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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예레미야 23장 23절로 29절 말씀 설교자 / 조한우 목사
여호와의 말씀
가을의 문턱이라고 하는 입추가 지난 지도 벌써 보름이나 되었고, 내일이 처서라고 하는데 아직도 불볕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찜통더위다 가마솥더위다 해서 한 밤중에도 기온이 섭씨 2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는 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자면 추워서 못 자는데, 아마 도시에서는 더위 때문에 고생들을 많이 하나 봐요.
그러나 아무리 날씨가 푹푹 찌고 무더워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내일이 처서라고 하니까 아마 이번 주가 지나고 나면 더위도 한풀 꺾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더위 때문에 특히 노약자들이 고생이 많았는데요, 심지어는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그래도 우리 성도님들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서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 28)
더워도 감사하시고 추워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저 감사, 감사, 감사밖에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다들 보셨겠습니다마는 한상렬 목사님께서 방북 70일만에 판문점을 통해서 돌아오셨죠?
들어오자마자 체포가 되어서 공안분실로 이송이 되어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하고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대부분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쪽에서는 목사라는 신분으로 목회나 하지 뭣 하러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찬양하고 남한을 비방하느냐는 거죠.
또 한 측면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2년여 동안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이 되어있는데 그분의 순수한 열정으로 평양에 들어가서 북한 당국자들과 대화를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녹여내고 왔다는 측면에서는 대단한 것이 아니냐는 반응입니다.
북한 당국은 남한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거든요.
그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까 요즘 교회 안에서도 보수와 진보 세력 간에 뜨거운 공방이 벌어지고 있더라고요.
어떤 목사님께서는 한상렬 목사님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서 설교를 하시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글쎄요?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가봐야 알겠죠?
오늘 본문 말씀은 ‘진실한 선지자가 누구냐?’라는 말씀입니다.
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이야기에 간간이 가미를 하면서 자기 얘기를 거들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 말씀을 인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더구나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는데, 실상은 바알을 섬기는 그런 거짓 선지자들이 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23:16)고 하셨습니다.
저는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요즘 설교의 특징이 주로 축복 설교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죠.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침탈을 당하고 간신히 해방이 되어서 정신도 차리기 전에 이북놈들이 또 쳐들어와서 또 만신창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4, 50년만에 이와같이 괄목상대할만큼 고도의 성장을 이루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6, 70년대를 거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축복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복 받아라! 복 받아라!” 그러면 “아멘, 아멘!”그러면서 서로 복을 받으려고 앞 다투어 나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축복 설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꾸짖는 설교도 필요한 거예요.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회개를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도록 하는 설교가 분명히 꼭 필요한 거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계속해서 복받으라는 설교만 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축복도 중요하고 위로도 필요하지만 책망을 들어야 할 때에는 따끔하게 꾸중하는 설교도 들어야 성도들이 건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요즘 설교들이 얼마나 재미가 있어요?
유명하다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인터넷에서 잠깐 들어봤더니 무슨 약장사 같이 목소리도 이상하게 해서 설교를 하시던데 이 양반이 정말 왜 이러나 싶더라고요.
목사님들이 점점 코메디언이나 개그맨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그래야 불신자들이 듣고 구원받을 거 아니겠느냐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싸구려 코메디가 아니거든요.
조심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3류 코메디나 개그처럼 만들어서 우스개 소리처럼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방송사에서는 일단은 재미가 있어야 시청자들이 보게 될 것이고, 그래야 광고 수입이 생기게 되는 거니까 점점 더 재미있는 설교를 요구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 방송들이 점점 쇼프로같은 설교로 도배를 한다는 것은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지루하고 딱딱해서 졸리면 그것도 안 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저 사람들의 비유나 맞추고 재미만 있게 만들어 버리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아무도 벗어나거나 피할 수가 없습니다.
23절과 24절 말씀을 보실까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말씀은 저인망 어선과 같습니다.
쌍끌이 어선이라고도 하던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가 되면 어떤 영혼도 구원받지 못할 영혼이 없고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가 되면 그 말씀 앞에서 어떤 영혼도 도망을 칠 수가 없는 겁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말씀이 투망처럼 우리를 덮을 때에 그너 우리들은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면 생명과 복을 얻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5절 말씀부터 27절까지 말씀을 보면 정말 심각한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것이 정말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지 못하고 사람 눈치나 보는 선지자들은 용기가 없는 선지자요, 인기에 영합하는 선지자일지언정 거짓 선지자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는 겁니다.
15절부터 27절까지 한번 다 같이 봉독해 보시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자, 저를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재미있게 전하고 조금 웃기게 전해도 좋아요.
만날 축복, 축복… 위로, 위로… 그런 설교만 해도 괜찮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도 없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더구나 ‘내가 꿈을 꾸었는데 말이야…’그러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꿈을 아주 잘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계시하실 적도 있으세요.
그러나 말씀은 안 보고 꿈 이야기나 하면서 혹세우민하는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은 아주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내가 꿈을 꾸었다. 내가 꿈을 꾸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가지고 그 꿈 이야기를 해 주면서 그 꿈으로 모든 것을 다 풀어주었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점점 하나님은 멀어지고 바알 신을 섬기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꿈으로도 오고, 환상으로도 오고,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오고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가장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 66권, 우리들에게 주신 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은 없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걸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거예요.
1830년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생긴 이단 중에 몰몬교라는 것이 있습니다.
스미스 2세라는 사람이 천사로부터 무슨 계시를 받았다나요?
그걸 기록해 놓은 것이 몰몬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신구약 성경 66권 말고 그 어떤 계시나 꿈이나 그 어떤 천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거나 그 보다 더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천지에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에 자꾸 유혹이 되고 자꾸 기웃거리다 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고 결국 바알 종교로 가게 되고 마는 거예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28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꿈을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말씀을 말하시겠습니까?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할렐루야!)
28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앞의 말씀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꿈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겨예요? 알곡이에요? - 겹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을 성실함으로 전하는 참 선지자들은 겨에요? 알곡이에요? - 알곡입니다.
그러므로 겨와 알곡을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지않겠어요?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면서 29절 말씀에 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다 같이 한번 봉독해 보실까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아멘!)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무엇과 같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불과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과 같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와 같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의 불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방망이에 한 번 맞아 보실래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불처럼 방망이처럼 우리들을 사로잡을 때에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코메디로 만들어요?
바위를 부스러뜨리는 방망이와 같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무슨 연예인이나 개그맨처럼 그렇게 먹고 살고 싶을까요?
물론 사람마다 달란트라는 것이 있어서 다 자기 그릇대로 쓰임 받는 거니까 나름대로 다 필요한 그릇들입니다마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방송국이 더 문제에요.
그저 돈이 되는 거라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요?
표현이 적당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마는 목사님들을 자꾸 날나리로 만들려고 하는 방송국이 문제란 말입니다.
자꾸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겠죠?
설마 복음을 전하는 방송국들이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먹었겠습니까?
아무튼 회개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진실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방법이 뭘까요?
첫 번째는 말씀의 내용을 보면 압니다.
대부분의 거짓 선지자들은 권력에 아부하고 권력에 빌 붙는 설교를 합니다.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부귀도 영화도 없거든요.
바른 소리를 못합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출세도 필요없습니다.
그러니 권력에 아부할 필요도 없는 거죠.
다 그렇지는 않겠습니다마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권력층과 부합하는 설교는 일단 그 내용면에서 볼 때에 거짓 선지자일 확률이 높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설교가 아무리 좋고 사상적으로 볼 때에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 꼭 맞는 설교라고 할지라도 그런 설교를 하는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일 가능성이 있어요.
그 다음에 말씀의 깊이를 보아서 구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시는 분들치고 설교를 위해서 고민을 하지 않는 분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연구도 하고, 주석도 보고, 성경도 열심히 읽습니다.
그래서 한 편의 설교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왠지 설교에 깊이가 없습니다.
예화도 좋고 주석에서 원어 해설까지 인용을 했는데도 이상하게 말씀에 깊이가 없어요.
말씀의 깊이가 있다는 것은 무슨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말씀 속에서 우러나오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그걸 먹은 성도들이 일주일동안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야 됩니다.
29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불이요,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라면 왜 이 말씀을 전할 때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겠어요?
날마다 불을 받는 건 아닙니다.
날마다 말씀의 방망이에 맞을 필요도 없을 거예요.
그러나 일생에 한번 참 선지자를 만나서 그가 전하는 말씀에 불을 받고, 그가 전하는 말씀의 방망이에 맞아서 알량한 내 자존심이 산산히 부숴지고, 나의 잔머리 굴리던 얄팍한 신앙이 철저하게 깨져버려서 제대로 한번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참돈 행복이요, 그것이 참된 신앙의 묘미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은 나를 보고 노사모라고 하시는 분도 있더라고요.
내 생각이 진보적이다 보니까 그렇게 보였나 봐요.
그러나 나는 그 흔한 촛불 집회에도 한번 가 본 적도 없고요, 노대통령 돌아가시고 나서도 여기서 봉화 마을이 그리 멀지도 않거든요.
그래도 아직도 거기 한 번 가 보지도 못했어요.
나는 목회자입니다.
나라고 왜 장로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 안하겠어요?
정말 그 분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바른 말씀을 드리는 사람이 필요한 건데 다들 딸랑딸랑만 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정권 말기가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싹 돌아서거든요.
그런 분들을 참 선지자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요?
여호와의 말씀은 불이요 바위를 부서뜨리는 방망이라고 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신속하게 전해지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확하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꼭 들어야 할 그 사람이 듣고 가슴을 치고 회개를 하거나 아니면 발악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약입니다.
처서를 하루 앞두고서도 수그러들 줄 모르는 여름 날씨처럼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우리들이니까요.
여호와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힘없는 약자의 편에 서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외롭게 서 있는 참 선지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지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선지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이 따를 줄 믿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