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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주 하나님을 즐거워하라!
(요한계시록 18:1-24)
[ 서론 ]
심판 또는 재판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어떤 이유에서건, 법정에 가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라면 어떨까요? 심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더구나 재판관이 모든 것을 알고, 한 치의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심판한다면 말이지요. 그 심판을 즐거워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바벨론은 역사 속에 있었던 나라 바벨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악한 질서와 제도, 권력도 바벨론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철저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백성,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즐거워하라”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은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을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우리가 즐거워하는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심판주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 세 가지를 들읍시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 폭력의 질서를 끝내는 심판 ]
심판주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폭력의 질서를 끝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폭력의 질서를 종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에게 환상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장면을 바꾸어 가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양하게 보여 주십니다.
1절에서 이번 장면을 보여 주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어두운 땅을 환히 밝히면서 크게 외치지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사실 이 장면에서, 바벨론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너지리라는 사실이 너무 확실해서, 이미 무너진 것처럼 과거 시제로 표현한 것입니다. “너 이제 죽었다.”라는 말을 하듯이 말이지요.
엄숙하고 무겁게 바벨론의 멸망이 선포됩니다. 2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 사람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고, 귀신과 더러운 영, 부정한 새들만 모입니다. 바벨론은 황폐하고 버려진 곳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건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질서와 세력은 너무도 강력하고 부요하기 때문이지요. 당장 요한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만 하더라도, 지금 박해를 받아서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요한을 유배 보내고, 세상의 질서를 꽉 쥐고 있던 로마는 어땠습니까?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자기를 신으로 높이며 숭배받고 있었습니다. 황제나 상인들의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상업 활동에서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상류층은 막대한 부를 누렸습니다. 이런 말이 돌 정도였습니다. “세상에는 원래 10개의 부가 있었는데 9개는 로마에, 1개는 나머지 세상에 나누어졌다.” 한 벌에 7억 원짜리 옷이 팔리는가 하면, 30억, 60억 원짜리 나무 식탁도 거래되었습니다. 12-13절에 사치품의 목록이 나옵니다. 12절에 “자주 옷감”이 있지요? 이 당시 자주색 염료는 “뿔소라”라는 조개를 통해 얻었습니다. 뿔소라 한 마리에 자주색 염료 한 방울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자주색 옷 한 벌을 만들려면, 도대체 뿔소라 몇 마리가 필요했을까요?
이런 막강한 힘과 부를 가진 로마의 질서는 폭력적이었습니다. 12-13절의 사치품 목록을 살펴보십시오. 뒤로 갈수록 점점 가치가 낮은 것들이 나옵니다. 이 목록의 가장 끝에 있는 상품은 노예입니다. 사람이지요. 사람을 상품으로 만드는 일, 가장 심각한 폭력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바벨론이 자기가 행한 대로 받는 심판이 무엇입니까? 고통과 애통함입니다. 영광과 부귀를 위해, 다른 이들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주는 것! 그것이 바벨론,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질서와 세력의 특징입니다.
이런 바벨론이 심판당한다는 소식! 결코 망하지 않을 것 같던 폭력적인 질서가 끝난다는 사실! 그 소식을 들은 요한과 성도들은 얼마나 큰 위로를 받고 기뻐했을까요? 바벨론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인내한 이들에게만 이 소식이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 폭력적인 질서가 끝난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으십니까? 그 사실이 여러분에게 즐거움이 되나요? 어쩌면 우리는 바벨론에 적응하고 너무 익숙해지지는 않았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위로와 기쁨이라고 여기지 못하지는 않을까요? 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 권력과 부와 안정을 얻고 있거나,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에 젖어 있지는 않을까요?
요즘 배송 서비스가 참 많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문한 상품이 곧장 집에 도착한 걸 확인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런 빠른 배송이 누군가의 과로와 적은 임금의 대가로 이루어진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자신의 편의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 경제적인 안정, 사회적인 지위를 보장해 주는 세상의 질서가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그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으십니까?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누군가를 향한 폭력과 착취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나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벗어나서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요. 다만, 우리가 몸 담그고 있는 문화를 분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고 즐기며 이용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하늘로부터 음성이 나와서 이야기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바벨론은 매력적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화려하고 값비싼 것으로 꾸민 음녀로 나오지요. 크고 견고한 성으로 불립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실체는 결코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매력적인 겉모습과 달콤한 말 뒤에 폭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질서를 사랑하지 마십시오. 바벨론을 즐거워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심판주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5절에서 바벨론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벨론을 심판하십니다. 본문의 심판은 제국이 또 다른 제국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애굽이 앗수르로,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 그 어떤 강대국과 문화와 경제체제로 대체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름다움과 견고함 뒤에 숨은 폭력적인 체제가 완전히 끝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에 나오는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들은 심판대로 멸망했습니다. 특히 역사상 바벨론은 다니엘이 심판을 해석하고 하루 만에 망해버렸습니다. 이제 바벨론을 포함하여 여러 나라들이 가리키던, 세상의 폭력적인 질서가 심판을 받아 망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심판주 하나님을 즐거워합시다. 하나님은 폭력과 착취를 행한 이들에게 합당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모든 폭력과 착취를 끝내버리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에 동참하지 않고 인내한 이들을 기억하고, 기쁨을 주십니다. 20절입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바벨론을 사랑하지 않고 인내하는 이들만이, 심판주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 무력한 자기 중심성을 밝히는 심판 ]
심판주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둘째,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무력한 자기 중심성을 폭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 중심성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바벨론,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질서의 또 다른 특징은 자기 중심성입니다. 다른 말로 교만, ‘이기적인’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지요.
7절을 보십시오. 바벨론은 자기를 영화롭게 하며 사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7절 하반절입니다.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지만 로마 제국을 비롯하여 모든 제국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나라와 사람 중에, 영원히 세상의 중심이 된 이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벨론에 대한 장송곡, 즉 장례식에 부르는 노래가 세 번 나옵니다. 사람들이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 탄식합니다. 10, 16, 19절에 나오지요. 장송곡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표현 중 하나가 “한 시간에”입니다. 여기서 한 시간은 “60분”이 아니라 “순식간”이라는 뜻입니다. 권세와 부귀를 자랑하던 바벨론이 순식간에 심판을 받아 망해버렸습니다.
이처럼 자기 중심성은 자기를 영원히 지킬 수 없기에 무력합니다. 그 누구도 영원히 세상의 중심을 차지할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수명은 유한하고, 권력과 부귀는 다른 이들이 차지해버립니다. 영광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통해 하나님만이 영원한 세상의 중심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또 한 가지, 자기 중심성은 하나 됨을 누릴 수 없게 하기에 무력합니다. 본문에는 바벨론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세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9절에 “땅의 왕들”이 나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바벨론과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사람들입니다. 즉,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고, 그 질서를 잘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우상으로 섬기던 사람들이지요.
11절에는 “땅의 상인들”이 나옵니다. 이 세상의 욕망과 사치를 부추기며, 경제를 움켜쥔 사람들입니다. 17절에는 “선장, 선객, 선원,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세상의 질서를 확장하며 막대한 부를 누리던 사람들입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바벨론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슬퍼하고 놀라며, 장송곡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들이 장송곡을 부르는 장면을 잘 살펴보십시오. 10, 15, 17절에서 이들이 장송곡을 부르는 위치가 어떻습니까? 그들은 “멀리 서서” 장송곡을 부릅니다.
장례식에서 입관이나 하관 때, 고인을 사랑하던 사람은 고인에게 가까운 곳에 섭니다. 그런데 땅의 왕들, 상인들, 뱃사람들은 멀리 서서 장송곡을 부르지요. 그 내용을 보면 바벨론의 고통을 슬퍼하기보다는 두려워합니다. 그와 같은 고통이 자기에게도 닥칠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특히 11절을 보십시오. 땅의 상인들이 울고 애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그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주고객 바벨론이 망해버려서, 자신이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기 때문입니다. 바벨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그 누구도, 바벨론을 사랑하거나 그를 위해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벨론이 당한 심판 앞에서, 그 관계가 얼마나 계산적이고 쉽게 끊어낼 수 있었는지가 드러나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내용도 전혀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자기 중심성이 얼마나 무력한지 보입니까? 우리는 세상과 자기 삶의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중심성은 회개를 방해하며,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내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깊은 관계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심판을 통해 자기 중심성의 무력함이 폭로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이기적인 장송곡만이 들릴 뿐이지요.
오늘날 점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의 습관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가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된다는 입장이지요. 이를 “표현적 개인주의”라고 부릅니다. 큰 권력이나 재산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 살겠다는 태도입니다. 바벨론이 ‘폭력’과 ‘착취’로 큰 범위에서 자기 중심성을 만족시키려고 했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자유’와 ‘독립’을 통해 개인적으로 자기 중심성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독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만든 기계를 사용하고, 누군가 형성한 조건 위에서 생활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웃과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홀로 사는 삶,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사는 삶을 미화하는 말들을 분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력한 자기 중심성을 폭로합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중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과 존귀를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적당히 거리를 두는 관계가 아니라, 영원히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사귐이야말로 영원한 관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평화의 나라를 이루는 심판 ]
심판주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 평화의 나라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가 평화의 나라를 누리는 바탕이 됩니다. 사실 앞서 들은 두 가지, 즉 폭력적인 질서와 무력한 자기 중심성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때로 피해자가 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착취하는 폭력적인 질서의 덕을 봅니다. 또는 피라미드의 상층에서 권력, 부귀, 안정, 인정 등을 얻고자 하기도 하지요. 또한 우리는 자기 중심성의 늪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처와 손해를 피해가기 위해 관계에서 자주 계산을 하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합당한 것은 위로와 기쁨이 아니라, 심판과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바벨론과 연합한 땅의 왕들, 상인들, 바다 상인들과 같은 취급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다시, 20절입니다.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이어서 21절에서 힘 센 천사가 나타나서 큰 맷돌 같은 돌을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큰 성 바벨론이 이렇게 격하게 던져져서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22-23절에는 바벨론 안에서 들리지 않을 것과 보이지 않을 것들이 나옵니다. 바벨론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삭막한 곳이 됩니다. 어떤 세공업자도 보이지 않기에, 더 이상 사치품도 생필품도 사고 팔 수가 없습니다. 맷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먹을 거리가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밤을 밝혀 주는 등불 빛이 없고, 어두움과 두려움만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사랑과 생명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벨론이 이렇게 된 이유가 23절 하반절-24절에 나옵니다. 첫째, 바벨론의 상인들이 폭력적인 질서를 이용하여 땅의 왕족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벨론의 복술, 즉 마술로 만국이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중심성이라는 우상숭배 문화를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셋째, 선지자들, 성도들,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바벨론은 더 이상 보이지도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폭력과 자기 중심성이 사라진 세상! 그곳에 우리 역시 즐거워하며 영원히 살 것입니다. 왜 우리가 심판받지 않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며 살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심판받으신 심판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자에게 심판이 아니라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27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인자됨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되셔서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하나도 단 한 톨도 남김없이 대신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세상을 만드셨고 다스리시며 소유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온 세상의 왕이 종이 되어 십자가에서 조롱을 받으며 죽으셨습니다. 만물의 주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나체로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잃으셨습니다.
바벨론이 받을 최후의 심판 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한 최종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이들에게 내려질 판결은 “무죄!” “의로움!”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8:1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바벨론에서 나오는 길, 그 죄에 참여하지 않는 길, 그 재앙을 받지 않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둘 중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벨론 안에 거하거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거나!
우리 대신 심판받으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평화의 나라를 앞당겨 누립니다. 바벨론과 정반대의 나라입니다. 이웃을 착취하여 부를 쌓지 않고, 나의 소유와 힘으로 섬기며 형제자매를 부요하게 하는 나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나라! 계산하기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처럼 바로 여기서부터 평화의 나라를 누려갑니다. 우리가 받을 심판이 없기에, 또한 바벨론에 최후의 심판이 내려질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며, 이 땅에서 평화를 누리고 나누어가시길 바랍니다.
특히 교회에서 서로를 섬기며 깊이 사랑하는 경험을 쌓아가시길 바랍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폭력과 착취가 아니라, 섬김과 사귐의 기쁨을 누려가시길 바랍니다.
[ 결론 ]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심판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합니다. 심판은 우리에게 즐거운 소식입니다. 이 세상의 폭력적인 질서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성이 무력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평화의 나라를 앞당겨 누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3절에는 바벨론에서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본문 바로 뒤, 19장에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나옵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 대신 심판받으신 우리의 왕, 우리의 신랑과 함께 영원히 기뻐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벨론에 대한 장송곡, 애가가 이기적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하지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는 혼인 축가, 사랑의 노래 아가가 장엄하면서도 아름답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 노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기다리며 인내하고 평화를 이루어간 우리를 위한 노래입니다. 함께 요한계시록 19:6-8 인용된 부분을 읽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6...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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