢中事(몽중사)가 없었던들 墓所(묘소)마저 찾지 못하였을 것이며
國家(국가)의 懿典(의전)이 있다 할지라도 褥禮封陵(욕례봉릉)을 施行(시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公(공)의 炳義偉烈(병의위렬)은 六臣諸賢(육신제현)과 더불어 百世(백세)에 빛날 것이다.
公(공)의 諱(휘)는 忠元(충원)이요
字(자)는 仲初(중초)요 號(호)는 駱村(낙촌)이요 本(본)은 密陽(밀양)으로 新羅王孫(신라 왕손)이며
世祖廟名相右贊成密山君恭孝公諱仲孫(세조묘 명상 우찬성 밀산군 공효공 휘 중손)의 髙孫이요
贈吏曹判書凝川君諱藻(증 이조판서 응천군 휘 조)의 子(자)이시다.
中宗丁卯(중종 정묘)에 生(생)하였으며
內舅竒服齋遵(내구기복재준)에 受學(수학)하매 才質(재질)과 文詞(문사)가 出衆(출중)하여
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摠官密原君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총관 밀원군)에 이르고
宣廟辛巳(선묘신사)에 卒(졸)하니 享年(향년) 七十五歲(75세)였다.
訃聞(부문)에 上(상)이 撤(철) 朝(조)하시고
賻祭(부제)를 特(특) 賜(사) 하시고
英祖丁丑(영조 정축)에 文景(문경)으로 諡(시)하고
肅慕殿(숙모전)에 追配(추배)하고 魯山書院(노산서원)에 配享(배향)되었다.
그 後孫(후손)들이 이 紀蹟碑(기적비)를 세우고자하니
公(공)의 義烈(의열)과 功蹟(공적)을 抄錄(초록)하여 後世(후세)에 傳(전)하노라
成均館長(성균관장) 昌山成樂緖(창산 성낙서) 謹撰(근찬)
右文(우문)은 中仁明宣四朝名臣(중 인 명 선 4조 명신)으로서
莊陵(장릉)을 推尋封築(추심봉축)하신 文景公駱村密陽朴忠元先生紀蹟碑文(문경공 낙촌 밀양 박충원 선생 기적비문)이다.
本文(본문)은 成均館長成樂緖氏(성균관장 성낙서 씨)의 撰述(찬술)인바
旣(기)히 年久(년구)하여 碑體(비체)가 毁損(훼손)되었을 뿐 아니라
碑(비)와 碑閣(비각)의 規模(규모)가 文衡巨卿(문형거경)의 建造(건조)로는 不適(부적)한바 있어
舊址(구지)에 改建(개건)하는 것이다.
이제 撰文(찬문)을 玩讀(완독)하니
文雅典重(문아전중)하고 辭簡而舉悉(사간이거실)하여
後世人(후세인)이 先生(선생)의 偉蹟忠誠(위적충성)을 意識(의식)하기에 容易(용역) 할 것이다.
先生(선생)의 德蔭(덕음)이 長流(장류)하여
子孫(자손)의 蕃衍(번연)으로 基數不億(기수불억)이요
冠冕(관면)과 德業(덕업)이 不絶蟬聯(불절선련)하니
그 누가 欽仰(흠앙)하지 아니하리요
諸宗(제종)이 議決(의결)하여 捐財改建(연재개건)하니 그 慕先誠(모선성)이 至極(지극)함을 讚揚(찬양)하는 바이다.
伐石(벌석)에 臨(임)하여
原文(원문)을 提示(제시)하고 追記文(추기문)을 請(청)하므로
右(우)와 如(여)히 簡述(간술)하고 後日立言君子(후일립언군자)의 鏡鑑(경감)에 有備(유비)하노라.
光復後初庚午殷春(광복후 초 경오 은춘)
原任成均館長傍後孫(원임 성균관 방후손) 重勳(중훈) 謹記(근기)
後孫 鎮泰 謹書(후손 진태 근서)
西紀 一九九十年 庚午四月 日 改豎(서기 1990년 경오 4월 일 개수)
[각주` 용어설명]
冤抑(원억) 억울한 죄를 입다. 부당하게 억압당하다. (冤 원통할 원 抑 누를 억)
史乘(사승)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책
竹帛(죽백) ‘서적’이나 ‘사기’를 이르는 말
照燿(조요) 빛으로 나타내는 것. (照 비출 조, 비추다. 燿 빛날 요, 빛나다)
逺竄(원찬) 멀리 유배 보내다. 멀리 귀양 보내다. (逺 멀 원. 竄 숨을 찬 숨기다. 내치다)
宗戚舊臣(종척구신) 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 舊臣 옛 신하
三族滅門(삼족멸문) 三族 부계, 모계, 처계. (滅門 한집안을 다 죽여 없앰. 族滅족멸 한 집안이나 종족을 남김없이 모두 죽여 없앰)
續起(속기) 이어서 일어나다. ~발생하다. ~만들어 내다. 續이을 속. 起일어날 기. 속기(續起) : 개간.
世情(세정) 세상의 형편이나 사정
畏怵(외출) 두려워하다
乘夜竊負(승야질부) 밤을 타서 몰래 업고 감으로써.
(乘夜 어떤 일을 하는 데에 밤중을 틈탐. 竊 훔칠 절. 남몰래. 슬그머니. 負 질 부. 지다. 업다.)
荒榛幽谷(황진유곡) 거친 숲속. 우거진 잡목. (幽谷 깊고 그윽한 산골)
倉卒藁葬(창졸 고장) 倉卒 미처 생각할 사이도 없이 매우 급함. 藁葬 시체를 짚이나 거적에 싸서 장사를 지냄
徹天(철천) 하늘에 사무친다는 뜻으로, 두고두고 잊을 수 없도록 마음에 사무침을 이르는 말
藁葬地点(고장지점) 시체를 짚이나 거적에 싸서 장사를 지낸 장소.
風雪(풍설) 세상살이의 온갖 고난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눈과 함께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露晒(노쇄) 露이슬 로. 허무함의 비유. 보잘것없음의 비유. 晒쬘 쇄. (볕에)쬐다. (볕에)말리다. (볕이)나다
暴死(폭사) 갑자기 비참하고 끔찍하게 죽음
三員(삼원) : 세 명의 관원, 여기서는 3명의 영월군수를 말함
朴忠元(박충원) 1507년(중종 2)~1581년(선조 14).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 9월 초 7일에 영월군수로 부임하여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1) 정월까지 재임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정관재(靜觀齋). 박조(朴藻)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행주기씨(幸州奇氏)로 기찬(奇欑)의 딸이다.
1528년(중종 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에 승문원에 올라 홍문관에 참예하였다. 다음해 사국(史局)에 돌아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이어 설서·승정원에 전직되었다. 그 뒤 독서하라는 명으로 당후(堂後, 승정원의 주서가 사무를 보던 곳)에서 대기하다가 장악직장(掌樂直長)이 되었다.
1534년에 예문관봉교가 되었다가 전적(典籍)이 되고, 이어 정언이 되었다. 다음해 이조정랑·사간원정언·이조좌랑·헌납·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1537년에 병조정랑으로 있다가 이조정랑으로 옮기었다.
조부상을 당해 3년 뒤 다시 승문원교검에 보직되었다가 영월군수로 발령되었다.
이때 이 군에 3태수가 죽어나가 요담(妖談)이 흉흉해 모든 사람이 이곳에 부임하기를 꺼렸으나, 박충원이 초연하게 행동해 기괴한 소문이 사라졌다.
1545년 인종이 중국사신 영접사로 부름을 받아 나가기도 하였다.
그 후 직강(直講)이 되었고, 이어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사성·성천부사를 거쳐 중시에 발탁되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올랐고, 통례원우통례 겸 교서관판교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좨주(祭酒)로 있다가 해서(海西)를 안무(按撫)하였다.
1554년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형조참의가 되었고
1556년 세번째 승정원에 들어갔다.
1558년 한성우윤·병조좌랑을 거쳐 밀원군 겸 홍문관제학(密原君兼弘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이어 예조판서·사헌부로서 호남·호서를 안무하였다.
1564년 명종이 ‘大提學兵曹判書朴忠元(대제학병조판서박충원)’이란 10자를 친필로 하사하였다.
1567년(선조 1) 대종백(大宗伯)으로 전직되었을 때, 중국에 국사를 검토하는 일로 빈상(儐相)의 명을 받아 기대승(奇大升)·이후백(李後白)·이산해(李山海)가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 뒤 여러 중직을 거쳐 정승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저서로 『낙촌유고(駱村遺稿)』가 있다.<한국역대인물종합DB>. <영월군선생안>
前事(전사) 과거에 있었던 일
避舍(피사) 관아에서 피하다.
明獨端坐(명독단좌) 홀로 유독 단정하게 앉아.明獨 유독. 端坐 단정(端正)하게 앉음
小(소) 主(주)의 命(명)을 받은 : 임금의 명을 받은 신하(小아랫사람)
差人(차인) 일을 시중드는 사람. 임시 심부름꾼으로 부리는 사람.
草樹翳檜中(초수예회중) 잡초가 우거진 전나무 그늘에. 翳깃 일산 예. 檜전나무 회
儼臨(엄림) 엄연한 풍모로, 엄연히, 엄숙하게. 엄연히 군림(君臨)하시어.
六臣環侍裏(육신환시리) (死六臣)여섯 신하들이 둘러앉아있는 가운데
嚴責(엄책) 엄한 책망(責望). 엄하게 허물을 들어 꾸짖음
出辟(출벽) 쫓아내다. 바깥으로 나가다.
奉請(봉청)으로 宥免(유면) : 임금(主)에게 말씀을 올려 잘못을 용서하여 놓아줌
一老吏(일노리) 한명의 오래된 관리, 한명의 늙은 관리
尋訪(심방) 찾아가서 보다.
亂山叢薄(난산총박) 여기저기 어지러이 솟아 있는 산들에 무성한 수풀
小塋(소영) 작은 무덤
汪然(왕연) 눈에 눈물이 쏟아질 듯이 가득한 모양.
出涕(출체) 눈물이 쏟아지다. 눈물이 흐르다.
荆穢(형예)를 芟除(삼제)하며 : 거친 가시나무와 풀을 베어 없애버리고~
(荆 가시나무 형. 穢더러울 예. 거칠다. 잡초. 芟除 풀을 베어 없애 버림
兆域(조역) 무덤이 있는 지역
松檜(송회) 소나무와 전나무
祭魯陵文(제노릉문) 병계선생집 34권 잡저에 실려 있다.
祭魯陵文(제노릉문)은 낙촌 박충원이 중종 36년(辛丑 1541)에 찬술한 제문인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王室之冑(왕실지주) 왕실의 후사로서, 幼沖之辟(유충지벽) 어린나이에 임금이 되셨는데,
適丁否運(적정비운) 때마침 비색(否塞)한 운수를 만나, 遜于僻邑(손우벽읍) 궁벽한 (영월)고을로 손위하셨네.
一片靑山(일편청산) 한 조각 청산에 자리한, 萬古孤魂(만고고혼) 만고의 외로운 혼이시여,
庶幾降臨(서기강림) 바라오니 강림하시어, 式歆苾芬(식흠필분) 정성스런 제사를 흠향하소서.
詞調(사조) 문장을 뜻한다. 詞말 사, 글 사. 시문. 調고를 조. 고르다
悽愴(처창) 몹시 슬프고 애달픔
泣涕(읍체)를 不禁(불금)~ (소리를 내지 않고)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것을 멈추지(금하지) 못하고
惻然(측연) 측은(惻隱)하게 여기는 모양
感涕(감체) 깊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림
蒸甞(증상)으로 歲薦(세천)한~ 제기에 담은 제물을 맛보고는 해마다 올리기로 한~
心悅(심열) 가슴으로 기뻐하다
畏懾(외섭)되어 窒死(질사)하였으나~ 두렵고 무서워하여 숨이 막혀 죽었으나
威禍(위화) 위험과 재화
千古(천고) 썩 먼 옛적, 영구(永久)한 세월(歲月)
遺恨(유한) 생전의 남은 원한(怨恨), 잊을 수 없는 원한(怨恨)
肅廟朝(숙묘조)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肅宗)의 조정
崇土立石(숭토입석) 흙을 높이 쌓고(봉분을 높이고) 석물을 세우다.
太廟(태묘)에 附躋(부제) 종묘(宗廟)에 신위를 올려 모시다.
懿典(의전) 아름다운 의식, 기리는 의식, 훌륭한 법
褥禮封陵(욕례봉릉) 성대한 예를 갖춰 무덤을 능으로 만들다.
광해군일기47권, 광해 10년 9월 6일자에 ‘<親臨褥禮,새로이 임하는 성대한 예식을>’ 기록이 있다.
炳義偉烈(병의위렬) 빛나는 의지의 위대(偉大)한 공적(功績)
諱(휘) 죽은 이의 이름은? 名(명) 살아있는 자의 이름은?
內舅竒服齋遵(내구기복재준)에 受學(수학)하매~ 외삼촌에게 공부를 하다.
內舅(내구) 외숙(外叔)`외삼촌. 齋遵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따르다
宣廟辛巳(선묘신사) 선조 14년(宣祖 十四年) 1581년(신사)
訃聞(부문)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消息)
撤朝(철조) 나라에 변고(變故)나 국상(國喪)을 당(當)하거나 했을 때 조회(朝會)를 정지(停止)하던 일
賻祭(부제)를 特賜(특사)~ (충원의 죽음에)임금께서 특별히 부의물품을 보내시다.
(賻儀부의 초상집에 부조로 보내는 돈이나 물품. 特賜특사 임금이 신하에게 특별히 내림)
英祖丁丑(영조 정축) 영조 33년(英祖 三十三年) 1757년(정축)
肅慕殿(숙모전)은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의 동학사(東鶴寺) 경내에 있다.
단종(端宗)과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魯山書院(노산서원)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文衡巨卿(문형 거경) 文衡은 조선시대 때의 대제학(大提學)을 뜻하고, 巨卿은 큰 벼슬을 뜻한다.
文雅典重(문아전중) 文雅 시문을 짓고 읊는 풍류의 도(道). 典重 언행이 법도에 맞고 점잖음
辭簡而舉悉(사간이거실) 간결한 문장 속에 다 담았으니 (辭簡而 말은 간결하면서도)
容易(용역) 용이하다. 받아드리기 쉽다.
長流(장류) 길게 흐름
蕃衍(번연) 한창 성하게 일어나 퍼짐
基數不億(기수불억)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基數 수를 나타내는 데 기초가 되는 수.
不億불억에 대하여 <강수은간양록. 계사>에 “其麗不億 이런 부류가 헤아릴 수 없는데” 가 있고,
<계곡선생집 제1권 사(詞) 부(賦) 17수(首)>에 “厥麗不億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데”가 보인다.
冠冕(관면) 벼슬하는 것을 이르는 말
不絶蟬聯(부절선련)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다. (不絶끊이지 않다. 蟬聯 연달아 내려오다. 현달하다)
欽仰(흠앙) 존경하여 우러러 사모함
諸宗(제종) 여러 종친들
捐財改建(연재개건) 재물을 기부하니 고쳐 세우다.
慕先誠(모선성) 조상을 따르는 정성
伐石(벌석) 돌을 채취하다
光復後初庚午殷春(광복후초경오은춘) 1990년 꿈틀거리는 봄날에. 殷春(봄이)성하게 꿈틀거리다.
《박충원(朴忠元) 관련 기록물》
○魯山墓。在寧越郡。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묘가 영월군에 있는데,
自魯山終後。노산군이 죽은 뒤에
郡守多暴死。군수가 갑자기 죽는 이가 많으니,
世傳爲凶地。세상에서 흉한 고을이라고 하였다.
朴判書忠元。판서 박충원(朴忠元)은
起廢除郡守(기폐제군수)。벼슬길이 막혔다가 다시 나와 영월 군수에 제수되었다.
上官精具奠物致祭(상관정구전물치제)。부임하자,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갖추어 노산군의 묘에 제사를 올렸다.
其祝文曰(기축문왈)。그 축문에 이르기를,
王室之胄(왕실지주)。왕실의 주손이요
幼沖之辟(유충지벽)。어리신 임금이네
適丁否運(적정부운)。마침 비운을 만나
遜于僻邑(손우벽읍)。외진 고을에 피하셨네
一片靑山(일편청산)。한 조각 청산에
萬古孤魂(만고고혼)。만고의 고혼이로다
庶幾降臨(서기강림)。바라옵건대 강림하시어
式歆苾芬(식흠필분)。제사를 받으소서
하였다.
至今四時行祭(지금사시행제)。지금까지 사시(四時)에 제사를 지내는데
以此文行之。(이차문행지)이 축문을 쓰고 있다.
<大東野乘 東閣雜記[下] 知退堂李廷馨撰 本朝璿源寶錄[二]>
<대동야승 동각잡기[하] 지퇴당 이정형 찬 본조선원보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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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山墓在寧越郡。自魯山終後。郡守多暴死。世傳爲凶地。朴判書忠元。起廢除郡守。上官後。精具奠物以祭之。其祝文曰。王室之胄。幼沖之辟。適丁否運。遜于僻邑。一片靑山。萬古孤魂。庶幾降臨。式歆苾芬。至今四時行祭。以此文行之。
<知退堂集 知退堂集卷之十 東閣雜記坤 ○本朝璿源寶錄 [明宗]>
<지퇴당집 지퇴당집 10권 동각잡기곤 ○본조선원보록 [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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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山君墓在寧越郡。노산군(魯山君)의 묘소는 영월군(寧越君)에 있다.
正德丙子。정덕(正德) 병자년(1516, 중종 11)에
中廟始遣承旨申鏛祭之。중종이 처음으로 승지 신상(申鏛)을 보내서 제사를 지냈는데
其後久廢不行。그 뒤 오랫동안 폐하고 지내지 않았다.
至萬曆丙子。그러다가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 9)에 이르러
宣廟遣獻官行護軍柳塤祭之。선조가 헌관으로 행호군(行護軍) 유훈(柳塤)을 보내서 제사를 지내고,
辛巳夏因觀察使鄭澈狀啓。신사년(1581, 선조 14) 여름엔 관찰사 정철(鄭澈)의 장계로 인하여
命封墓立石如王子墓例。묘를 봉축하고 비석 세우기를 왕자의 묘에 하는 예와 같이 하고,
事完日。공사가 끝나던 날,
遣承旨李海壽祭之。승지 이해수(李海壽)를 보내서 제사를 지냈다.
量除近邑貢物以充祭需。그리고 가까운 고을에서 받아들이는 공물을 제수에 쓸 만큼 알맞게 공제해서
每歲寒食致祀。매년 한식날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其後金參判玏出守本郡。그후 참판 김늑(金玏)이 영월 군수로 부임하여
請觀察使鄭崑壽。관찰사 정곤수(鄭崑壽)에게 청하여
建墓下齋室祭廚無不畢具。묘 아래에 재실(齋室)ㆍ제주(祭廚)를 건립하는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於是歲時享祀觀瞻起敬。그리하여 세시(歲時)로 제사를 올리니 여러 사람들이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非復曩時之埋沒矣。지난날 매몰되었을 때와는 달랐다.
先是本郡守宰多暴死。이에 앞서, 영월 군수 중에 폭사(暴死)한 자가 많았으므로,
世傳爲凶地。세상에 전하기를, ‘흉한 지방’이라고 하였다.
蓋自魯山終後。대개 노산군이 작고한 뒤에
祀祭不行。제사를 지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樵牧無禁。나무하고 소치는 것도 금하지 않았더니,
興妖作怪有不忍言者。요괴(妖怪)한 일이 차마 말할 수 없게 일어났었다.
朴判書忠元起廢除郡守。판서 박충원(朴忠元)이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 영월군수에 제수되었는데,
上官日。그는 부임하는 날
精備祭物。깨끗하게 제물을 차려 놓고
操文以祭。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文曰。그 제문에 이르기를,
왕실의 맏아들로 나이 어린 임금이셨는데 / 王室之冑幼沖之辟
때마침 비운을 만나서 궁벽한 고을로 피해 오셨네 / 適丁否運遜于僻邑
한 조각 푸른 산에 만고의 외로운 혼이시여 / 一片靑山萬古孤魂
바라오니 강림하시어 제향을 흠향하옵소서 / 庶幾降臨式歆苾芬
하였다.
其後妖怪之事遂熄。그 후로는 요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동야승(大東野乘) 유천차기(柳川箚記) 한준겸(韓浚謙)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