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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壽衣)
상례喪禮를 치를 때 시신에게 입히는 옷과 부속품[殮襲具]을 가리키나, 좁은 의미로는 시신에게 입히는 옷.
내용
수의는 장례를 치를 때, 입관의 절차 가운데 시신에 입히는 옷을 의미하기도 하고, 시신을 싸는 여러 가지 도구(염습구殮襲具)를 포함하기도 한다.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인 상례에는 여러 절차가 있다. 죽음이 임박하면 초혼하고 시신을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는 습襲, 2일째가 되면 시신을 옷과 이불 등으로 싸는 소렴小殮, 3일째가 되면 다시 옷과 이불로 시신 싸서 입관하는 대렴大斂을 하면서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장례를 할 준비가 끝난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옷은 다시 습의襲衣, 염의殮衣, 보공의補空衣로 나눈다. 습의는 시신에게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습에 사용되는 복식을 일컫는다. 염의는 소렴과 대렴의 과정에서 시신을 감싸는 옷을 말하고, 보공의는 대렴 후에 관의 빈 공간을 채우는 옷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수의壽衣는 시신에게 갈아입히는 새 옷 즉 습의襲衣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로 습의와 염의 그리고 보공의와 습이나 입관 때 사용하는 여러 부속물인 염습구를 포함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수의襚衣’ 또는 ‘수의壽衣’로 표현된다. 수의襚衣는 초상이 났을 때 친구나 가족 또는 왕이 부의賻儀로 보내는 옷을 뜻하기도 한다. 수의(습의)는 망자의 옷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염의는 부의를 사용하기도 한다. 1584년(선조 17)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율곡 이이李珥의 졸기卒記에 “초상이 났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친구들이 수의襚衣와 부의賻儀를 보내어 상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외에도 왕이 신하에게 수의를 보낸 기록도 있다. 수의壽衣의 기록은 1776년(영조 52) 『영조실록英祖實錄』에 영조가 승하하였을 때 “수의대壽衣襨를 장만하여 둔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대내에서 장만하여 둔지 오래 되었다. 문단도 있는데 이미 문단을 금지하였으니, 습렴하는 제구에 쓸 수 없으므로 고쳐 만들어야 할 것이다.”라는 것이 있다. 궁중에서는 수의대라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의대衣襨는 옷을 가리키는 궁중용어이다. 20세기 이후에는 수의壽衣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인다.
수의는 시신을 옷으로 가리고 감쌈으로써 시신이 관 속에서 뒤틀리지 않고 곧게 유지될 수 있게 한다. 수의는 바람이 들어가 시신이 붓는 일이 없도록 공기의 유입을 막는 역할을 한다. 장례기간 동안 시신을 부패에 의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감싼다.
조선시대 수의는 평상시 입던 옷 또는 생시의 예복에 해당하는 옷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시대별로 유행하는 옷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수의에 사용하는 옷의 종류와 명칭 그리고 형태는 달라졌다. 평상시에 입던 가장 좋은 옷을 수의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수의의 옷감은 주로 명주나 비단 종류가 사용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영조의 수의대의 경우에는 영조가 평상시에도 무늬 있는 비단사용을 금하였기 때문에, 곤룡포만 무늬 있는 비단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영조의 뜻에 따라 무늬 없는 옷감을 사용하라는 지시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출토복식을 수습하면, 낡은 옷이나 때 묻은 옷이 수습되는 데 이를 통해 평상시에 입던 옷을 수의로 사용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숙종실록』 권40 기록을 보면 1704년(숙종 30) 기록에 ‘백세의금百歲衣衾’이라고 하여 수의를 미리 만들어 놓으면 장수한다는 풍속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의의 크기 또한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18세기 후기 까지는 평상시 입던 옷을 수의로 사용하였으나, 1790년대를 즈음하여 수의의 크기가 매우 커졌다. 충북대학교박물관 소장 전주 이씨(여, 1722~1792) 수의와 경기도박물관 소장 이연응(남, 1818~1879)의 수의가 그 예이다. 이를 통해 18세기 후반부터 남녀 수의를 매우 넉넉하게 큰 치수로 새로 장만하는 풍습이 생긴 것을 알 수 있다. 수의가 큰 치수의 옷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옷감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여전히 대부분 비단으로 만들었다. 이는 평상시에 입던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수의로 사용했던 것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안동 김씨 가문의 김수근金洙根(1789~ 1854), 김병국金炳國(1825~1904), 한산 이씨(김정규金 貞圭의 처, 1915)의 상례기록 ‘신종록愼終錄’ 에는 수의로 사용된 옷의 명칭과 옷감의 종류, 색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 신종록에 따르면 수의 가운데 속옷에 해당하는 것은 흰색 옷감을 사용했고, 겉옷은 다양한 색상의 옷감이 사용되었다.
수의를 구성하는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거나 가리는 것은 생시와 마찬가지이다. 남녀 모두 머리를 단정하게하기 위하여, 모자를 사용하고, 속옷부터 겉옷까지 갖추어 입는다. 버선과 신도 신긴다. 딱딱한 소재와 형태는 관에 안치했을 때, 시신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가假를 만들어 사용한다. 예를 들어 남자의 관모의 종류인 사모紗帽는 가늘게 대나무를 결어 만들어 그 위에 비단을 발라 만들고, 망건網巾은 말총으로 만든다. 그러나 수의용 사모나 망건은 검은색 비단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허리띠[角帶]와 신발 역시 비단으로 만들고 그림으로 장식한다.
수의를 구성하는 옷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유행이 있었기 때문에, 옷의 형태나 종류 그리고 명칭이 변화되었다는 것은 위에서도 언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수의로 사용된 출토복식을 통해 조선시대의 유행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5)』 대부사서인상大夫士庶人喪에 기록된 남자의 수의는 다음과 같다. 망건網巾, 복건幅巾, 흑단령黑團領, 대대大帶, 한삼汗衫, 철릭帖裏, 고袴, 말襪, 리履, 충이充耳, 명목幎目, 악수幄手이다. 조선 후기 의례서인 『사례편람四禮便覽(1746)』에 기록된 남자 수의는 망건網巾, 복건幅巾, 심의深衣, 답호褡𧞤, 대대大帶, 조絛, 한삼汗衫, 포오袍襖:中赤莫, 단고單袴, 고袴, 소대小帶:腰帶, 말襪, 리履, 늑백勒帛, 충이充耳, 명목瞑目, 악수幄手, 과두裹肚이다. 일제강점기의 『사례의절四禮儀節(1942년)』의 남자 수의는 대대, 심의, 중치막中赤莫, 포오袍襖 속칭 冬衣, 단삼單衫, 고袴, 말襪, 단임端袵, 늑백勒帛 속칭 行纏, 망건網巾, 복건幅巾, 리履, 조대絛帶, 과두裹肚, 충이充耳, 명목瞑目, 악수幄手, 명건瞑巾, 설면雪綿이다. 『국조오례의』에는 여자의 수의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례편람』의 여자수의는 엄掩, 리纚, 심의深衣 혹 연의緣衣 혹 원삼圓衫 혹 장오자長襖子 속칭 長衣, 대帶, 삼자衫子, 포오袍襖赤古里三稱, 소삼小衫, 과두裹肚 속칭 腰帶, 상裳, 고袴, 단고單袴, 채혜彩鞋, 충이充耳, 명목瞑目, 악수幄手, 말襪, 모冒이다. 일제강점기의 『사례의절四禮儀節(1942)』에는 여자 수의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대대大帶, 원삼圓衫, 저고리 삼칭赤古里 三稱, 단삼單衫, 광고廣袴, 단고單袴, 홍상紅裳, 청상靑裳, 말襪, 여모女帽, 채혜彩鞋, 과두裹肚 속칭 腰帶, 충이充耳, 명목瞑目, 악수幄手, 명건瞑巾, 설면雪綿이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수의는 평상시와 같은 속옷과 겉옷을 사용했다. 제일 겉에 입는 옷은 망자의 가장 큰 예복을 사용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시신에 실제 입히는 옷인 수의와 달리, 염습을 할 때 시신을 감싸거나 빈 공간을 채우는데 사용되는 여러 가지를 염습구殮襲具라고 한다. 염습구에는 충이充耳, 멱목幎目, 악수幄手, 습襲신, 오낭五囊, 천금天衾, 지요[地褥], 소렴금小殮衾, 대렴금大殮衾, 염포殮布가 있다. 충이는 시신의 귀를 막는 것으로, 햇솜으로 대추씨 모양으로 단단히 말아 만든다. 멱목은 시신의 얼굴을 덮는 것으로 사각형 모양의 네 귀퉁이에 끈이 있어 시신의 머리 뒤(뒷통수)에서 묶는다. 조선시대에는 겉감은 검정색, 안감은 붉은색 천을 사용했다. 악수는 시신의 손을 싸는 것이다. 악수의 모양은 가문마다 다양하게 만들어서 사용했다. 악수는 가로가 긴 직사각형에서 중심부가 양쪽으로 파인 형이 대부분이나, 때로는 직사각형도 있다. 네 귀퉁이에는 긴 끈이 달려 있다. 조선시대에는 멱목과 마찬가지로 겉감은 검정, 안감은 붉은색을 사용하였다. 악수를 이용하여 손을 감싸는 법도 가문마다 다양했다. 습신은 시신에게 신기는 신이다. 오낭은 다섯 개의 주머니라는 뜻으로, 시신을 목욕할 때 떨어지는 머리카락, 치아, 손톱과 발톱 등을 구분하여 넣는다. 조선시대 무덤에서는 살았을 때 모아 놓은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으로 채워진 오낭이 수습되기도 한다. 천금은 시신을 관에 넣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덮는 이불이다. 지요는 시신을 관에 넣기 전에 관 바닥에 까는 얇은 요이다. 조선시대에는 천금과 지요와 명목이나 악수처럼 겉감은 검정, 안감은 붉은색 옷감으로 만들었으며 형태는 대부분 직사각형으로 만드나, 때로는 관의 모양처럼 사다리꼴로 만들기도 한다. 소렴금과 대렴금은 소렴과 대렴을 할 때 시신을 싸는 이불이다. 조선시대 상례에서는 평상시에 사용하는 이불을 소렴금과 대렴금으로 사용하였으므로 솜이불이 대부분이다. 이불의 형태는 이불동, 이불깃, 동정을 갖춘 모양이다. 임진왜란 전후인 16세기에는 소렴금을 얇은 모시나 삼베로 사용하거나, 겹이나 솜이불로 소렴금을 사용하면서 얇은 모시나 삼베 홑이불을 하나 더 사용하기도 했다. 염포는 소렴과 대렴을 할 때, 시신을 가로와 세로로 묶는 천이다. 명주나 모시 또는 삼베로 만들며, 가운데는 그대로 두고 위아래를 길이로 세 갈래로 찢어서 사용한다. 가로를 묶는 것은 횡교橫絞, 세로를 묶는 것은 종교縱絞라고 한다. 현대 경기도 지방에서는 염포는 ‘매’라고 하기도 하여, 횡교는 가로매 종교는 세로매라고도 한다. 염포를 ‘멧베’라고도 한다. 2014년 현재 장례 관련 업체에서는 염포를 ‘장매’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 염습구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색상이 있는 옷감을 사용했지만, 현대에는 수의도 소색의 삼베를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염습구도 수의의 옷감에 따라 소색의 삼베를 사용한다.
2001년 사단법인 예지원과 한국출토복식연구회에서 ‘바람직한 상례절차와 수의문화의 정립을 중심으로’라는 주제 아래 여러 가지 소재의 수의를 제시하였다. 공단, 명주, 무명, 운문사, 삼베, 모시 등으로 형편에 맞는 수의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옷감에는 염색을 하여 색상이 있었다. 공단수의의 예를 보면 남자는 심의, 복건, 중치막, 창의, 바지, 저고리의 구성이며, 여자는 원삼, 당의, 저고리 세 벌, 적삼과 치마이다. 남녀 공용의 염습구는 겹이불, 천금, 지요, 베개, 멱목, 악수, 오낭, 버선, 습신, 소모자이다.
2017년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수의는 삼베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며, 남자는 도포, 두루마기, 저고리, 겹바지, 속저고리, 속바지이다. 여자용 수의는 삼베로 만든 홑원삼, 겹저고리, 치마, 속저고리, 속바지이다. 남녀 공용의 염습구로 삼베로 만든 홑 천금, 지요, 장메(긴 줄), 악수, 면포, 베개, 버선, 오낭이 있다.
2017년 현재 장례업체에서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표준수의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남자수의는 두루마기, 도포, 속바지, 겉바지, 저고리, 속저고리이며 여자 수의는 원삼, 속바지, 저고리, 속저고리, 속치마, 치마이다. 남녀 공용의 용품으로 천금, 지금(요), 장매(염포), 모자, 버선, 악수, 오낭, 베개, 허리끈 등이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수의를 미리 준비하는 풍습은 조선시대부터 있어 왔던 것 같다. 20세기 들어서는 윤년과 윤달에 수의를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1년 경기도박물관에서 조사한 『경기민속지』에는 “수의는 보통 윤달이 든 해에 미리 만들어 두기도 하지만, 돌아가시면 바로 베를 사다가 마을 아주머니들이 상가집 마당에서 짓는데, 염하기 전까지 모두 마친다. 수의나 상복을 만들 때는 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장의사를 통해 구입해 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수의는 “자식이 하는 것이며 윤달 든 해에 만들어야 탈이 없는데 망자亡者의 것은 하루에 마쳐야 탈이 없고 다 만들면 돌아가실 이가 입어 본다고 하며, 바느질 할 때는 온박음이나 뒷바느질, 매듭을 지어도 안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본인이나 자식이 화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옷 위로 넘어 다녀도 안 되고, 매듭을 지어서도 안 된다.” 이처럼 수의를 만들 때 지켜야 하는 금기사항은 자식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1925년 발간된 『조선재봉전서朝鮮裁縫全書』에서는 중류 사회에서 보통으로 하는 수의를 표준으로 삼아 제시했다. 복건幅巾과 과두 망건網巾은 공단이고, 지요地褥과 베개는 자주와 흑색의 공릉貢綾이며, 그 외 옷들은 세포細布, 고운 삼베를 사용했으며, 색상은 백색과 분홍, 옥색, 남색을 썼다고 설명했다. 수의의 색은, 청은 청듸물, 홍은 잇다홍, 황은 회나무 열매, 자주는 짓치, 분홍은 여지로 물들이기가 원칙이나, 염색이 불편하므로 소색素色의 재료로 많이 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1920년대까지 수의는 염색을 한 색이 있는 옷이었지만, 1920년대 이후부터 색상도 없어지는 소색 삼베 수의가 일제강점기부터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989년과 2001년 조사에서 보면 지방별로 수의를 만드는 옷감은 명주와 삼베 등 다양하며, 2000년대 초까지는 명주가 더 많이 사용된 것 같다. 2017년 현재 수의는 삼베로 만드는 것으로 대부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접어들면서 화장火葬이 일반화되고 수의도 더욱 간략하게 변화하고 수의의 소재도 한지나 펄프로 만든 것도 등장한다.
특징 및 의의
수의는 시대를 불문하고 돌아가신 분에게 드리는 마지막 옷이다. 수의의 종류와 형태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조선시대에는 평상용 옷으로 사용하다가, 18세기 후반에 가면 큰 옷으로 따로 장만하여 수의로 사용하는 풍습이 생겼다. 이때도 윤달에 수의를 준비하였다. 수의에 많이 사용된 옷감은 대부분 명주나 비단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삼베로 변화한 경향이 있다. 21세기에는 장례문화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뀌는 추세로, 수의의 형태는 한복이며 옷감은 삼베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수의를 시신에게 입힐 때는 저고리나 포의 깃 부분 또는 바지허리나 치마허리를 한꺼번에 꿰매어 놓아 입히기 편하게 한다. 조선시대 출토복식의 경우에는 속옷은 3~5벌을 한허리에 꿰매어 놓은 경우가 종종 있다. 옷을 입히는 방식도 시대와 가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좌임불뉴左衽不紐의 해석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예서에서 수의(염습의)의 여밈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있어왔다. ‘좌임불뉴’에 따라 시신에 입히는 수의의 여밈이나 깃을 생시와 다르게 왼쪽 여밈(좌임)을 하기도 한다. 국가지정문화재 제89호 고故 정정완은 좌임불뉴를 겉깃을 왼쪽으로 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수의를 지었다. 조선시대 출토복식의 보고서에는 습의의 경우에는 우임이지만 소렴과 대렴의 경우에는 왼쪽으로 여미는 것으로 ‘좌임불뉴’를 해석하여 상례를 치른 경우도 보고된다. 이외도 옷고름을 떼어낸 수의와 염습의의 경우 등 다양한 상례 풍습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경기민속지-일생의례(경기도박물관, 2002), 상장례-삶과 죽음의 방정식(국사편찬위원회, 두산동아, 2005), 염습의에 관한 연구(송미경, 서울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 전통수의에 관한 연구(김진아,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조선재봉전서(김숙당, 활문사, 1925),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의생활(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6), 한국일생의례사전(국립민속박물관, 2014), 한국의 수의문화(박성실·정종수·이은주 외, 신유,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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