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사)우리 역사학당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역사침탈의 실상 스크랩 고구려사를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 역사로 파악하는 견해이다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44 13.08.21 17: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구려사를 보는 중국학계의 시각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 역사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까지는 고구려에 대해 단지 중국의 동북지역에 존재했던 고대국가의 하나였고 백제, 신라와 더불어 삼국을 이룬 나라로서 한국사에 속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해서 고대 민족사를 파악하게 되었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란 “중국은 현재 뿐 아니라 자고이래 통일적 다민족 국가였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과거사를 모두 중국사로 간주한다.”는 중국의 역사서술 원칙을 말한다. 중국은 1949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변경지역의 소수민족에 대한 통합정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이러한 ‘영토지상주의적 역사관’을 확립했다. 그러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영향을 떨치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였다. 개방을 앞두고 각기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중국 국민들에게, 같은 중국인이라는 역사의식과 국가관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동요와 분열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사의 귀속문제가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 시기 중국학계의 고구려사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고구려사를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 역사로 파악하는 견해이다. 둘째는 현재 중국 영토에 속하는 평양 천도(427년) 이전의 고구려사는 중국사이고, 천도 이후는 한국사에 속한다고 이해하는 시각이다. 이는 하나의 역사를 양쪽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일사양용설(一史兩用說)’이라고도 한다. 셋째는 고구려사를 고대 한국사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두 번째 시각으로 보는 연구자가 많았었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 지역과 한반도의 정세가 변화된 199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보는 입장이 단연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따라 독립적으로 진행되었던 소수민족의 과거사까지도 모두 중국사에 속하게 되었다. 이는 분명 현재의 목적에 따라 자행된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에 들어와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보는 견해는 물론 일사양용설(一史兩用說)까지 비판하면서 고구려사 전체를 중국사로 귀속시키는 논리가 힘을 떨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고구려사연구는 2002년 동북공정이 가동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결과물들이 대량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이 연구물들의 기본적인 인식은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것이었다.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속한다고 보는 그들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를 진행했는데, 다룬 주제는 대략 여섯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즉 첫째, 고구려의 종족기원과 건국과정 문제, 둘째, 고구려와 중국의 조공책봉 문제, 셋째, 평양천도 이후 고구려사의 귀속문제, 넷째, 려수?려당 전쟁의 성격문제, 다섯째,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거취에서 본 귀속문제, 여섯째, 고구려의 역사계승에 대한 문제 등이다. 아래에서는 각 주제에 대한 중국측의 논리와 그에 대한 우리 학계의 비판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겠다.


(1) 고구려의 종족기원과 건국과정 문제

199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이 맥족(貊族), 예맥족(濊貊族), 또는 부여족(扶餘族)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렇게 볼 때에도 이들이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라는 점은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고구려사를 한국사와 완전히 단절시키기 위해 고구려를 구성한 종족 자체가 원래부터 한국과 전혀 관계없는 중국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 선조가 상인(商人)에서 분리되었다고 하는 가설이다. 요서지역 홍산문화(紅山文化)를 상(商)의 선대문화로 보고, 이 지역에 있는 대형적석묘를 고구려 적석묘의 연원으로 설정한 다음, 상의 건국 전후 또는 상인이 중원으로 이주할 무렵 동북방으로 옮겨간 한 지파가 고구려족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일주서(逸周書)』「왕회해편(王會解篇)」에 나오는 ‘고이(高夷)’를 고구려 선인(先人)이라고 지적했다. 이 설은 최근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인 전욱(?頊) 고양씨(高陽氏)의 후예가 바로 고이(高夷)이며, 고구려 왕실이 스스로 고양씨의 후예임을 자처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는 주장으로까지 비약했다.

이와 달리 고구려 주민집단을 염제족(炎帝族) 계통의 지파로서 중국 산동지역으로부터 압록강 중류일대로 이주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지지자가 많지 않다.

그런데 중국측이 근거하고 있는 책인 『일주서』는 편찬자와 편찬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많은 문제점을 가진 역사서라고 일찍부터 신빙성에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그러므로 『일주서』의 사료를 근거로 하여 고구려의 기원을 설정하는 주장은 역사연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사료비판 단계에서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고구려는 원래 ‘성(城)’을 가리키는 ‘구루(溝?)’, 국가를 의미하는 ‘구룬’ 등에서 나온 ‘구려(句麗)’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뒤에 규모가 커지면서 ‘크다’, ‘높다’는 의미의 관형사 ‘고(高)’를 붙이게 되었다. 이는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격하하여 ‘하구려(下句麗)’라 불렀다고 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따라서 ‘高’라는 글자가 같다하여 고구려를 ‘고이(高夷)와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욱 고양씨는 중국인들 자신도 그 실존 여부를 의심하고 있는 전설상의 존재이다. 또 전욱 고양씨를 실존 인물로 본다 하더라도 이를 『일주서』「왕회해편」의 고이와 직접 연관시킬 만한 논거는 없다. 전욱 고양씨는 기원전 2500년경의 인물이고, 고이는 기원전 10세기경의 종족으로서 양자 사이에는 무려 1500여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있다. 중국학자들은 또 고구려 적석묘가 홍산문화에서 유래되었다고 보지만, 양자 사이에는 무려 3000년 가까운 시간차가 존재한다. 따라서 중국측의 설은 근거가 빈약한 가설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우리 학계로부터 제기되었다. 그러자 중국학계에서도 그런 점을 고려했는지, 최근에는 예맥(濊貊)?부여(夫餘)?고이(高夷)?상인(商人)?염제족(炎帝族), 한족(漢族)이 결합하여 만든 다민족국가인데, 그 중 중심은 漢族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우리 학계에서는 중국 정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예(濊)?맥(貊)?예맥(穢貊)이 고구려를 건국한 주체세력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고구려의 종족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예족설, 맥족설, 예맥족설, 예맥족에서의 분화설, 원래는 예족인데 명칭상 맥족이라는 설 등 여러 견해로 나눠져 있어 정설이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이들이 중국의 한족이나 유목민과 다른 고유한 종족으로서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농경을 영위하던 사람들임은 그 문화적 성격을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2) 고구려와 중국의 조공책봉 문제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가 중국에 대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으므로 독립국가가 아닌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당시의 실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를 비롯한 중국사서, 즉 그들의 일방적인 시각에 따라 서술된 사료를 자구 그대로 이해한 위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중국 사서는 기본적으로 중화관(中華觀)에 입각하여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서술해 놓았다. 따라서 그들 스스로 자국의 역사를 서술할 때에도 명분상, 자구상의 조공책봉이라는 관계와 실질적인 상황을 구분해서 파악한다. 그런데 유독 고구려와의 관계에 대해서만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역사의 실상을 보여주는 많은 자료들을 무시한 채 오직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사료만을 골라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책봉과 조공은 본래 중국 내부에서 중앙의 황제와 지방 사이에 맺어지는 정치 질서였지만, 점차 확대되어 국가간의 외교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전근대 시기에 중국과 주변 국가들 간에 이루어졌던 국제무역의 한 변형된 형태이기도 했다. 따라서 실제 중국과 동아시아 각국 간에 맺어졌던 조공책봉관계는 중국측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명분과 실제적인 상황이 전혀 별개로 진행되었다.

예컨대 후한대 고구려와 현도군의 관계를 보면, 중국학계의 주장처럼 고구려가 현도군에 소속된 제후국이었던 것이 아니라, 현도군과의 대결과정에서 예맥족이 결집하여 국가를 세우고 그 과정에서 더욱 발전해가는 형태였다. 즉 고구려와 중국 군현의 관계는 중국학계의 주장처럼 화평관계가 아니라, 충돌이 계속되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고구려는 중국 군현 안에서 출발해 황제에게 조공하고 책봉을 받으며 존재했던 지방정권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과의 투쟁을 통해 국가의 성립과 발전을 이룩한 나라였던 것이다.

더욱이 조공?책봉제가 강화된 시기였다고 하는 남북조 시기에는 오히려 독자적인 상태에서 남조와 북조, 양 왕조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고구려는 두 왕조와 모두 조공책봉관계를 맺고,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두 왕조와의 관계를 자율적으로 조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왕조도 고구려에 대해 정치적 간섭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국과 적대적인 왕조에 조공하고 책봉하는 데도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했다. 이를 흔히 등거리외교라고 부른다.

요컨대 조공책봉제는 전근대시기에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서 적용된 외교 형식이자 무역방식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다는 것만 가지고 지방정권이었다고 한다면, 신라, 백제, 왜, 안남 등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던 모든 나라들을 다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해야 한다.

보다 유념해야할 것은 고구려가 당시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자국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는 6.39m의 거대한 광개토왕비에 자신들이 천손족(天孫族)이었음을 당당하게 새겨 넣었다. 그리고 자기 나라 왕을 성태왕(聖太王), 태왕(太王) 등으로 높여 불렀다.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런 일은 중국 황제의 신하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황제는 그에 대해 전혀 이의제기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새겨넣은 광개토왕비가 발해 멸망 후 줄곧 중국 땅 안에 있었지만 파괴되지 않고 지금까지 의연히 서있다. 이는 결국 조공책봉이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증거가 아니었으며, 조공책봉 문제는 중국측이 내세우는 명분과 실제상황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3) 평양천도 이후 고구려사의 귀속문제

중국학계에서는 “현재의 중국 땅 안에 속하는 모든 지역의 과거사는 모두 중국사”라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해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사와 이전의 고구려사를 분리해 보아야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점에서 일사양용설이 나오기도 했지만, 동북공정이 본격 가동된 이후에는 설을 바꾸었다.

즉 “역사상의 귀속문제는 모든 역사를 전반적으로 검토하여 그것이 주로 어떻게 귀속하였나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한다.”고 하며, 영토의 크기나 존속기간 등에서 현 중국영토의 고구려사가 대세를 이루고 있으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사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고구려사 기간이 427년부터 668년까지 241년간인데 비하여, 중국영토 즉 중국사로서의 고구려사 기간은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427년까지 464년간이나 되어 2배가량이나 되고, 고구려 땅의 약 2/3가량이 현 중국의 영토 안에 있으므로 중국사에 귀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설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평양은 현재 북한 영토에 속하지만, 고대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던 중국 땅이었으므로 그 땅에서 전개된 역사도 곧 중국사라는 주장도 내놓았다. 즉 현 중국영토 안에서 건국된 고구려사는 중국의 영토 안이기 때문에 중국의 지방 정권이고, 현 북한영토 안에 있었던 고구려사, 즉 평양천도 이후의 고구려사는 고대시기에 중국의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런 인식에 따르면 고대 중국 역사의 남쪽 경계선이 대동강으로 되고, 또 더 나아가 전성기 고구려의 남방한계선을 고려하면 한강유역까지도 모두 중국사에 속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현재의 영토에 기준을 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도 모순되는 설로서, 그 모순을 덮으려 하다 보니 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4) 려수?려당 전쟁의 성격문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고, 고구려왕은 황제의 신하였다고 보는 입장에 서면 역사상에 나타나는 제반 사건도 모두 그에 따라 재해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두 왕조에 걸쳐 벌어졌던 역사적인 대전쟁이었던 려수, 려당 전쟁에 대해서도 국제전이라 보지 않고 중국내부의 통일전쟁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학계에서는 역시 중화주의적 시각에 따라 전쟁의 명분으로 삼기위해 발표한 『수서(隋書)』나 『당서(唐書)』등에 보이는 수 문제의 조서, 수 양제의 조서, 당 태종의 조서를 문구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로써 실제 역사상을 구성하고 있다. 이 때문에 책봉에 의한 고구려와 수, 당의 신속(臣屬) 관계를 깨뜨린 고구려의 잘못을 응징한 것이라고 고구려 원정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수?당의 정벌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중원 통일정권이 지방정권의 이탈을 막고 본래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벌인 민족 내부의 통일전쟁이었다고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적은 중국측의 사료에서도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수당과의 전쟁과정에서 발생한 포로를 상호 교환하자고 하는 제의를 한 부분을 보면, 중국측에서 “두 나라의 포로”라고 한 것이 사료상에 남아 있다. 하지만 중국학계에서는 이런 사료들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설에 부합하는 사료만을 채택해 역사를 구성하는 반역사적인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은 두 세력권 사이의 충돌과 갈등의 결과였다. 수당은 중원을 통일한 후 자국 중심의 중화적 세계를 동아시아 일대에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 고구려에 실질적인 신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고구려는 그때까지 유지해왔던 자국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를 지키려고 했다. 두 개의 천하, 두 개의 세력권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질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결국 두 세력권이 충돌한 국제전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수, 당과 고구려와의 전쟁은 수, 당의 침공을 맞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대외항쟁이자, 국가간의 대외전쟁이었던 것이다.


(5)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거취에서 본 귀속문제

중국학계는 고구려 멸망 후에 그 주민의 상당수가 중국으로 들어가 한족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 멸망 후 상당수의 사람들은 중국내지로 바로 들어갔고, 일부는 요동에 남아 있다가 발해건국에 참여했고, 일부는 돌궐로 들어갔다. 그러나 발해로 간 사람들이나 돌궐로 간 사람들도 발해와 돌궐의 멸망 이후 모두 중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신라나 일본으로 건너간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인으로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처럼 주민의 절대 다수가 중국인으로 되었으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귀속된다고 하고 있다.

고구려 멸망이후 상당수의 고구려인들은 당으로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거취를 결정할 수 없었다. 패전국민이자 망국민이었으므로 당의 정략적인 이주정책에 의해 고향산천을 버리고 강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요동에 남아 있다가 발해를 건국한 사람들이나, 당의 지배를 피해 돌궐로 들어갔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발해가 멸망하고, 돌궐이 당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중국인이 되었다. 도도한 역사적 운명 앞에 망국민의 후손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신라로 내려온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거취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당과 같은 적국임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택했던 것은 삼국 간 교류를 통해 쌓은 동류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고, 또 무엇보다 신라의 힘을 빌려 당과 싸워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고구려 부흥의식,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유민의 거취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당시 상황이 일반적인 평화시기와 달리 전쟁에 패해서 나라가 망한 상태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유민이 어디로 갔는가 하는 점은 숫자나 양적인 면에서 따질 문제가 아니다. 여러 사람들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할 대상은 신라로 간 사람들이었다. 신라에서는 이들을 받아들인 후 고구려를 부흥한 보덕국을 세워주었다. 그리고 통일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통합하여 역사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통삼한(一統三韓)’의 강조가 바로 그 증거이다. 고구려, 백제 유민들은 또 신라와 함께 대당항쟁에 앞장서기도 했다. 신라로 간 고구려유민들은 신라 안에서도 고구려유민이란 자의식을 계속 가지고 살았다. 신라의 분열기에 고구려를 계승한 태봉, 후고구려가 성립된 것은 그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요컨대 고구려유민의 귀속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것은 망국민인 그들이 자의적으로 택한 길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과, 그들이 고구려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고구려사의 귀속문제, 고구려인의 계승문제를 따질 때에는 무엇보다 고구려 계승의식이 단지 인식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 역사적인 면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여부에 더 중점을 두고 살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여 ‘일통삼한’을 이룩했음을 강조한 통일신라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국초부터 강조했던 발해와 고려의 역사를 중시해야 한다.


(6) 고구려의 역사계승에 대한 문제

중국학계는 고구려사와 한국사와의 관계를 차단하기 위해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왕건이 세운 고려는 이름만 비슷할 뿐 서로 계승관계가 없는 타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와 고려는 본래 족속(族屬)이 다르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 역사상의 국가로 오늘날 중국인의 선조가 세운 나라였으나, 고려는 오늘날 한국인의 선조인 신라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는 것이다. 이 두개의 국가가 각기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두 나라가 마치 무슨 관계가 있는 양 오인된 것이지 실제로는 전혀 계승관계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중국측에서는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자국의 정사인 『송사(宋史)』에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기록된 것 자체가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태조 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한 것은 분명히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중시했고, 북진정책, 고토회복정책을 추진해나갔다. 또 왕건의 선조인 호경(虎景)은 고구려의 옛 땅인 백두산 일대에 살다가 황해도 지역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왕건의 측근 가운데에는 평안도 출신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모두 태생적으로 보면 고구려유민의 후손이었다.

고려 사람들은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서희장군이 거란의 소손녕을 만나 자신들의 선조인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는 거란을 비판함으로써 외교를 통해 거란족 침입을 물리친 일은 당시 고려 사람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려사람들이 고구려 역사를 계승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전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함께 다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저술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발해 멸망 후 발해의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준 것도 발해나 고려나 모두 같은 고구려의 후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가 자기들 선조의 역사라고 보는 인식은 고려 사람들에게는 말할 필요가 없는 기본 상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들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인식했고, 그 결과 중국 정사에 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계보가 서술되었던 것이다. 즉 중국정사를 쓴 그 선조가 잘못된 역사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인 오늘날의 중국 역사학자들이 현재의 필요에 따라 선조들이 올바르게 서술해놓은 과거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