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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4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하나님의 슬픔
롬10:16~21
<전화 ‘The Telephone’ Gian Carlo Menotti 작곡 >
지난 주 금요일,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을 하나 보았습니다. 제목은 ‘전화’
줄거리는 아주 간단해요! 남자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청혼을 하러 갑니다.
선물과 꽃다발 들고, 연인의 집을 찾아갔어요.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어요.
“나와 결혼 줘!” 말하려 하는데, “떼르릉!” 전화 벨이 울려요!
수다쟁이 여자는 30분, 1시간, 긴긴 전화 통화를 합니다. 분위기 다 깨졌어요!
다시 분위기를 살립니다! ‘자기 나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그렇다면 나와 결~” 이때 다시 전화벨이 울려요! 받아보니, 잘못 걸려온 전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나와 결~” 아, 이러는데, “떼르릉~” 또 벨이 울려요!
전화기를 붙들고 ‘웃다가 울다가’ 난리를 때려요! ··· 이런 때 어떻게 해야 돼요?
참다못한 남자가 뛰쳐나가버립니다.
‘에이! 포기해 버릴까?’ 하다가 다시 힘을 냈어요! 이번에는 전화를 걸었어요!
“자기 나 사랑해?” “사랑하고말고!” ··· “그럼 나와 결혼해 줄래?” “O.K!”
참, 어려운 것이 ‘내 사랑을 상대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나의 사랑, 깊고, 뜨겁고, 끝이 없다!’ 어떻게 전하고 계세요?
내 사랑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 이 세상에 없어요!
<1. 부모의 슬픔>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 ··· 얼마나 ‘끔찍’합니까?
그런데 자식들이 그걸 알아요, 몰라요? ··· “몰라요!”
이런 말이 있어요, ‘딸은 시집가서 아이를 낳으면 엄마를 이해한다’
아들은요? ··· ‘아들은,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야, 철이 든다. 부모를 이해한다!’
부모의 자식 사랑! ··· 자식에게 전달이 ‘안 돼요!’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온갖 희생을 다 합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부모를 몰라요!
그런 자식들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요, 제 속에서 나왔다고, 사랑을 쏟아 부어요!
참으로 오묘한 이치 아닙니까?
“나는 부모 사랑 몰라!” 그런 사람도 자식에게는, 속절없이 사랑을 쏟아 부어요!
세월이 가면, ‘자식들이 부모 속을 어찌 알아?’ 이것이 “부모의 슬픔!”
부모의 슬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됩니다. 이것이 인류의 ‘가족사’입니다.
<2. 부부의 슬픔>
부부간에는 어떻습니까? ··· ‘아내를 향한 남편 사랑’ 잘 전달되고 있습니까?
‘남편 향한 아내 사랑’ 제대로 전달되고 있습니까? ··· 잘 안 돼요!
어느 부부가 황혼 이혼을 하고 법정을 나왔어요. “마지막으로 식사나 같이하고 헤어집시다!”
마침 통닭집이 있어서 들어갔어요. 닭 한 마리 시켰습니다.
평생 살아온 습관대로, 아내가 닭고기를 찢어서 남편 접시에 담아줍니다.
닭똥집, 꽁무니 기름샘, 닭다리! 담아 줍니다. 그걸 보고 남편이 한 마디 합니다.
“당신은 끝까지 이렇게 하는구랴! 당신은 평생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만 줬어!”
“왜요? 우리 친정아버지는 닭 잡으면 닭똥집, 기름샘, 가장 먼저 잡수셨어요!”
“나는 그거, 바라보기도 싫다고! 어릴 때부터 닭 가슴살만 먹었어!” “말을 하지 그랬어요?
“나는 당신에게 똥집, 기름샘, 닭발, 다 주고, 먹기 싫은 가슴살, 내가 먹었어요!”
남편이 말합니다. “닭 가슴살이 왜 싫어?” 아내가 조용히 대꾸합니다.
“나는 퍽퍽한 거 싫어요, 같이 살면서 그걸 몰랐어요?” “말을 하지 그랬어?”
이것이 ‘부부간의 슬픔’예요! 슬픔이란, 사랑이 전해지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내 마음이 왜 슬픈지 아셨지요? “사랑이 전달되지 않으면 슬프다!”
<3. 하나님의 슬픔>
오늘 설교 제목이요? ···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에게도 슬픔이 있어요.
하나님도 깊고도 뜨거운 사랑이 있어요. 그 사랑! 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전해지지 않아요! 하나님도 슬퍼요! ‘하나님의 슬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이거예요. ‘하나님이 슬프다!’
(16절)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이사야서 53장 1절 말씀을 바울이 인용했어요.
“주여 우리가 전했는데요, 안 믿어요! 누가 믿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을 전달하시는데, 사람들이 받아주지 않았어요! 거부당했어요!
하나님이 ‘낙담하고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의 슬픔”
부모의 슬픔! 부부의 슬픔! 하나님의 슬픔! 이것이 3대 슬픔입니다.
하나님은 이 슬픔, 어떻게 하실까요?
잘 들으시고, 부모의 슬픔, 부부의 슬픔, 치유하시고,
은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슬픔을 어떻게 하실까>
(21절)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손을 벌리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사람들은 간혹 포기 해요! 이혼도 하고, 부자간에 의절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도 사랑! 포기할 수 없어요!
하나님 사랑! 자식 사랑, 남편 사랑, 아내 사랑, 이웃 사랑! “사랑을 포기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보내셨어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기쁜 소식! 복음이지요!
그러니까,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 예쁘게 포장한, ‘선물세트’예요.
어떤 사람은 그 선물세트, 복음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요.
어떤 사람은 ‘저는 그거 필요 없어요!’ 거부합니다.
엊그제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 여학생에게 제가 주보를 건넸어요.
‘저는 이거 필요 없습니다!’ 안 받으려고 해요! 그래도 제가 손을 내밀고 있었어요.
마지못해서 받더라고요. 주유하고 그 옆에서 3분 세차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세차장 쪽으로 와요, 그래서 제가 말을 건넸습니다.
“학생은 다른 종교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저, 중국 사람이에요! 한국 말 잘 몰라요!” 아, 그러더라고요!
그 여학생은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몰라요! 전하는 말도 알아듣지 못해요, 그래서 거부했어요.
‘그 여학생에게 복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속으로 기도하면서 돌아왔습니다.
이천 년 전 복음이 전해졌을 때, 얄궂은 현상이 벌어졌어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급속도로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이 복음! 가장 먼저 복음을 믿을 줄 알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는 그거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동안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 사람들이, ‘예 부활 소식 들었습니다. 믿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심각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너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라!’ 음성 듣고 외국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고국 사람들이 냉랭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나님의 섭리가 어디에 있느냐?
기도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이때는 구약만 있을 때입니다. 구약에 보니 답이 나와 있어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할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이미 구약에서 여러 사람이 예언을 했습니다.
<모세의 노래 인용>
(19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
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나님의 사랑, ‘복음!’ 이스라엘이 안 받고 되돌려 보냈어요!
되돌아 온 복음! 하나님이 어디로 보내십니까?
“자기 백성이 아닌 자”에게 보냈다! “백성 아닌 자”가 누구냐? ‘이방인’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보냈어요, 그들이 믿고 순종합니다.
“미련한 백성” ···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시하고, 깔보는 이방인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그들이 믿고 구원 받았아요!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너희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게 하겠다!”
모세는 예수님보다 1,5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때 이미 모세가 예고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 완악하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다! 틀림없이 너희가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신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
다”
모세 당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온갖 우상을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그런 그들을 보고 질투가 납니다! 하나님이 왜 질투하느냐?
사람들이, 창조주, 만드신 이를 예배하지 않고, 창조주께서 만든 피조물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태양이나 달을 숭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분을 숭상해야 합니다.
동네 어귀에 쌓아놓은 돌탑에 절하지 말고, 그 돌들을 만드신 분께 절해라!
큰 바위나 나무에 물 떠놓고 절하지 말고, 산, 바위, 나무! 만드신 분께 절해라!
그래서 하나님이 질투하십니다.
만들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지, 만들어진 것에 대고 절하니까 하나님이 미워하세요!
거기 대고 절하고, 숭배해서 뭐라도 이뤄질 거 같으면 하나님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 하나님 말고, 그 무엇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어요!
오직 예배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인 줄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합시다!”
<이사야 인용>
(20절)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사야 선지자, 주전 8세기 선지자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800년 전에 활동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모세와 비슷하게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매우 담대하여’ 이게 무슨 말이냐?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 함부로 했다가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옳은 말 하면 싫어합니다.
이사야의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너희가 완악하다.”
요즘 말로 하면, 이사야가 자기 동족들에게 ‘돌직구’를 날린 겁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손을 내미신다!”
지금도 이렇게 말하면, 유대인들은 발끈합니다.
아직도 자기들만이 “하나님 사랑 독점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요!
어찌 보면 유대인들이 그럴 만도 합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35%가 유대인입니다.
그중에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65%가 유대인입니다.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 예술, 돈, 유대인들이 꽉 잡고 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에서 잘 나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한국도 가난하게 살 때는 복음의 수용성이 대단히 높았습니다.
그런데 세계 10위권에 이르는 경제대국이 되면서, 복음의 수용성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어요.
세상에서 잘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가? ···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나, 한국인들이 잘 나가는 것, 무조건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순조롭게 나아갈수록,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형통할수록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복음! “믿고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우리들의 순종>
오늘 본문의 첫 부분과 끝 부분에 순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16절에,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21절에,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순종으로 나가는 길목에 가장 큰 장애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설교를 시작하면서 ‘전화’라는 연극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두 남녀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전화’였어요!
결정적인 순간마다 ‘떼르릉! 떼르릉!’ 울리는 전화가 방해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연극 속의 남자는 지혜로웠어요! 연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로 청혼합니다.
방해꾼을 이용하여 성공했어요!
하나님에게 이만한 지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하나님에게는 이보다 훨씬 뛰어난 지혜가 있는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소망을 가졌습니다.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순종!
하나님이 언젠가는, 이스라엘이 교만을 내려놓고, 순종하도록 해 주실 줄 믿는다!
하나님 앞에서 순종보다 더 큰 기쁨은 없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목, 가장 큰 장애물, 교만입니다. 유대인의 교만, “교만 내려놓고 순종합시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하다가 지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다가 지친 남편들이 있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다가 지친 아내들이 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포기해야 합니까? ···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하고 계세요?
(21절)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벌렸던 손, 하나님의 손! 거두어 들이셨을까요? ··· 아닙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벌리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산 아래서 아말렉과 전쟁을 합니다. 그때 모세는 산 위에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모세의 두 손이 내려오면 싸움에서 지고, 들고 있으면 이겼어요.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팔을 붙잡아 줬습니다. 모세가 하루 종일 두 손을 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지금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리고 있노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손!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손!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손!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손!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의 손!
결코 내려서도, 내리 수도 없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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