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3 시편 80편 7-19절 주님의 빛나는 얼굴
낙엽에 묻는다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쌀쌀해지는 날씨 속에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단풍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고 이곳저곳에 아름다운 빛깔로 아름답게 수놓고 있습니다. 자연은 요란하지는 않지만, 묵묵히 자기 삶의 몫을 그 자리에서 살아내고 있는 듯합니다. 안도현의 “가을 엽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잎 두잎 나뭇잎이 /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 낮은 곳에 있는지를
떨어지는 낙엽은 마지막 가는 길에도 세상에 나눌 것이 많은 듯이 다 내어주고 떠나갑니다. 그 낙엽을 보며 시인은 “내가 가진 게 너무 없지만 나눠주고 싶습니다” 고백합니다. 시인은 자연의 마음과 일치하여 비록 내게 있는 것이 빈약하지만, 나누려는 마음, 주고 싶은 마음이 차오른 것입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앉듯 사랑도 낮은 곳에 있습니다. 낙엽이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 그리스도도 낮은 곳으로 임하셔서 낮은 곳에서 낮은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낙엽처럼, 그리스도처럼 낮은 곳으로 흐를 수 있다면 우리 영혼은 맑아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낮은 곳에 있는 그림자와 더불어 살고 비록 작지만, 나의 것을 내어줄 수 있다면 이전보다 성숙한 나무가 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 세계의 파괴적인 어둠은 결코 자신의 것을 내어주지 않고, 더 높은 곳으로 질주하는 권력 추동과 탐욕에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우리도 조금은 그렇게 닮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눈물의 빵
시편 80편의 표제는 “아삽의 시, 지휘자를 따라 소산님 에둣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입니다. 소산님 에둣은 시편 60편, 45편에 등장하는 표제와 유사합니다. 그 뜻은 “증거의 백합들”, 혹은 “언약의 나라꽃”입니다. 지휘자의 인도를 따라 이 시를 함께 노래할 때 그 곡조의 분위기는 노래하는 자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나라 혹 순결한 백성임을 의식하며 불러야 함을 시사하는 듯 보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분명한 약속, 증거로 연결되어 있다는 정체성의 확신을 가지고 불러야 합니다. 이런 언약 관계가 되면 약속의 당사자들은 서로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결연하고 비장하기까지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책임져야 하고, 인간 또한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책임을 짊어져야 합니다.
시인의 비참함은 ‘눈물의 빵’이란 단어에서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눈물의 빵을 먹이고, 눈물을 물리도록 마시게 하셨습니다(5). 눈물은 감정의 결정체입니다. 슬픔과 설움, 기쁨 등의 정서적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일종의 정화수입니다. 눈물은 인간에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카타르시스와 치료적 효력을 줍니다. 그러나 때로는 슬픔으로 흐른 과도한 눈물은 모든 감정을 차단해버리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는 눈물의 빵은 서러움과 비탄의 눈물입니다. 눈물 젖은 빵은 차마 죽을 수 없어서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서 먹는 양식일 것입니다. 눈물을 마시는 것은 아무리 달래보려 해도 달래지지 않는 서러움과 아픔입니다.
포도밭을 망치는 멧돼지
이런 눈물의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뽑아 오셔서, 뭇 나라를 몰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 땅을 가꾸시고 그 나무의 뿌리를 내리게 하시더니 그 나무가 온 땅에 채웠습니다. 산들이 그 포도나무 그늘에 덮이고, 울창한 백향목도 그 가지고 뒤덮였습니다(8-10)”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가나안 땅의 원래 부족을 몰아내고 그 땅에 정착하여 땅을 가꾸어서 뿌리내리고 포도나무와 백향목으로 울창하게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나무가 온 땅을 덮었다는 것은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의 확장과 번성을 표상합니다. 그 영광스런 번영과 축복을 허락하셨지만, 울타리를 부수고 마구 숲을 훼손하는 멧돼지와 들짐승들이 출현하여 그 포도나무 숲을 망가뜨렸습니다. 이런 멧돼지와 들짐승은 주변의 이방나라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런 형국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의 내면의 상황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탐욕스런 충동이 경계를 허물고 침입하여 생명력과 창조력, 희망을 모두 파괴해버린 것입니다. 나라가 번성하고 강성해지면서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욕정과 탐욕이 일어나서, 아름다운 생명력과 나라의 미래를 망쳐버릴 수 있습니다. 멧돼지와 들짐승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방나라들의 침입으로 이스라엘 땅의 파괴는 내면의 파괴의 외면화인 것입니다.
이런 이미지는 아가서에서 겨울이 지나고 포도나무, 무화과나무에 꽃이 활짝 잎어 있는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망치는 여우가 등장합니다. 이제 아름답게 꽃이 피는 절정의 순간에, 모든 결실이 맺히려하는 순간에 사기적인 본능, 교활한 본능이 희망찬 미래를 망가뜨리려 포도밭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위험한 시간은 결핍의 때일 수도 있지만, 더 위험한 때는 풍요의 시간, 정점의 때입니다. 이 때 교활한 여우나 멧돼지가 침입하여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형국은 우리 안에 일어나는 정신적 상황입니다. 삶이 절정으로 치닫고, 모든 것이 축복받은 듯 번성하고, 권력의 힘을 쟁취할 때 이런 멧돼지와 들짐승이 경계를 허물기 위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게걸스러운 탐욕과 욕정이 일어나고, 길들여지지 않는 충동이 포도밭을 망치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생애 정점에 그에게 일어난 욕정은 그것을 증명합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고전10:12)” 우리의 자라나는 희망과 미래를 망치지 않도록 포도밭을 망치는 멧돼지와 들짐승을 잘 경계할 수 있는 지혜와 겸손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있는 사람
이 모든 어려움에서 주님께서 보호하시고 주님의 분노를 거두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주님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 주님께서 몸소 굳게 잡아주신 인자 위에 주님의 손을 얹어주시길 간청합니다(17). 다른 번역에 보면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인자가 상당히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자는 베냐민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베냐민이 오른쪽의 아들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0편 1절처럼 하나님의 오른쪽에 있는 왕을 지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른쪽은 의식과 행위, 정의과 공평을 상징하는 표상하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오른쪽에 있는 인자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 그 백성이 지향해야 할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며,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고자 하는 이들 위에 주님의 손을 얹어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이 자신 위에 얹어진 인생은 그분의 보호하심과 그분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 쌍둥이를 낳아 기르던 한 여성이 육아로 지쳐있었고, 세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심적 고통이 있을 때 그분은 꿈을 꿈었습니다.
“나는 강물 속에 누워있다. 그런데 커다란 손이 나를 위에 덮는다. 그런데 유성같은 것이 하늘로부터 떨어진다. 그 손은 점점 커져서 강을 덮어버릴 만큼 커진다. 나는 안전하다고 느낀다.”[김덕규지음, <토빗기와 융심리학>, p142]
이 여성은 그 손이 하나님의 손임을 직감하였습니다. 정서적 우울함 속에서 무기력하게 누워있을 때 위로부터 떨어지는 어떤 공격과 무거운 짐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이 그녀를 지키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지향이 바르고, 올바른 곳에 자신을 설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길을 가는 자는 반드시 바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 지치고 고단하고 고통의 무게로 힘겨워할 때, 그 연약한 자를 보호하시는 주님의 손이 있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갔으면 합니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
오늘 시편 80편을 읽다보면 3절, 7절, 19절에 반복적으로 동일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주십시오. 우리가 구원을 받도록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십시오.”
시인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주시길 간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표상할 때 쓰이는 상징은 빛입니다(1).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 신성함을 경험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빛의 체험입니다. 하나님을 태양과 같은 빛나는 얼굴로 나타냅니다. 이런 빛은 어둠을 물리치고, 새로운 생명과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표상하며, 분별하고 구분하는 기능을 합니다. 주님의 빛으로 새로운 생명과 의식성을 획득하는 것과 무엇이 내게 속한 것이고 네게 속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필수조건입니다. 우리 시대는 신들이 황혼으로 저물어 그 어둠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사악한 지성과 연합하여 한편으로 문명의 진보를 발달시키고 있지만, 사기적이고 파괴적인 양상으로 인간과 자연에게 위해를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인 신성한 의식이 절실합니다. 주님의 빛으로 우리 내면의 어둠을 밝히고, 시대의 그림자를 밝히보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일생동안 주님이 빛나는 얼굴이 우리의 인생길을 비추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