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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일 : 2024년 6월 22일
27번째 성지순례는 1.배론 성지 → 2.성 남종삼.순교자 남상교 유택(묘재.학산공소) 성지 → 3.용소막 성당 입니다.
"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정원 "
배론 성지
[원주교구]
심산유곡(深山幽谷), 계곡이 깊어 배 밑바닥 같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린다.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백운산(해발 1,087m)과 구학산(해발 985m) 연봉 사이로 십여 리를 들어간 곳에는 계곡만큼이나 깊은 신앙의 터가 펼쳐져 있다.
16.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 성당 - 소성당
16.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 성당
한국의 카타콤바라 할 만큼 풍성한 신앙의 유산을 지닌 배론 성지는 우선 그 경관이 수려하다. 배론 입구에 있는, 경치 좋기로 유명한 탁사정(濯斯亭)은 제천시가 자랑하는 절경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수려한 자연도 배론이 안고 있는 신앙의 유산에 견준다면 그 빛을 잃는다.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는 명주 자락에 1만 3천 3백 84자로 울분과 신심을 기록한 ‘황사영 백서’가 쓰였고, 바로 옆의 초가에서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섰으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이곳 배론에 묻혀 있다.
한 가지만으로도 가히 현양의 가치가 충분한 신앙 유산들이 몰려 있는 배론 성지야말로 최적의 순례지로 추천할 만하다. 더욱이 사통팔달(四通八達)로 편리한 교통과 피정 센터를 비롯한 편의 시설들은 순례를 위해 ‘엄숙한 마음가짐’ 외에는 다른 준비물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16.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 성당 - 대성당
억수 같이 내리는 올해 첫 장마비, 간신히 11시 미사전에 도착하여 소성당에서 미사부터 드리고 대성당 둘러보기 후, 성지순례를 나선다.
양업교에서 부터 성지순례 시작합니다. 보이는 왼쪽이 성물방/성지사무실, 오른쪽이 화장실.
성지순례 확인도장 꾹~~
01. 마음을 비추는 연못 "예수성심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무명순교자의 묘로 가는 길. 성 요셉성당이 보인다.
02. 무명 순교자의 묘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03. 성요셉 성당(한옥으로 지어진 누각 성당)
왼쪽이 순교자의 집. 진복문으로 이동...
04. 진복문
주님과 함께 순교자들의 손을 잡고 220여년 전 그분들이 사셨던 삶의 공간으로 들어 갑니다.
05.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헌양탑
별빛 반짝이는 밤 하늘 두 손들어 하느님을 찬미하는 순교자와 함께 찬미의 기도를 드립니다.
06. 옹기가마 굴
07. 황사영 백서 토굴(1801.02~1801.09, 백서를 쓰시던 토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8개월 동안 배론마을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 속에 머물며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명주천에 가로 62cm, 세로 40cm 이며, 세필로 쓴 글자 수는 122행, 13,384자 이다.
사람의 눈을 피해 신앙을 지켜 가던 옹기 마을에 최초로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창원(昌原)이 본관인 남인(南人) 명문 출신의 황사영(黃嗣永)은 나이 16세에 장원급제,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조할 만큼 앞길이 창창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 듣고는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택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과 동시에 서울을 빠져나와 배론으로 숨어들었다.
그해 8월 복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그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비단 위에 빼곡히 적었다. 황사영은 백서(帛書) 안에 사진의 체험과 신자들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박해의 과정과 순교자들의 열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을 담았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히고, 황사영 또한 체포되어 대역무도 죄인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능지처참의 극형을 당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그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십수 명이 공범으로 처형되었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경 의금부의 옛 문서들을 파기 ·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뮈텔 주교는 1925년 7월 5일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게 봉정했다. 현재 백서 원본은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 민속 박물관에 소장 · 전시되어 있고, 실물 크기의 동판과 필사본은 절두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08. 황사영관(세라믹 공예 성인화 상설 전시실,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문 닫힘)
09. 성 요셉 신학당
배론 성지의 두 번째 신앙 유산은 1855년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이다. 깊은 산골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1803-1866년)의 집에 세워진 신학당에는 학생 열 명에 신부 두 명이 있었다. 그로부터 11년 후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배론에서도 집주인이었던 장주기와 두 선교사 신부가 잡혀가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그리고 목자 잃은 양 떼처럼 신학당 역시 폐쇄되고 말았다. 배론 신학당은 1978년 복원된 후 2001년 3월 2일 배론 성지 일대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된 후 2003년 재복원되었다.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년)
푸르티에(Jean Antoine Pourthie) 신부(1830-1866년)
순교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명 신요안(申妖案).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 교구의 ‘발랑스 앙 알비즈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貴州)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와 함께 상해(上海)를 거쳐 해로(海路)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배론[舟論]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張周基, 요셉)와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프티니콜라(Michel Alexandre Petitnicolas) 신부(1828-1866년)
순교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성(韓國姓)은 박(朴). 1828년 8월 21일 프랑스 생 디에(Saint Die) 교구의 코앵시(Coinches)에서 출생. 샤텔 쉬르 모젤의 소신학교를 거쳐 생 디에 교구의 대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850년 1월 20일, 차부제(次副祭)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으나 그해 10월 병 때문에 외방전교회를 나와 1852년 생 디에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라블린 본당 보좌신부로 1년 동안 사목하였다. 그러나 1853년 6월 다시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인도, 홍콩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1856년 3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푸르티에(Pourtie, 申)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 충청도지방에서 사목하였고 1862년부터는 배론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어 이 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한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
성 장주기 요셉(Josephus)은 경기도 수원 땅의 어느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배워 23세에 영세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하였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거듭된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해주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1845년경에 그는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를 이기지 못해 제천 땅 배론 골짜기로 옮겨가 살았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자 그는 자기 집을 신학교로 서슴지 않고 제공하였으며, 앞장서서 신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였고, 신학교 관리직까지 맡아보았다. 장 요셉과 부인은 합심하여 농사를 지어 신학교에 바쳤고, 자신들은 청빈과 봉사로써 11년간이나 신학교 실림을 잘 이끌어 갔다.
1866년 3월 1일 갑자기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장 회장의 공을 잘 알고 있는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신부가 관헌하게 돈을 주며 그를 석방시켜 달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는 울면서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 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이 그를 덮쳐서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제천 관장은 장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도 않은 채 짚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하였는데 지나가는 길목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6년 3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 날을 기다렸다. 그때 나라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달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 3월 30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가경자 최양업 신부님 묘소로 오르는 길
10. 십자가의 길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셨던 순교자들의 마음을 느끼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 봅니다.
12. 최양업 토마스 신부 묘(1861년 11월 ~ 현재)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긴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조선 천주교회를 도와주십사고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은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저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덮쳐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13. 성모 동굴
성지사무실 여기 순례도장 있습니다.
다시 양업교를 건너고...
17. 인생미로
14. 로사리오(묵주기도) 길
은총의 성모마리아 기도 학교
성모자 상
폭우속에 산길의 로사리오 길은 포기 하고 성모님을 다시 만나러 옵니다.
15. 최양업 토마스 신부 조각공원
11시 미사 드리고 성지순례길 따라 걸으며 십자가의 길 기도 까지 벌써 오후2시 넘겼다.
성지 오던길에 있던 식당에 들러 늦점(점심)을 합니다.
비는 이렇게 많이 내렸습니다. 위의 사진들은 최대한 비가 가리지않게 찍은 겁니다. 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성지에 저희를 인도하심에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