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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죽기 전 경험했던 천국
마17:1-9 베후1:16-18
지난해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차례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김태현(26)에게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김태현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관문 초인종을 눌러“띵동, 계세요?" 택배기사로 위장하여 집에 들어가서 여성과, 여성의 여동생, 어머니를 차례로 살해했다. 김태현은 만남 거부 후 교제 단절을 통보한 것에 앙심에 분노해서 스토킹을 하다 치밀하게 살해를 계획하고, 아무런 잘못도 없는 가족들까지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점에서 2014년‘대구 중년 부부 살인사건’범인 장재진(32)을 떠올리게 한다. 장재진의 경우는 2014년 5월 20일. 대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이 그 아파트 화단에 19세 여성 A씨가 추락해 있는 걸 발견해서 경찰에 신고했고, A씨는 병원으로 가던 구급차에서“빨리 우리 집으로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경찰이 집에 들어가자 A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참혹하게 살해당한 상태였다. CCTV를 확인한 결과, 장재진이 엘리베이터 안에 공구통을 들고 서 있는 장면, A씨의 추락 직후 피 묻은 수건으로 손을 감싸고 아파트를 빠져나가는 장면이 확인되면서 인근 거주지 빌라에서 장재진이 체포되었다. 경북의 한 대학에 다니던 장재진은 동아리 총연합회 회장을 하며, 피해자 A씨와 2014년 2월부터 두 달 남짓 교제하다가 A씨가 폭행을 당하면서 결별을 통보받았으나 장재진은 결별을 받아들이지 않고 학교에서 A씨의 뺨을 때리고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밟고, 자취방으로 끌고 가 또다시 때려 상해를 입혔다. 이에 피해자 A씨의 부모가 장재진의 부모에게 항의했고, 장재진은 휴학하게 되었지만 한 달 후 장재진은 A씨에게 따졌고, A씨의 부모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살해 계획은 끔찍했다. 장재진은 살해 도구를 준비하고, 피가 흐를 때 더 이상 흐르지 않도록 밀가루 한 포대도 구입했다. 자신이 다치면 치료에 사용할 소독약과 붕대까지 샀다. 장재진의 수첩에는 A씨의 아파트 주민 호수를 쭉 적어놓고 다른 집 주민들의 가짜 사인도 받았고“띵동, 계세요?”라는 대사까지 적혀 있었다. 아파트 전체가 배관수리 중이라며 A씨의 집에 침입하기 위해서였다. 장재진은 배관수리 하러 왔다고 속이고,A씨 집에 침입해 화장실 문을 잠근 다음 칼과 망치로 끔찍하게 살해했다. 장재진은 목발을 짚은 채 도망가던 A씨의 아버지까지 쫓아가서 현관 앞에서 망치로 머리를 내리쳤으나 곧바로 사망하지 않았음에도 이불로 덮고 방치해서 결국 사망하게 만들었다. 장재진은 어머니 전화기로 마치 어머니인 것처럼 A씨에게“성년의 날 선물을 준비했으니 빨리 오라”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장재진은 A씨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오자 A씨가 어머니의 시신을 보고 소리를 지르자 조용히 하라며 전신을 때렸다. A씨는 장재진을 피해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면서 경비원에게 발견되면서 이 사건이 알려졌다. 이 사건을 취재한 권일용 프로파일러는“여러 사건을 봤지만 이렇게 치밀하게 대사와 소품까지 준비하는 범죄자는 드물다. 법원은 장재진이 피해자를 9시간 정도 부모 시신과 함께 감금했고, 잔혹한 범행으로 일반 국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고, 재범 위험성도 크다는 근거로“양형 기준을 아무리 엄격히 적용해도 사형 선택이 정당화될 수 있다”라며 사형을 판결했다. 1990년생 장재진은 대법원이 사형 원심을 확정하며 28세의 나이로 최연소 민간인 사형수가 됐다. 우리 사회에서 최근에 발생했던 살인사건들을 보노라면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한다면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살인을 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든다.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천사의 마음에서 마귀의 마음까지 품을 수 있는 것이 이런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악한 살인을 저질렀다 하여도 그가 죽기 전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다면 그도 죄용서 받고 천국을 갈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보내셨던 예수님의 사랑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천국을 믿지도 않으면서도 쉽게 천국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바로 위에서 일어났던 불의의 살인사건으로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면 남아 있는 유가족들의 슬픔을 위로하고자 잊지 않고 하는 말들이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돌아가신 분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계시니 이렇게 슬픔을 보이면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 이제는 슬픔을 거두고 위로 받으라는 인사를 한다. 물론 그런 말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갑자기 당한 슬픈유족들을 위로하기엔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국은 확실히 실존하는 곳이지만 이 땅에서 아무리 애석하게 죽었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곳은 천국보다는 불타는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이‘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라’는 말씀이시다(마4:17). 회개라는 말은 세상에서 돌아서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것을 말한다. 성경 66권 핵심은 사람들이 예수님 믿으면 죄사함 받고 죽은 후 천국에서 영생하지만 믿지 않으면 불타는 지옥에서 영벌을 받는다는 것인데 문제는 살아있을 때 어느 누구도 천국이나 지옥을 갔다 올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심으로써 사람들은 천국에 대해선 소망을 갖게 되었고 지옥에 대해선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여 천국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구원받은 성도들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고자 오셨는데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경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과 함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천국을 말씀하셨는데 천국의 가치는 인간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므로 천국에서 오신 예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천국을 여러 가지 비유로 이야기 하셨지만 인간이 가진 이성으로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은 주님의 제자들 중 요한 야고보 베드로 셋사람이 이 땅에서 천국이 임하였던 장면이 연출된다. 천국의 권능이 잠시 임한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것을 성경에 기록하여서 천국의 실존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는 말씀이다. 과연 이 땅위에 임하였던 천국을 경험한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천국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천국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주신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예수님에 관한 중요한 몇 가지 사실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약 800년전 이사야 대언자는 예언하기를 예수님은 처녀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실 거라고 했습니다.
(사7:14)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뉴엘이라고 예언했는데 임마뉴엘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마1:23)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전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몸이 변형되신 사건입니다. 제자 3명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나면서 예수님이 변형되시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셋째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입니다. 죄값은 사망인데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부활입니다. 부활이란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이야말로 전 인류의 소망입니다. 지구에 인간이 살아온 이래 이런 부활을 보여주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부터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죽게 될 것이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마16:21) 그분 말씀하신대로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망권세를 이기신 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는 승천과 재림입니다. 땅에 사는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인데 인류역사상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노아의 홍수전 에녹과 그 이후 엘리야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정말로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확실히 죽으셨고 확실히 죽은지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신 후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번 나타나 부활의 몸을 보여 주신 후 마지막은 제자들과 사람들 오백명정도가 보는 앞에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려가신 것을 성경에 기록하였습니다.
(행1:9-11)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눅24: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성경은 진리이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승천도 재림도 믿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모두가 헛된 소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믿고 안믿고는 자신의 선택이지만 세상 끝날 목자 앞에서 양과 염소가 분리되듯 믿는 자와 불신자가 구별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신다고 믿는 사람들은 세상 끝날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생애의 중요한 사건 가운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사 변형되신 것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이미 삼년이 지나 마지막을 향해 가는데 이스라엘의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정점으로 예수님의 발걸음은 십자가를 향해 한발자국씩 예루살렘을 향해 옮겨지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 기슭에 있는 성읍이다. 로마는 이곳을 헤롯 빌립보에게 하사하였는데 헤롯대왕의 아들인 빌립보는 로마 황제 칭호인 가이사랴와 자신의 이름인 빌립보를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 가이사랴 빌립보하면 이방신전과 로마황제신전이 있는 우상숭배 도시인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라 빌립보 지방에 들어오사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제자들 중 어떤이들은 주께서 침례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다른 어떤 이들은 에레미야라고 하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마16:16-17) 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매 1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것을 네게 계시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는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주님이 듣기를 원하셨던 고백을 들으시고 너무나 기쁘셨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앙고백은 결코 쉬운 말 한마디가 아닌 목숨을 건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가이사라 빌리보에는 이방신의 신전과 로마황제의 신전이 있는 곳이므로 목숨 건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야말로 성령님에 의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이때부터 비로소 자신의 죽으심을 말씀하셨다.
(마16:21)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날 다시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하시니.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성질 급한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베드로는 강하게 예수님의 죽으심을 만류하기를 이일이 결코 주께 임하지 아니하리이다(22)라고 만류하였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호된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23).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24).하시면서 제자들의 신앙교육을 새롭게 전환시켰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는 지금까지 가졌던 야망이나 꿈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건설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저마다 한 자리를 차지할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고자 하면 자기 생각, 자기 꿈을 포기하라고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구원 받는 다는 것인데 제자들은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을”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형을 받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날마다 자기 성화의 삶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 지상의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며 이 땅에서 건설될 메시아 왕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큰 자인가 서로 논쟁도 하였고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건설할 왕국이 언제인가? 질문도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아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또한 나무에 달려 십자가에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 받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런 제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든 그들의 생각을 바꾸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예수님과 자신들이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얼마 후면 오순절에 신약교회 모습이 드러나게 될 때 제자들은 교회의 기둥으로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현 수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연약함을 잘 아셨습니다. 로마로부터 해방된다는 유대교의 메시야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메시야가 죽고 부활함을 확실한 방법으로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사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영광스런 체험을 통해 그들이 유대교의 메시아관에서 벗어난 바른 메시야관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신 목적에 대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변형되신 예수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지
(마17:1)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사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신지 확실한 체험을 주고자 변형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하셨는데 이 높은 산은 신학자들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변화산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제자 셋을 데리고 그저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기 때문에 확실한 이름을 알 수는 없으나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가버나움에서 가장 가까운 588m인 타보르산은 갈릴리호에서 서쪽으로18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데 현재 타보르 산 정상에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하고 대화하였다고 하여서 로마카톨릭교에서 세운 예수의 변화기념교회와 그리스 정교회가 세운 엘리아 기념교회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타보르산이 바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였던 산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을 바로 보는 사람들은 높은 산이 영적으로 높은 산이 아닌 실제 높은 산이며 그 산이 바로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헤르몬 산으로 추정한다. 이 헤르몬 산은 베드로가 신앙고백하였던 가이사라 빌립보 지방에서 서쪽으로 약 4km정도에 떨어져있는 산으로 2814m 산이다. 헤르몬 산의 정상에는 일년 내내 눈이 덮여 있으며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갈릴리 호수로 흘러들어가고 요단강을 이루며 이스라엘 전체를 풍요롭게 하는 축복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마17:1-2) 1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취해 따로 그들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사 2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매 그분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그분의 옷이 빛같이 희게 되었더라.
예수님께서 이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갑자기 변형되셨는데 얼굴이 해처럼 밝은 빛으로 또한 예수님의 입으신 옷도 빛과 같이 하얗게 변형되는 것을 보는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이 세명의 제자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셨다고 하셨는데 마치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는 것 같은 의미로 예수님은 이제가지 본 모습과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 하면 육의 사람이 하늘에서 온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서 대화하려면 예수님이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제자들은 산에 오르느라고 피곤하였는지 곧 잠들었다가 예수님의 대화소리에 깨보니 예수님이 변형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이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얼마나 놀라워하였을까? 조금전 산에 같이 올라오셨을 때 주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빛속에 감추어진 예수님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활하신 주님을 막달라 마리아가 만났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3일 전에 만났던 예수님을 보고도 몰라보고 동산지기라고 착각하였던 것처럼 졸다가 깨어난 제자들도 변형된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라워하였는가 생각을 해봅니다. 이 변형된 모습은 예수님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얼굴로부터 해같이 광채가 나왔으며 또 몸에서 나오는 광채로 인하여 그 옷이 빛같이 희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광채가 얼마나 큰지 그 어떤 세탁하는 사람도 그 옷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옷에 반사된 광채가 그 정도였으면 실제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광채는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능합니까? 변형되신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본래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과 늘 교제하며 살아가면 예수님 얼굴에 나타난 광채가 우리에게도 반사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삶은 죄를 멀리하고 늘 성화된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듯이 우리가 빛에 거하면 어둠은 물러가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안짓겠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면 자연스럽게 죄짓는 것은 멀리하게 됩니다.
2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다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햇빛같이 빛나고 있었는데 이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BC1443년경에 살았던 이스라엘백성을 출애굽시킨 모세는 BC1400년 전에 죽었고 그 무덤은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 때 활동한 엘리야는 800년 전의 사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였습니다(왕하2:11). 모세와 엘리야들 조차도 600년의 시간차를 두고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높은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온 구약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죽은 사람들이나 혹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오직 여기 변화산 위에서 과거에 이 땅에 살았던 두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대화하였던 사건은 정말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셨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했다는 이런 이야기는 어떤 공상적인 이야기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인데 지금 제자들의 눈에 펼쳐진 변화산상에는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였습니다. 천국이 제자들의 눈앞에 보여진 것입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했던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왜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났을까? 그것은 눅가복음에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눅9:31) 그들이 영광중에 나타나서 앞으로 그분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셔야 할 그분의 별세에 관하여 말하였으나
모세와 엘리야는 앞으로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낸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마17:1-2절에서 보면 엿새 뒤, 높은 산, 영광 된 모습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선지자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였습니다. 구약에는 메시야가 오시는 것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신18:15) 주 네 하나님께서 네 한가운데서 곧 네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니라.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나 곧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곡하듯 그를 위하여 애곡하며 사람이 자기의 처음 난자를 위하여 쓰라리게 슬퍼하듯 그를 위하여 쓰라리게 슬퍼하리로다.
예수님은 구약의 대언자들이 오리라고 예언하였던 그 메시야십니다. 모세의 글과 선지자들의 예언은 오실 메시아에 된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구약말씀을 통해 이를 증명하셨습니다.
(눅 24:27) 모세와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 .
예수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구약에서 대언자들이 오리라고 한 예언자가 예수님이었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메시아는 이 땅에서 죽어야 할 분이심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3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무슨 말을 했을까?
마태복음에는 이 부분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으나 누가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눅9:30-31) 30 보라 두 사람이 그분과 이야기 하는데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더라. 31 그들이 영광중에 나타나서 앞으로 그분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져야 할 그분의 별세에 관하여 말하였으나
여기서 별세라는 것은 세상을 이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이나, 사무엘이나 다윗같은 기라성 같이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1400년전 모세와 800년전 엘리야를 초청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재림에 관하여 먼저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문 앞에 둔 모압 땅에서 죽을 당시 모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34:5-7) 5 주의 종 모세가 모압땅에서 죽었으나 6 아무도 이날까지 그의 돌무덤에 대해 알지 못하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어둡지 아니하였고 타고난 힘이 줄지 아니하였더라.
이 말씀은 모세는 노환으로 자연사 한 것이 아닌데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무슨 말을 하고 엘리야는 무슨 말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운명에 관해서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했는가 하면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일지라도 육신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죽는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지만 육신적으로 생각할 때는 죽는다는 것이 싫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이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혼을 잃으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 혹은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혼을 대신하게 하겠느냐?.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별세에 대하여 모세와 대화를 나누셨는데 모세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나는 모압 땅에서 죽었지만 내 시체가 없어졌던 것처럼 아 당신의 시체는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과 다르게 당신은 이 땅위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시냐 그러니 십자가 지는 것에 대해 걱정 말고 십자가를 지십시요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또 모세는 예수님에 대해 예언하신 신명기 말씀을 들려주었을 것이라 생각도 해봅니다. 신명기 말씀이 사도행전3장에서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3:22) 진실로 모세가 조상들에게 이르되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희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그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너희는 그의 모든 일에서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선지자의 이름을 들면서 당신은 나 같은 선지자라 말하지 않았나 생각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선지자가 있었지만 별세를 앞둔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모세를 필요로 하였던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팔백년 전에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엘리야는 디셉 사람으로서 구약에 있던 모든 대언자는 최소한 5대 족보가 다 있는데 엘리야는 그저 아비가 누군지 어미가 누군지 마치 멜기세덱과 같이 족보가 없는 대언자였습니다. 그런 엘리야 대언자도 모세 못지않은 큰 기사와 이적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언자도 축복받지 못한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는 이 땅위에 다시 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말4:5) 보라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대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이로써 예수님의 별세를 앞둔 엘리야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누굽니까, 하늘로 승천한 사람 아닙니까. 말라기 선지자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나와 같이 하늘로 승천할 것이며 또 나같이 재림할 것입니다. 엘리야는 승천과 재림을 실제로 경험하였으므로 예수님의 별세에 관해서 힘을 실어 주었으리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선지자보다도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서 확신과 담대함을 주고, 승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상에 나타났고, 또 예수님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이미 1400백년전 또는 800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났던 저들을 만나기 위하여 그 얼굴이 빛처럼 변화되어서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질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많은 격려를 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에“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라는 외침을 통해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즐거이 지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4. 베드로가 요청한 장막 셋을 위하여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는 동안 제자들은 졸다가 깨어나니 지금 세 명의 제자들은 평생 보지 못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1400년 전 모세와 800년 전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간다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바울 베드로를 보는 순간 금방 알게 된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죽었던 모세가 어떻게 다시 나타날 수 있겠는가? 하늘로 올라갔던 엘리야가 어떻게 다시 보일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의 주님이시고 장차 우리들도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면 모세도 만나고 엘리야도 볼 것이겠지만 우리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나보게 될 줄 믿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눈으로 보고 또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장차 예수님이 어떠한 사역을 할 것인가를 알게 되었지만 졸다가 깨어난 베드로는 예수님께 마음에도 없는 요구를 하였습니다.
(마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온즉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여기에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게 하옵소서 하더라.
베드로의 장막 셋을 짓겠다는 요구는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도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했고 아무 생각없이 내뱉었던 베드로의 뜬구름 잡는 요구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고 있을 때에 처음부터 본 것도 아니고 잠결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눈을 떠 보니까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눅가복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눅9:32-33) 32 베드로와 또 그와 함께한 자들은 깊이 잠드니라. 그들이 깨어나서 그분의 영광과 그분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그분을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이르기를 선생님이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온즉 우리가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선생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게 하옵소서 하나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알지 못하더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자기가 한 말을 자기도 모르는 자가 장막을 짓겠다고 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누구인가 하면 성령을 받지 못하고 심령이 깨어 있지 못한 자들입니다. 짐승들도 때와 시기를 아는데(렘 8:7) 하물며 제자들은 때와 시기를 알지 못하고 여기에 장막 셋을 짓겠다고 엉뚱한 요구를 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지금이 어느 때인지 시기와 때를 분별하지 못하면 베드로처럼 여기에 장막을 짓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요청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엿새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면 안된다고 했다가 호되게 꾸중을 들었는데 방금 전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장막을 짓겠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눈 앞에 벌어진 천국의 영광에 도취되어 예수님이 가셔야 할 길을 깨닫지 못하고 장막을 짓고 그곳에 머물겠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도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베드로의 잘못은 현실에 안주하는 자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십자가를 져야하는 막중한 사명을 가지고 씨름하고 계시는데, 베드로는 눈앞에 펼쳐진 천국에 만족하여 그 자리에 머물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현실안주하는 평안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까지 이 땅에 살게 하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주신 사명인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잘 되고 형통하니까, 그냥‘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해 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니 한시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소홀이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결국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죽음을 앞두고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있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귀 기울여야 합니다.
(딤후4:1-2) 1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곧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령하노니 2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전도는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따라가야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습관된 신앙을 버리고 늘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5. 하나님의 음성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십자가를 지시는 별세에 대해 무관심한 채 횡설수설 할 때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마17:5)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보라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보라, 그 구름속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므로
베드로가 아직도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음성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면서 구름 속에서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라는 음성입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확신을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본질상 하나님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들이라는 표현은 육신적인 부모가 자녀를 낳는다는(born) 의미가 아닙니다.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begotten입니다. 이는 이 땅에 어떤 특수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즉 어떤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쓰이는 단어가 begotten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로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으라고 강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값을 속죄하고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러한 경험은 실로 엄청난 경험입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것들을 지금 세 명의 제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로만 들었던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도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일로 인해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마17:6) 제자들이 그 음성을 듣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더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으므로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마17:7) 예수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손을 대시면서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으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예수님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17: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들이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오직 자기들과 함께한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한동안 꿈과 같기도 한 엄청난 사건이 휘몰아 친 후에 남아계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종점은 결국 예수님 뿐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한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 앞에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바로 보기만 하면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율법과 예언은 그림자이고 예수님은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제자들을 위해 변형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마17: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날 때까지는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제자들에게 본 것을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실 때 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어설프게 말했다가 사람들에게 혼란만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예수님의 사역이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신 것입니다.
6. 베드로의 생애 중 가장 놀라운 경험
오늘 우리는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실로 엄청난 사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게 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형된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이미 아주 오래전에 죽었던 모세와 하늘로 승천했던 엘리야와 대화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연출의 의도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정말 믿을 수 있습니까? 입으로 수없이 믿는다고 해도 그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과 성품을 다해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에 대해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자신이 경험한 체험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벧후1:19~21) 19 또한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20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은 결코 어떤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21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자기들을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베드로의 변화산에서 체험보다 더 확실한 것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은 사람 개인적인 의견이나 주장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감동시키시고, 성령님의 의도대로 기록하게 하신 것이 성경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의 생각이 자리할 아무런 여지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깨닫게 하십니다. 베드로도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오셔서 그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온전히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시는 말씀을 깨닫는 것이 경험보다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가 경험한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성령님의 도움으로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많은 기적은 당시 뿐만 아니라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성경을 읽는 자마다 신비에 쌓이게 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에 감동을 받게 합니다. 특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의 얼굴이 갑자기 변형되어 태양과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예수님은 1400년전에 살았던 모세와 800년전에 살았던 엘리야와 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들 외에 어느 누구도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 제자는 그들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너무나 확실한 사건이라고 베드로는 변화 산상에서 예수님을 정확하게 베드로서에 증거 하고 있습니다.
(벧후1:16-18) 16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려 줄 때에 교묘히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며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니라. 17 뛰어난 영광으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그분께 나서 이르시기를 ,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18 하늘로부터 나온 이 음성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들은 것이니라.
제자들은 죽었던 모세와 승천했던 엘리야를 통해서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살았던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변화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면서 제자들은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가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하였으며, 하나님 나라, 영적인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 갇혀있는 관점에서 벗어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 세상과 자신들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베드로는 하늘의 왕국은 부활한 자들의 영원한 나라인 것을 다시금 마음에 굳게 믿으면서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님 죽으심과 부활이 자기자신을 위한 것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남은 생애동안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한다면 주님과 함께 그리고 거룩한 성도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