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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과 봉우리를 나란히 하며 한국문학을 대표해온 대하역사소설이
김주영의 ‘객주’다. 객주는 ‘천봉삼’이란 보부상이 표면상 주인공이긴 하나 길바닥을 떠도는 모든 민초들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의 근력과 근성”이라는 확고한 사관에 기초하여 집필된
작품이 ‘객주’이다. 근대사에서 피지배자인 백성의 고단한 삶과 애환을 샅샅이 다룬 소설은 그 이전에 없었다. 이 작품이
지금껏 널리 읽히는 이유는 ‘약자 편에 선’ 작가의 소신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취재를 위한 엄청난 발품으로 노트 11권 분
량의 우리말을 채집하여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족 고유의 ‘입말’이 복구되어 ‘고유 언어의 보
물창고’ 구실을 한 대목도 이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의 하나다. 또한 객주를 읽으면 근대 상업자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를 훤히 알 수 있으며, 보부상들의 삶을 통해 150여 년 전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점은 이 소설의 가장 진한 매
력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1984년 일단 9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지만 완전한 종결은 아니었다. 9권 말미에 천봉삼을 살려둔 것이 불씨가 되
어 30년 뒤인 지난해 ‘객주’10권 완결판이 나옴으로써 집필을 시작한 지 34년 만에 비로소 대단원이 마무리되었다.
◆ 지독한 가난과 결핍의 땅 청송 진보
김주영은 우리 시대의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화술과 언술은 듣고 읽는 사람을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이게 한다.
그는 가난한 시절을 겪으면서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객지를 떠돌며 살아온 자신의 이력으로 밑바닥 사람들의 얘기밖에
쓸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소설을 쓰게 한 원동력은 가난과 결핍, 보잘것없는 이력,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전해진 아
픔들”이라고 정의한다. 그에게는 결핍을 극복해가는 의지가 몸에 배어 있었고 그의 몸 세포에는 질긴 생명력이 늘 꿈틀
거렸다. 김주영 문학의 그 가난과 결핍의 뿌리를 거슬러 가보면 청송의 진보라는 마을에 닿는다. 진보는 그의 소설의 토
대이자 토양이었다. 그에게 가난한 시골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갑갑한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단연 집
근처에서 오일마다 서는 장날이었다. 장날만 되면 하도 궁금한 게 많아서 배가 아프다고 둘러대고서 결석을 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나중엔 장이 서는 날이면 진짜 배가 아팠다고 한다. 장날만 되면 낯선 사람, 낯선 물건, 온갖 사투리, 쌈박질,
작부, 사기꾼까지 두루 구경하며 장거리를 배회하는 재미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 낯선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보고 듣는 습관이 어릴 적부터 몸에 배었다. 거기서 기른 바깥세계에 대한 호기심
과 상상력이 훗날 ‘객주’를 쓰게 한 밑천이었음은 물론이다. 장날 말고도 학교를 파하면 버스정류장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떠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바깥세상으로 탈출하려는 강력한 동기부여를 받았던 것이다. 김주영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완전히 외톨이였다. 외롭게 사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글 쓰는 일밖에 없었다. 교과서를 베끼기
도 하고, 뭔지 모르면서 계속 끼적거렸던 것이다.
1939년생인 김주영은 진보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대구농고 축산과에 진학하면서 처음 대처 땅을 밟았다. 졸업 후 친지의
도움으로 상경하여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다니게 된다. 그 또한 공부를 핑계 삼은 ‘탈출’이었다. 대학 1학년 때 다른 학
생들처럼 시 열 편을 써들고 박목월 시인을 찾아가 ‘읽어봐 달라’고 내민 일이 있다. 보름이 지나도록 반응이 없다가 나중
에야 겨우 들은 이야기가 “그런데 말이야, 자네는 운문에 소질이 없는 거 같아” 이 한 마디에 김주영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런 뒤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 바로 자원입대해 버린다. 제대 후 안동의 전매청 엽연초조합에서 10년 동
안 경리일을 하며 지겨움과 권태를 술로 견뎌내야만 했었다. 생활에 어떤 변혁을 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설습작을 시작
했고 1971년 서른셋의 나이에 ‘휴면기’란 작품으로 등단하기에 이른다. 가끔 고향사람들로부터 ‘주영이 너는 깡패가 됐어야
맞는데, 어떻게 글을 쓰는지 몰라’ 하는 말을 듣곤 했다.
◆ 객주문학관 개관을 앞두고
작가 김주영은 다시 태어나도 글을 쓸 것이라고 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죽는 날까지 손에서 글 쓰는 것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는 데에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있다. 다만 술이 좀 심한 편이라 그것만 좀 자제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잘 안 된다고 한다. 그 외에는 다른 걱정은 없단다. 앞으로 적어도 네 권 이상의 소설은 쓰리라 마음먹고 있다.
‘객주’와 ‘엄마’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어낸 김주영이 앞으로의 계획인 ‘죽을 때까지 글 쓰는 것’을 실천해 나갈 모습이 사
뭇 기대된다. 이 시대의 거장 김주영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매우 호의적이다. 다들 인정하듯 이야기를 풀어내는 입담은
유장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걸쭉한 입담과 해박한 풍물묘사’가 돋보이는 장편 역사소설에서부터, ‘빛나는 감수성’과 ‘경
쾌한 속도감’ ‘재치의 반전’ 등이 소설 읽는 재미를 더해주는 중단편들에 이르기까지 김주영의 문학적 폭은 아주 넓다.
특히 ‘객주’를 완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 김주영의 치열할 작가정신이라 하겠다. 소설가 이문구는 소설을 쓰기
위해 깨알같이 메모해둔 노트를 보고 ‘이것은 그의 피다. 피 흘리는 김주영의 모세혈관’이라고 했다. 작가의 치열함과
치밀함을 함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객주 완간에 때맞추어 국민적 관심이 다시금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작가의 고향인 경북 청송에는 2015년 완공을 목표로
7천500평 규모의 ‘객주 문학마을’이 조성중이고 ‘객주’ 관련 자료가 전시될 ‘객주 문학관’은 지난 3월 준공되어 오는 6월10
일 정식 개관을 앞두고 있다.
폐교된 진보제일고 건물을 리모델링한 객주문학관은 연면적 4천640㎡(대지 24,771㎡)의 3층짜리 건물로 총 사업비 73억원
을 투입하였다. 김주영 작가의 문학 네트워크를 확대할 수 있는 전시체험시설로 조성되었고 저술, 전시, 교육, 체험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객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객주전시관을 비롯하여 작가실, 기획전시실, 소설도서관, 체험숙박실, 카페, 창작관 등을
두루 갖추었다. 또 김주영 작가의 업무공간도 마련되어 있는데 한 달에 열흘은 내려와 머물면서 고향 사람들과 어울리고
문학관 운영과 문학마을 조성에 ‘훈수’를 둔다고 들었다. 그리고 작가의 옛집이 있는 진보시장 인근에 옛 장터가 재현되며,
신기동 느티나무를 기점으로 고현지까지 15.6㎞ 거리의 ‘김주영 객주길’도 닦아놓았다. 문학적 역사적 의미가 확장되어 청
송군의 대표적 문화 브랜드가 되리라 전망된다. 개관을 앞두고 막바지 집기 점검 등으로 분주한 객주문학관은 이미 시설을
개방 운영 중에 있었다. 잘 꾸며진 문학관에는 정말 ‘깨알’사이즈의 글씨로 빼곡한 작가 노트도 보였다. 객주의 시대배경인
조선후기 보부상들의 사발통문, 멍석말이 등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물도 눈에 띄었다.
작가는 저울추를 모으는 이색 취미를 갖고 있는데, 수집된 재래식 저울추도 다량 전시되었다. ‘문학과 여행의 행복한 만남’
이란 새로운 트렌드를 위한 만반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어 경북의 ‘살아있는 문화관광 상품’하나가 새롭게 탄생되리란 예감
이 든다. 효용성 면에서 전남 벌교의 조정래 문학관을 능가하리란 예측도 가능하다. 다만 명실공한 성공을 위해서는 관련
지자체와 언론매체, 출판사와 문학단체 등의 유기적인 협조와 관심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김주영 작가는 단 한 줄의 문장을 위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나서는 ‘길 위의 작가’로서의 삶을 버리지 않을 각오라 했다.
오직 글쓰기만 목숨 걸고 사랑한 이 시대의 대표적 작가와 함께하는 문학테마기행이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겠지만 은근히
땡기고 설렌다.
권순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