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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이사야(58)/왕
제목 : 하나님은 우리 왕이십니다!
성경 : 사 33:17~24
찬송 : 21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301 낙양교회 수요예배
사 33:17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
사 33:18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사 33:19 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사 33:20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사 33:21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
사 33: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사 33:23 네 돛대 줄이 풀렸으니 돛대의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사 33:24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28~31장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인간적인 계략으로 애굽과 같은 군사적인 힘을 의지하는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했습니다. 반면에 32~33장은 하나님이 참된 구원자로서 위기에 빠진 그들을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를 것을 권고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메시지를 마무리하면서 회복과 구원의 약속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과 달리 하나님은 참된 왕으로서 시온을 보호하시고 그 가운데 평화와 안전을 이루십니다. 그가 그 나라와 백성을 지키심으로 말미암아 원수들의 압제는 사라지고 단지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을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택하신 성읍 예루살렘은 온전히 회복되고, 더 이상 외적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며, 백성은 질병과 정죄에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자체로는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구원과 회복의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유일한 도움이신 주권자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를 앙망해야 합니다.
강력하고 자비로운 왕이 있다는 것은 백성에게 큰 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본문에서 한 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백성을 사랑할 뿐 아니라, 백성을 보호해 줄 능력까지 충분합니다. 대부분의 인간 지도자들은 백성 혹은 국민을 착취하고 이용하나, 본문에 소개된 왕은 그러지 않습니다.
√왕의 아름다움(17~19절)
우리는 늘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 33:17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사 33:17 너의 눈은 그 영광 중의 왕을 보며 광활한 땅을 목도하겠고(개역한글)
우리 왕은 인간 왕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인간 왕만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부름을 받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웃시야 왕이 죽고 왕좌가 비어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인간의 왕좌는 비어 있어도 하늘의 왕좌는 비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왕은 어려움이 오면 벌벌 떨고 또 고민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사울 때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골리앗이 40일 동안 조석으로 나와서 이스라엘을 모욕하면서 싸움을 걸어왔지만 아무도 골리앗을 대적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럴 때 누가 가장 먼저 나서야 하겠습니까? 사울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쳐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개미만도 못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바다를 말씀 한마디로 잔잔케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개미나 바퀴벌레가 많다고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발로 밟아 버리든지 약을 뿌려서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군대가 많고 무기가 현대화되어 있어도 이것은 인간들에게나 통하는 것이지 하나님에게는 전혀 두려움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범위가 어마어마합니다. 하나님은 땅 끝에 있는 군대를 불러 오시기도 하시고, 또 많은 군대를 돌아가게 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작전하시는 범위는 유다 왕이 생각하는 범위와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은 왜 평소에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했을까요? 하나님은 위기 때만 움직이시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평소에도 우리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늘 능력 있게 사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사랑하며 살면 됩니다. 말씀을 배우고 알아가는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이 모시기에는 너무 큰 분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성전을 만들고 우리 안에 부흥을 일으키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위기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함께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나타났습니다.
√사 33:18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칭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는 두려워하던 것들이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일로 회상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 질문들은 회상의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는 결국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수사의문문입니다. 세 가지 질문 속에 담긴 대상들은 그들이 과거에 두려워한 존재들입니다. ‘계산 하던 자’는 포로를 계수하는 자들이고, ‘공세를 계량하던 자’는 공물이나 전리품을 약탈해 가려고 계량한 자들이며, ‘망대를 계수하는 자’는 도시와 요새들을 파괴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전쟁의 공포 때문에 벌벌 떨면서 잡혀가기도 하고 세금도 내고 강제 노동도 해야만 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너무나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람 죽이는 것을 전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이 무서운 적들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치 몸에 있는 암 덩어리가 빠져 나가듯이 이 무서운 적들이 모두 한순간에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 33:19 네가 강포한 백성을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서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는 이렇게 백성을 압제하던 자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강포한 백성을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전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교훈을 멸시하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28:11)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이방 족속의 침략을 예견한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심판 후에 언어가 다른 이방 민족들의 침략과 지배를 받는 일이 없을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실로 크고 놀랍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을 물리치는 길은 하나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물리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나님만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안정된 처소 예루살렘(20~22절)
√사 33:20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 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치지 아니할 것이며
선지자는 이제 청중의 시선을 시온 성으로 향하게 합니다. ‘우리의 절기를 지키는 시온 성을 보라’ 그곳은 절기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서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며 경배하는 곳입니다.
출 23:14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출 23: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찌니라
출 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출 23:17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찌니라
이사야 1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 성에서 지켜지는 절기들에 대해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사 1:1-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형식적인 종교 행위만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29장에서도 하나님은 해마다 절기가 지켜지는 이 성을 치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29:1~3).
하나님은 신뢰하지 않고 헛된 계교를 꾸미며 이방을 의지하려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선지자는 시온이 회복되고 그곳에서 절기를 지키는 날이 올 것을 대망합니다. 예루살렘은 ‘안정된 처소’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18절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포로로 끌려갈까, 재산을 빼앗길까, 혹은 망대가 무너질까 두려워하던 과거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예루살렘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입니다. 장막은 원래 옮겨 다니기 위한 임시 처소로 말뚝을 박아 줄로 매단 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은 더 이상 이동할 필요가 없는 안정된 처소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안고 있는 어려움이 내 어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려움이 되게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친척들과의 갈등을 내가 책임지려고 하지 말고, 부채를 내가 끌어안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죽을 각오로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모든 것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안정된 삶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사 33:21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
개역 개정은 21절의 서두의 접속사 ‘키’(왜냐하면)의 번역을 생략하고 있지만, 이 구절은 앞 구절에 연결됩니다. 즉 예루살렘이 어떻게 그렇게 안정된 처소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높은 성벽이 있어서도 아니고, 또 백성이 이방과 맹약을 맺어 도움을 얻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곧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거기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므로 재난이나 사탄의 시험이 틈탈 수 없습니다. 비유를 들면, 이곳은 성 중에서 가장 안전한 성인데 큰 호수 옆에 절벽을 끼고 위치한 성입니다. 이곳은 적들이 배를 타고 올 수도 없고 육로를 이용하여 공격할 수도 없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북경에 가면 자금성이 있습니다. 청나라 때 궁궐인데 그 규모가 엄청 크기 때문에 자금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금성을 가보면 성 둘레에 ‘해저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골프장에 ‘해저드’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그 성을 보호하려는 지혜에서 만든 인공 수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 성은 오로지 초청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고 아무나 함부로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상하지 못한 적의 공격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깨어 기도하는 교회는 마귀가 공격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다 들통 납니다. 적이 기습 공격을 해야 타격을 받을 텐데 공격하려고 배를 만드는 동안에 성은 이미 방어 준비를 끝낸 상태입니다.
√사 33: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22절 역시 접속사 ‘키’(왜냐하면)로 시작합니다. 개역개정은 ‘대저’(왜냐하면)로 시작합니다. 이 성안에 계신 하나님은 삼권을 다 쥐고 계신 분이십니다.
옛날에는 왕이라고 불려도 알고 보면 다 같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왕은 행정권만 있었는데 신약 성경에는 그런 왕을 분봉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왕은 대개 추장 정도의 권력밖에 가지지 못했습니다. 재판권을 가진 왕은 좀 더 지위가 높았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절대군주는 입법권과 재판권과 통치권을 다 가졌습니다. 삼권을 가진 것입니다. 이 절대 군주가 이스라엘의 왕이시므로 교회를 공격하는 자는 반드시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직할 지역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의 죄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직할 지역인데 앗수르가 그곳을 공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만하거나 죄를 짓지 않는 이상 지금 누리는 축복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악한 자들이 갑자기 누명을 씌워 행복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곳은 왕의 도성이므로 그런 일은 왕의 귀에 바로 들어가게 되어 있고, 또 그런 악한 짓을 한 자를 왕이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삼권을 쥐고 계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왕이 우리와 함께 하는 한 우리의 안전은 확실하게 보장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줄 풀린 돛대의 승리(23~24절)
√사 33:23 네 돛대 줄이 풀렸으니 돛대의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사 33:24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돛대가 튼튼하고 강해야 돛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돛대 줄이 풀렸다고 합니다. 이 돛대는 남 유다를 말합니다. 남 유다는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돛대 줄이 풀린 배처럼 준비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데 어떻게 제구실도 못하는 배가 잘 정비된 전투선을 이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유다가 대적의 전리품을 차지할 수 있을까요? 남 유다가 자력으로 전쟁에서 이길 확률은 제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서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유다를 위해 일어나셨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앗수르를 굴복시키셨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배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탈취물을 나눌 수 있고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육체적인 질병도 고침을 받고 영적으로도 사죄의 은혜를 입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길 때 이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왕이 통치하느냐에 따라 백성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상적인 왕은 백성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 줄 능력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이 조건을 충족시키십니다.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그의 백성답게 하나님만을 섬기고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