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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1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고향을 떠나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와 일가가 서울 등지로 삶의 터전을 옮기니 고향에 찾아갈 일이 가물에 콩 나듯 해를 그르기 일쑤였다. 더욱이 퇴직을 앞둔 5~6년 동안은 가족을 떠나 외국과 객지를 전전하다 보니 고향은 점점 더 아득히 멀어지기만 했다. 올해 6월 말에 퇴직을 하니 그나마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추석을 앞두고 작은형과 함께 고향으로 벌초를 다녀오기로 했다. 부모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의 공원 묘원에 있지만, 조부모를 비롯한 선조의 묘소는 고향인 무을(舞乙)과 그 인근 선산 봉곡동 종산 등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선산휴게소에 들러 구미시 로컬 푸드 직매장에서 포도와 백향과를 대여섯 박스 사서 차에 싣고, 구미역에서 작은형을 픽업했다.
선산 IC로 내려서서 옛 선산 읍성의 남문인 낙남루(洛南樓) 부근 봉황 시장 초입 가게에서 톱과 낫을 한 자루씩 사고 무을로 향했다. 선산 읍내에서 좌우 멀리 늘어선 산군 사이에 펼쳐진 논밭 사이로 난 상무로(尙武路)를 따라 10km쯤 달려, 무을 가정자(柯亭子) 옛 고향 집 집터에 차를 세웠다. 작년 중국에서 귀국 후 그해 10월에 열렸던 무을 초중고교 총동창회 때 무을에 잠시 들렀었다. 좋아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을의 모습은 작년이나,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고향을 떠나온 40년 전이나 그 모습 그대로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어릴 적의 고향마을은 의령 남씨 집성촌으로 20여 호가 모여 살던 작은 촌락이었다. 공동 우물과 공동 빨래터를 사용하던 동네 사람들은 누구 집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몇 개인지 서로 알 정도로 허물없이 지내던 이웃이었다. 우리 집이 있던 자리는 공터가 되었고, 집 옆 산자락 가장자리에 서있던 아름드리 꿀밤나무 중 두어 그루만 예전보다 더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여섯 호만 남은 마을엔 인적이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소쿠리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얕은 산의 좌측 능선 중턱에 자리한 조부의 묘소까지는 300미터 남짓 가까운 거리이다. 산소로 오르는 산길 가장자리는 잡풀이 무성한데, 앞서 조상들 산소에 벌초를 다녀간 사람들이 있어서인지, 길 가운데 잡초는 말끔히 제거되어 오르기가 한결 수월하다. 형의 말대로 하루라도 더 늦게, 그렇지만 추석 전에 벌초하는 이점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이나 제삿날 때면 음식과 제주(祭酒) 주전자를 들고 부친을 따라 성묘를 하러 가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새롭게 떠오른다.
선친이 새겨서 앉힌 상석(床石) 앞면의 ‘처사 인동 장 공 휘 만술지묘(處士 仁同 張公 諱 萬述之墓)’ 글씨가 무성한 잡초에 반쯤 가려있다. 묘소를 둘러싸고 있던 아름드리 소나무 중 한 그루가 허리가 꺾인 채 쓰러졌고, 그 옆 노송의 가지 하나는 쓰러진 소나무 둥치에 눌려 땅에 닿을 듯하다. 상석에 과일과 포 술잔을 올려놓고 재배한 후, 쓰러진 소나무 밑동과 줄기를 잘라 걷어내고, 봉분과 그 주변에 새로 뿌리는 내리려는 도토리 아카시 등 잡목과 잡풀을 베어내고, 삐딱하게 기울어진 망주석(望柱石)을 바로 세웠다. 벌초를 마치고 나니 오랫동안 깎지 않고 버티던 덥수룩한 머리를 손질한 듯 마음이 개운하다.
선산 읍내 방향으로 다시 차를 몰아서 인동 장가(仁同 張門)의 집성촌으로 마을 뒤, 형제봉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종산에 자리한 조모의 산소로 올랐다. 남쪽으로 뻗어 내린 그 산줄기는 서편으로 여러 갈래의 곁줄기를 뻗쳤는데, 그 모양새가 흡사 북유럽 신화의 최고신 오딘(Odin)이 타고 다닌다는 다리가 여덟 개 달린 말(馬) 슬레이프니르(Sleipnir)를 닮았다. 그 산줄기의 남단 머리 부분에 사육신의 한 분인 단계 하위지(河緯地, 1412~1456) 선생 묘소가 있고, 조모는 가운데 곁줄기 위쪽에 잠들어 계시다.
조부 산소 근처 묘소로 벌초를 온 배씨(裵氏)는 큰 형과 동년배로 서울에서 귀향하여 장터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장터의 아주머니와 형뻘 6촌 댁에 각각 들러 직매장에서 산 과일을 전해드리며 안부를 물었다. 조모 산소를 벌초하러 올라갈 때는 마침 벌초를 마치고 줄지어 내려오던 종친들을 만나 서로 세계(世系)를 묻고 근황을 나누었다. 봉곡동 등 선산 인근에 우리 황상 파 종친들이 많이 모여 사는 것은 분파조 장잠(張潛)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송촌(松村) 종(嵷) 할아버지가 인동 장문의 본향인 인동(仁同)에서 이쪽으로 이주한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고려사(高麗史)>의 열전(列傳)과 지권(志卷),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의 기록에 비추어 보면, 우리 시조인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 금용(金用) 할아버지는 목종 5년(1002년) 5월 이후 고려 문종 26년(1072년) 이전에 고려 초기 직제인 신호위(神虎衛)의 상장군(上將軍) 벼슬을 한 것으로 추론된다. 그분이 지금의 인동인 옥산(玉山)의 부원군(府院君)을 제수 받아 옥산(玉山) 장문이 시작된 것이다. 1533년에 문중 족보를 중수한 우리 황상파(凰顙派)의 분파조 죽정 장잠(竹亭 張潛, 1497~1552) 할아버지 등의 노력으로 인해 지금까지 천 년(千年)의 오랜 혈맥의 사정을 명확히 알 수 있으니 참 다행한 일이다.
황상파 분파조(18世)이신 죽정 할아버님의 생애 대강은 조선 영․정조 때 형조판서와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낸 금성 정범조(錦城 丁範祖, 1723~1801)가 정조 19년인 1795년에 역은(讚) <죽정집(竹亭集)>에 잘 나타나 있다. 죽정집은 서문(序文), 세계도(世系圖), 연보(年譜), 일고(逸稿), 언행록(言行錄), 묘갈명(墓碣銘), 행장(行狀)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보에는 출생부터 정암 조광조 선생께 배우러 나아가고, 능주(綾州) 유배 시 죽정 할아버지 홀로 유배지까지 따라가서 정암 선생이 사사될 때까지 함께한 내용, 안동 향시에서 2등을 한 내용, 회재 이언적과의 교유, 퇴계 이황 및 화담 서경덕과의 일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우리 가문의 종가는 지금도 관향인 인동동에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고, 천생산의 세 갈래 줄기 중 주산(主山)인 가운데 줄기가 끊어질듯 내려와 인동의 중심부에 자그맣게 뭉쳐 오른 옥산(玉山)이 자리한다. 우리 문중의 본관이 옥산(玉山)으로도 불리는 까닭이다.
인의동 남산동 황상동 등으로 구성된 인동과 그 인근에는 옥산사(玉山祠)를 비롯해서, 대설이학자 여헌 장현광의 종가인 모원당과 그를 배향한 동락서원, 장잠을 배향한 현암서원,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 한 분인 장안세를 배향한 옥계서원, 부지암정사 등 선조들의 숨결이 머물렀던 장소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나이가 들수록 고향이 그리워지고, 자기 뿌리에 대해 관심을 더해가는 것은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고향에 내려와서 조부모님 묘소의 벌초를 마쳤고 시간의 여유도 있으니, 문중의 본향 구미시 인동의 진산(鎭山)인 천생산을 올라보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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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린 산, 천생산..
벌초를 모두 마치고 작은형을 구미역에 내려준 후 천생산에 오르기 위해 검성지 쪽으로 차를 몰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나이가 들수록 고향이 그리워지고, 자기 뿌리에 대해 관심을 더해가는 것은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고향에 내려와서 조부모님 묘소의 벌초를 마쳤고 시간의 여유도 있으니, 문중의 본향 구미시 인동의 진산(鎭山)인 천생산을 올라보기로 한 것이다.
검성지에서 약목-선산로의 검성교차로 교량 밑으로 난 좁은 도로는 천생산 서편 산줄기 사이 가장 깊은 골인 산성지(山城池)까지 이어진다.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그 길은 막다른 길로 산성지에서 멎는다. 해는 중천에 솟아 있고, 작은 저수지인 산성지의 적갈색 물빛 수면 위에 천생산 줄기 한 자락이 잠겨 있다. 오후 세 시경 산성지에서 등로로 들어서서 천생산 정상으로 향했다. 천생산 정상까지는 1.5km로 여러 코스 가운데 가장 단거리 코스로 알려져 있다. 등로 초입은 완만한 경사의 계곡 주변에 미소년처럼 곧게 뻗은 수려한 적송 군락 사이로 난 호젓한 길이다. 계곡 만곡부 노송 아래 정자에는 피서객 두 명이 마주 앉아 정담을 나누고 있다.
주 능선에서 뻗은 내린 산줄기가 거느린 곁줄들은 갈래갈래 물길을 따라 길을 내놓는데, 그 길들은 언제 폭우라도 쏟아졌는지 패이고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며 차츰 고도를 높여 간다. 산객이 즐겨 찾지 않는 등로인듯 인적 없는 등로는 희미하고 깊은 골은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일순 산객에게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경고하듯, 딱따구리가 따 다다닥 따 다다닥~ 마른 나무통을 쪼아대는 소리가 그 적막을 깨트린다.
길인 듯 아닌 듯한 비탈을 한동안 치고 오르니, 왼편으로 푸른 숲 위에 성벽처럼 길게 이어진 암벽이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낸다. 통신 바위 쪽의 천연암벽 병풍바위일 것이다. 능선 마루까지 50여 미터로 보이는 지점, 골은 깔때기 꼭짓점처럼 한 곳으로 수렴하며 가파른 사면 위에 철벽 옹성처럼 높은 암벽이 앞을 턱 막으며 버티고 서있다.
암벽 아랫면을 따라 오른쪽으로 수평으로 이동하여 천생산 정상이자 미덕암 바로 아랫부분 주 능선으로 올라섰다. 주 능선에서 우측으로 휘도니 암벽 뒷면에 산정으로 인도하는 가파른 나무 계단이 길게 놓여 있다. 계단 초입의 너럭바위는 낭떠러지와 함께 탁 트인 전망을 내놓는데, 신동 들판 너머로 큰 천생산, 유학산, 팔공산 등이 능선을 앞뒤로 겹치며 길게 펼쳐진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여 천생산 정상부에 올라 남서쪽으로 돌출한 아찔한 바위 절벽 미덕암(米德岩)으로 조심조심 다가섰다. 그 가장자리에서 절벽 아래로 펼쳐진 짙푸른 숲을 조망하니, 뱃전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인당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심청의 심정처럼 모골이 송연해진다. 미덕암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지략으로 왜군을 물러나게 한 곽재우 장군 (1552∼1617) 전설에서 유래했다. 나란히 서 있는 안내판이 미덕암 이름 유래와 천생산성에 대해 이해를 돕는다.
"왜군이 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해 오자, 곽재우 장군은 산 아래에서 잘 보이는 이 바위에서 말 등에 흰 쌀을 부어 말을 목욕시키는 것처럼 꾸몄다. 이에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여긴 왜군이 후퇴했고, 왜군을 물리친 것이 물같이 보인 쌀의 덕이라고 하여 이 바위를 미덕암이라 불렀다."
"산성은 천생산 정상 주위 8~9부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다. 서쪽은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고, 너머지 3면은 정상 주위를 따라 테뫼식으로 축조하였다. 내성 약 1,300m, 외성 약 1,320m로 이 중 인위적인 성벽은 812m이다."
군사와 군마를 위한 우물, 못, 건물, 장대 등이 설치된 내성은 주민의 피난과 전투 목적으로 축조된 것이고, 외성은 주로 장기전 대비 내성에 공급할 농작물 경작, 군마 방목, 군사 훈련장 등으로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덕암 이름의 유래 전설은 오산 독산성에서 왜적을 물리친 권율 장군의 전설과 그 내용이 거의 일치하니 흥미롭다. 미덕암 뒤쪽 산불 감시소 옆 제법 너르고 평평한 터에 천생산성 유래비가 해발 407m 천생산의 정상 표지석을 대신하고 있고, 그 앞에는 반듯한 석조 제단도 자리하고 있다. '천생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2004년 1월 1일에 세운 비석이 천생산성의 유구한 유래를 전한다.
"하늘이 낳았다는 천생산
그 허리 두른 성역(聖域)은
오랜 세월 외침(外侵)을 막아낸
역사의 흔적
일찍이 혁거세(赫居世)가
축성(築城)하고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수축(修築)하였다고
전하는 천생산성(天生山城)
면면히 이어온
역사(歷史)의 시간(時間)을 기리며
오늘 이 비(碑)를 세운다."
유래비 앞쪽 너른 능선 가장자리의 노송 군락이 낮게 깔린 푸른 구름을 몸에 두른 수백 마리 청룡의 무리가 땅을 박차고 막 하늘로 승천하려는 모습처럼 장관이다. 산성의 정상부에 해당하는 일자(一字) 모양의 평탄한 능선길은 이곳부터 병풍바위 절벽과 석성을 좌우에 끼고 북문지까지 600여 미터 이어진다.
평탄하던 능선은 북문지에 다다를 즈음 비스듬한 내리막길에 이어 급한 비탈의 나무 데크 계단을 길게 내놓는다. 칡이 넝쿨을 계단 길 위까지 덮으며 진녹색 잎사귀 사이로 진분홍 꽃송이를 군데군데 내놓았다. 얼굴에 스치는 선선한 바람에 콧속으로 스며드는 은은하고 순박한 칡꽃 내음이 좋다.
나무 계단을 내려서니 그 우측에 자연석으로 쌓은 2~3m 높이 천생산성의 북문이 38선 탱크 방어벽처럼 견고하게 비탈에 비켜 자리하고 있다. 성문 아래쪽에 붕괴된 성벽 보수공사로 인해 출입을 통제한다는 표지가 가로막고 있어 아쉽다. 산성 정상부에서 시작된 가파른 비탈은 북문에서 가지런히 놓인 돌계단을 한참 더 내려와야 멎으며 평탄해진다.
이정표가 앞쪽으로 장천, 우측으로 천생사, 좌측으로 황상동 등로를 안내한다. 직진하면 평탄한 능선은 좌우로 병풍바위 암벽과 가파른 사면을 끼고 평탄하게 500여 미터를 더 이어지다가, 통신 바위에서 북서쪽으로 고도를 낮추며 구미시 금전동과 장천면의 경계로 내려설 것이다.
다른 두 길을 버리고 좌측 산성지 쪽으로 내려가는 능선길로 방향을 잡았다. 가장 짧은 산행 코스라는 말 그대로 산행 시작 2시간 만에 천생산성 위를 가로질러 하산길로 접어든 것이다. 능선길 주변에 흩어져 있는 기와 파편은 산성 부근에 누대 등 기와지붕을 얹은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게 해준다. 큰 바윗돌과 노송이 어우러진 능선길을 걷자니 신선들이 사는 도가의 선경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아래쪽으로 길게 휘도는 능선길을 버리고 능선 좌측 아래쪽에 있는 산성지를 향해 계곡 쪽으로 난 가파른 길로 접어들었다. 골은 깊고 숲은 우거져 날이 조금더 어두워지면 두려움이 엄습해 올 것 같은 분위기다. 산성지 위쪽 계곡으로 내려설 무렵 무성한 잡풀을 뒤집어쓴 봉분 뒤로 저무는 태양 빛이 쏟아져 비친다.
발을 재촉하여 산성지로 내려서니, 좁고 깊은 골 아래 저 멀리 지는 해를 등지고 하늘과 높이 등성이를 맞댄 금오산이 신비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천생산 산정에서의 일몰은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다. 금오산 능선 너머 어린 광채로는 저녁놀이 얼마나 찬란할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어느 날 아도화상은 부처님 얼굴을 닮은 능선 위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金烏山)이라고 이름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저녁노을은 문득 떨어지기 직전의 능소화보다도 훨씬 더 환하게 피어올라 서천(西天)을 온통 사지르더니, 급기야 그 무슨 뜨거운 불꽃처럼 온 천지간을 활활 태웠다."
_이종문의 <경북의 종가문화, 구미 여한 장현광 종가> 中
검성지 생태공원에 차를 세우고 화장실에서 땀을 씻고 귀로에 올랐다. 약목-선산로를 따라 중부내륙고속도로 선산IC로 들어서기까지, 낙동강 좌우로 금오산에서 뻗어 내린 긴 능선과 다봉산, 북봉산, 꺼먼재산, 접성산, 봉화산, 베틀산, 냉산, 청화산, 비봉산, 형제봉 등 높고 낮은 뭇 산들이 차창을 스쳐 지난다.
해 질 녘 비췻빛 하늘을 배경으로 또렷이 윤곽을 드러낸 그 산들의 능선은 늙은 부처, 젊은 부처, 얘기 부처, 길게 전신을 드러내고 누운 부처 등 하나같이 모두 부처의 모습을 닮았다. 마치 광활한 산천을 절집 삼아 천불상을 조성해 놓은 듯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아도화상이 천생산 북쪽 40여 리 지점, 냉산 아래 신라시대 최초의 사찰 도리사(桃李寺)를 지은 것은 우연이 아닌 듯싶다.
금오산의 낮은 산자락 위로 초승달이 가냘픈 얼굴을 내밀었다. 초승달은 벼들이 누렇게 익어갈 너른 상주 벌판을 지나고, 문경새재 첩첩산중 아래 뚫린 터널을 빠져나가고, 괴산과 충주의 경계를 지날 때까지 높은 산과 능선 뒤로 숨었다가 나타나길 반복하며, 숨바꼭질하듯 고단한 밤길을 외롭지 않게 동행해 주었다. 감곡을 지날 무렵 초승달은 능선 아래로 사라지며 작별을 고했다.
"비가 내리면 음 나를 둘러싸는
시간의 숨결이 떨쳐질까
비가 내리면 음 내가 간직하는
서글픈 상념이 잊혀질까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잊혀져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
스피커에서 반복 재생되는 김광석의 노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따라 부르며 고속도로의 긴 불빛 행렬에 속도를 맞추며 어둠 속을 달린다. 목적지로 설정해 놓은 '집'이 가까워 왔고, 내 가슴 속에는 벌써 만월이 된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