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남매부의 맹세비, <청수동맹비>
또 하나의 역사적 비석이 있는데, 바로 조캉사원 앞에 783년에 세워진 <청수동맹비>이다. 장안점령 이후 두 나라의 힘겨루기가 대충 마감되자 전세는 소강상태로 고착되며, 왕족들의 혼인과 불교를 통한 교류를 통해 우호를 증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그 결과로 첫 번째 평화조약을 맺고 현 감숙성 청수현에 비석을 세우게 된다. 그 비문에 이르기를,
이제 두 나라가 지켜야 할 경계를 정하노니 황하 북쪽으로는 신천군(新泉軍)에서 대사막까지, 남쪽으로는 하란산(賀蘭山)의 낙타령(駱駝嶺)까지로 한다. 경주(涇州)에서 서쪽으로 탄쟁협(彈箏峽)까지, 농주(隴州)에서 서쪽으로 청수(淸水)까지, 봉주(鳳州)에서 서쪽으로 동곡(同谷)까지, 검남서산(劍南西山) 대도하(大渡河)의 동쪽은 당나라의 땅으로 하며 투뵈에서 지키고 있는 여러 만족(만족: 蘭, 渭, 原, 會, 西州) 땅에서 임조(臨洮), 동쪽으로 성주(成州), 검남 서쪽 경계, 대도하 서남쪽은 투뵈의 땅으로 정한다. 그리고 조약문에서 명시된 곳이 아닌 곳은 투뵈의 병마가 있는 곳은 투뵈가, 당군이 있는 곳은 당이 지키되 서로 경계를 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병마가 없던 곳을 먼저 점거하면 마땅히 성을 쌓고 곡식을 뿌려야 한다.
이 경계를 사이로 동쪽은 당의 영토로 하며 서쪽은 투뵈의 영토로 한다. 이 경계의 양쪽에는 앞으로 더 이상의 전쟁과 적대적인 침범과 영토의 강탈이 없을 것이니, 당에서는 중국인이 행복하게 살 것이며 투뵈인은 티베트 땅에서 행복을 누리고 살 것이다.
조금 복잡해 보이는 내용이지만 두 나라 땅 경계의 기준선이 대도하(大渡河)라는 사실만 파악하면 위의 설명은 당시의 지도를 참조하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이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투뵈의 영토는 지금의 티베트의 거의 약 4배나 되는 광대한 영역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당시 투뵈의 국력이 얼마나 강대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레 사진 설명>
어제(2016년 9월 23일) 매주 금요일마다 출강하는, 포카라 인근 티벳난민촌 안의 'MT 카일라스학교'에서 아이들과 몇 시간 씨름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출출하여 학교입구 매점에 들려 차 한잔에 점심 겸해서 '엘로파핑(메밀말이)'라는 간식을 먹게 되었는데, 그 테이불에 놓인 책자 뒷면에 사진 한장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청수동맹비' 사진이었다. 비석 몸체 왼쪽과 오른쪽에는 각기 " 갸 갸윌 나 끼~ 뵈 뵈윌 나 끼~" 라고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직역하면 "갸(중국인)은 갸윌(중국 땅)에서, 뵈(토번인-티벳인)는 뵈윌(토번땅)에서 행복하게 산다."
순간 먹던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가 않았다. 바로 2003년 출간한 <티베트의 역사산책>에서 내가 번역한 그 구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많이 부족한 졸저의 옛 번역을 바로 잡기 위해서 다시 재역하여 올린다.
<뵈 랑쩬(티벳 자유)> 잡지 위에 놓인 내 간식 '노란파핑'> 다음에 가면 '흰 파핑'을 힌 번 먹어 봐야겠다.
졸작 <장경회맹비 인상> 2008년작
티벳 라싸에 내 분신으로 남겨놓은 내 강아지는 "狗子無佛性" 이란 話頭를 깨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