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몬인의 생활 방식가 관련해 가장 논란이 많은 것은 그들이 농경에 기여했을 가능성이다.
조몬인의 유적지에서는 지금도 일본에서 야생종으로 자생하지만
작물로도 재배하는 식물들의 잔해가 흔히 발겨된다. 팥과 녹두와 피가 대표적이다.
조몬 시대의 잔해에는 그러한 작물과 야생 원종을 구분 짓는 형태적 특징이 명확히 남아 았지 않다.
따라서 그 잔해의 원래 식물이 야생에서 채집한 것인지 의도적으로 재배한 것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다.
유적지에는 일본에서 현재 자생하지 않지만 먹을 수 있거나 유용한 가치 때문에
아시아 본토에서 건너온 게 분명한 식뭄종의 잔해도 있다.
메밀과 멜로, 호리병박과 삼,(양념용) 차조기 혹은 매기풀이 표적인 예이다.
기원전 1200년경, 즉 조몬 시대가 끝날갈 무렵
쌀과 보리, 좁쌀, 기장 등 동아시아의 주곡이 나타나기 시작햇다.
이런 작은 단서들을 종합하면 조몬인이 화전농법을 시작한 듯하지만
그렇게 우연히 행한 농경은 그들의 식생활에서 작은 부분을 차지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까지 언급한 식량 하나하나가
조몬 시대에 일본 전역에서 식량원이었다는 생각을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견과류가 풍부한 일본 북부에서, 견과류 저장 웅덩이는
해안에서 상냥한 물개 및 해산물과 더불어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반면 견과류가 많지 않은 남서부에서는 조개류가 더 중요한 먹거리였다.
조몬 시대에는 지역별 식단, 심지어 개별 식단의 특징이 다양했다.
예컨대 한끼니가 고스란히 보존된 흔적을 보면,
조몬인은 밤 가루와 호두 가루, 돼지고기와 사슴고기와 피(blood), 새알을
다양한 비율로 섞어 고탄수화물 쿠키나 고단백 버거를 만들어 먹엇다.
최근까지도 아이누족 수렵.채집민은 도자기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고
계속 끓이며 그 안에 온갖 것을 넣엇다.
아이누족의 조몬인 조상도 동일한 지역에서 똑같은 것을 먹으며, 똑같은 식으로 살았을지 모른다.
앞에서 언급했듯 거의 1미터에 달하는 토기를 보면
조몬인은 수렵.채집을 하면서도 떠돌아다니지 않고 정주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정주 새활을 했다는 증거는
무거운 돌연장, 몇번이고 수리한 흔적이 보이는상당한 규모의 반지하 주거지,
100여재 이상으로 형성된 큰 마을, 및 공동묘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오늘날의 수렵.채집민은 몇 주 단위로 터전을 옮겨다니며
비바람을 막을 정도로 간단한 오두막을짓고 ,
소유물을 간펀하게 후대할 수 있도록 최소화하는 삶을 살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조몬인의 생활 방식과는 매우 다르다.
요컨대 조몬인은 생활 중심지로부터 멀지 않은곳에
다양한 식량원을 구할 수 있는 숲, 강과 해안. 만과 드넓은 바다가 있어
수렵. 채집에 의존하먄서도 정주해 살 수 있엇다.
조몬인은 수렵.채집민으로는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특히 견과류가 풍부하고, 연어가 회귀하며, 생산성 높은 바다가 있는 일본 중부와 북부에서 살았다.
조몬 시대 일본의 총인구는 25만 명에 달했던 것 같다.
물론 현재 일본 인구에 비교하면 하찮은 정도이지만,
그들이 수렵 .채집민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인상적인 수치이다.
그들에게 필적할 만한 수렵/.채집민으로는
태평양 북서부 해안과 캘리포니아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도 견과류가 풍부한 숲, 연어가 회귀하는 강, 생산성 높은 바다가 삶의 터전이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이는 인간사회의 수렵 진화(convergent evolution.계통적으로 관계없는 생물들이 외견상 서로 닮아가는 형상)를
뚜렷이 보여주는 예이다.
이렇게 조몬인이 가졌던 것을 강조하자면 그들에게 없었던 것에 대해서도 명확히 해야 한다.
조몬인이 집약적인 농경을 시도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농경을 했는지조차 미심쩍다).
또 개를 제외하면 가축도 없었다.(돼지가 확실히 있었는지도 미심쩍다).
금속연장과 문자와 옷감도 없었다.
조몬인의 마을과 공동묘지에는 화려하게 장식한 집이나 무덤도 없었다.
모두가 소박하고 대부분 획일적인 형태를 띠었다.
따라서 사회가 군장과 평민으로 계층화되지도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 양식이 지역적으로 달랐다는 사실은
정치의 중앙집권화와 통일을 향한 노력이 없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모든 부정적 특징은 겨우 수백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중국 본토 및 한국의 당시 사회와 뚜럿이 대비되다.
하지만 기원전 400년 이후 대대적인 변화가 일본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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