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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뿌리를 찾아서 스크랩 발해사 [11]: 1대 고왕 - 10대 선왕
주임교수 추천 2 조회 33 15.06.10 07: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자료출처 : 박현배의 발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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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제1대왕(재위 699~719)
본명: 대조영(大祚榮)

 

고구려 유민이었다.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정책에 따라 요하(遼河) 서쪽 영주(營州) 지방으로 그의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696년 손 만영(孫萬榮), 이진충(李盡忠) 등이 이끈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 지역에 억류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자립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이 집단을 회유하여 당나라에 복속시키고자 하였으나 이를 거부해오자 성력연간에 추격군을 파견하여 공격하였다. 이에 말갈족 집단이 걸사비우가 먼저 교전을 하였으나 대패하고, 대조영은 대패하고 흩어져 있는 걸사비우 예하의 말갈족을 규합하여 장령자 부근에 있는 천문령에서 당나라 군사와 싸워 격파 한 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더욱 규합하여 국가건설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고, 계속 동부만 쪽으로 이동하여

 

699년 동모산(東某山)에 성을 쌓은 후 도읍으로 정하여 나라를 세운 후 국호는 진(震),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이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귀속하여 들어왔으며, 그 가운데 중추세력은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건국 후에는 돌궐, 신라와 통교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그에게 유화정책을 썼는데, 중종(中宗) 때 정식으로 통교하였다.

 

713년 당나라 현종(玄宗)에 의해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발해군왕 홀한주도독로 책봉되었고, 그 때부터 발해를 국호로 사용하였다.

 

719년 대조영이 죽고, 그의 아들 무왕(대무예)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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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渤海)의 제2대 왕(재위 719∼737)
본명 : 대무예(大武藝)
연호 : 인안(仁安)

 

719년 대조영의 아들로서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였다. 무왕은 일본과 수교(修交)하여 문물교환과 사신왕래를 빈번히 하였다

 

726년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있던 아우 문예(門藝)를 총지휘관으로 하여 흑수말갈(黑水靺鞨)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문예는 원정을 중지할 것을 제의하자 격분한 무왕은 문예를 파면시키고 사촌형 대일하를 원정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여 파견한 다음 문예를 죽여버리라 하자 이에 겁을 먹은 아우 문예는 나라를 배반하고 당나라로 도망치고 말았다.

 

732년 가을에 거란인들이 발해에 사신을 보내 함께 당나라의 등주(登州  - 지금의 산동성)를 공격할 것을 제의하자 이를 받아 들여, 그해 9월 대장 장문휴에게 당나라 공격을 명하여 그는 등주를 공격하였다.

 

737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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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제3대 왕 (재위 737∼793)
본명 : 대흠무(大欽茂)
연호: 보력(寶曆) / 대흥(大興)

 

737년 그는 그의 아버지 무왕과는 달리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평화외교정책을 고수하였다.

그 일환으로 당나라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여 화평과 관무역의 이득을 꾀하는 동시에 동해의 해로를 통하여 일본에도 자주 사신을 보내어 상리(商利) 를 올리는데 힘썼다. 그러나 신라와의 교류는 별로 없었다.

 

755년 수도를 중경현덕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천도

 

774년 보력(寶曆)으로 개원하여 7년 이상 사용하다가 다시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하였다.

 

793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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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제4대 왕(재위 793∼794)
본명 : 대원의(大元義)


793년  대조영의 종손(從孫)이며 문왕의 친척동생이다.
문 왕의 태자(太子) 굉림(宏臨 )이 일찍 죽자 그의 아들 대화여(大華與)가 왕위에 올랐어야 하나, 그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대원의가 대신 왕위에 올랐다. 때문에 왕위계승의 정통성 문제로 반발이 거세었다. 또한 대원의는 성격이 포악하였고, 시기심 역시 많은 편이어서 왕위에 오른지 1년도 되지 않아 살해되었다.

 

793년 / 794년  굉림(宏林 )의 아들인 대화여가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제5대 ∥ 성왕(成王 ? ~ 795)

 


발해의 제5대 왕(재위 794∼795)

휘(諱) : 대화여(大華與)

연호 : 중흥(中興)


794년 폐왕 대원의(大元義)가 포악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폐하고, 성왕을 옹립하였다.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치고, 수도를 이전 도읍지였던 상경(上京)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제6대 ∥ 강왕(康王 ? ~ 809)

 


발해의 제6대 왕(재위 795∼809)

본명 : 대숭린(大崇璘)

연호 : 정력(正曆)


795년 성왕(成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연호는 정력(正曆)으로 하였으며, 그는 당·일본 등과 문물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였으며, 결과 외교사절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제7대 ∥ 정왕 (定王 ? ~ 812)

 


발해의 제7대 왕(재위 809∼812)

휘(諱) : 대원유(大元瑜)

연호 : 영덕(永德)

 

 

제8대 ∥ 희왕 (僖王 ? ~ 817)

 


발해의 제8대왕(재위 812∼817)

휘(諱) : 대언의(大言義)

연호 : 주작(朱雀)

 


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연호를 주작(朱雀)으로 고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왕으로 책봉받았다.

814년 당나라와 교류하여 문물·제도를 받아들였으며, 당나라에 불상을 보내기도 하였다.

 

 

 

제9대 ∥ 간왕(簡王/ ? ~ 818)

 


발해 제9대 왕(재위 817∼818)

휘(諱) : 대명충(大明忠).

연호 : 태시(太始)

 

818년 즉위한 다음해에 죽었기 때문에 정치·행정·외교면의 행적은 별로 없다.

 

 

제10대 ∥ 선왕(宣王 ? ~ 830)

 


발해의 제10대 왕(재위 818∼830)

휘(諱) : 대인수(大仁秀)

연호 : 건흥(建興)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渤)의 4세손이다. 고구려와 부여 등의 옛 영토까지 강토로 삼아 발해 중흥의 대업을 이룬 중흥군주(中興君主)로서 이때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행정구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개편하였고, 학술을 진흥시키는 등 발해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일본과의 사신교환도 매우 활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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