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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 618년 - 907년)수나라(隋) 이후 건국된 중국의 왕조이다.
건국 [편집]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수나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을 세워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당의 발전 [편집]
건국 당시 당나라는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려 돌궐의 요구에 여러차례 굴복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돌궐에 내분이 일어나자 당과 돌궐의 관계는 역전된다. 당 태종 이세민은 고창국과 비단길일대를 장악하고 돌궐을 정복하여 당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한 조세제도와 토지제도, 군사제도도 정비하였다. (조용조)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당나라 시대의 율령 체제가 완성되었다. 태종의 이러한 치세를 두고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부른다.
당나라는 이후 잠시 쇠퇴 하였다가 현종이 즉위하자 당나라는 다시 전성기를 누리는 데 이를 개원의 치(開元之治)라고 한다. 이 시기는 서방의 조로아스터교, 경교가 전래될 정도로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띠었다. 현종은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조운(漕運) 개량과 둔전(屯田) 개발 등으로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부병제(府兵制)의 붕괴에 대처하여 신병제를 정비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켰다. 또한 밖으로는 동돌궐(東突厥),토번(吐蕃),거란(契丹) 등의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당의 멸망 [편집]
토번, 돌궐 등의 이민족의 침략 등으로 국력이 약화된 당나라는 현종 재위 말기부터 귀족들의 장원토지가 증가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755년에는 안·사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통치력을 매우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이 되었다.
결국 당나라는 조세 제도는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뀌었다. 수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 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정치 체계 [편집]
당나라는 3성 6부제를 실시하여, 3성은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 상서성(尚書省)으로 나누고, 6부는 이부(吏部), 호부(戶部), 예부(禮部), 병부(兵部), 형부(刑部), 공부(工部)로 나누었다.
율령 체제는 당나라의 행정법으로써 당나라 통치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다. 3성 6부로 이뤄진 통치 조직과 지방에 설치된 주,현 체제로 인해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지방관리는 중앙에서 파견하였다.
토지제도는 균전제였고 조세제도는 조용조, 군사 제도는 부병제를 실시했다.
경제와 사회 [편집]
당나라는 귀족중심 사회였고 그들은 과거와 음서라는 제도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당나라 때는 차가 처음으로 재배되어서 해외로 많이 수출됐다. 또한 화북 지방에는 2년 3모작이 가능하게 되어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고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비단길을 통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상업이 발달하고 양저우 같은 도시들이 크게 성장하였다. 또한 화폐 유통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어음인 비전이 사용되었고 행이라는 상인 조합도 생겼다.
문화 [편집]
과거 제도에서는 유교에 관련된 서적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했다. 그래서 유학과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당나라 때에는 훈고학이라는 것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로 인해 사상의 획일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문학 역시 귀족 중심의 시가 발달하였는데 이백과 두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종교적으로는 불교가 매우 발전하였고 현장이 지은 대당서역기라는 책은 인도와 동남 아시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나라 때는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마니교 등도 전파되었다. 도교는 황실의 지원을 받았다.
아시아 각국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도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에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하여 당나라 문물을 수입해갔다.
역대 황제 [편집]
690년에서 705년까지는 측천무후가 무주의 황제로서 통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