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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심령이 가난한 사람 (마 5:3)
몇 해 전 한 카드 회사의 광고가 크게 주목을 끌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미모의 여자 탤런트가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고 친근한 덕담을 하는 광고입니다. 이 광고 카피는 크게 히트를 쳐서 어린 아이들까지 따라하는 인사가 된 일이 있습니다.
이 광고가 히트를 치게 된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잠재돼 있는 욕구를 집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욕구를 덕담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최근 중국 사람들 사이에 가장 선호하는 덕담이 있답니다. 바로 "恭喜??!"(부자되세요) 사실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개인의 사유재산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이 부자가 될 수 없고, "부자되세요"라는 덕담은 가당치 않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중국정부가 개인의 사유재산을 허용하고, 사람들도 저마다 부자가 되려고 열심히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恭喜??!"(부자되세요) 라는 덕담을 주고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세상 사람들처럼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덕담일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딤전 6:9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한 마디로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부자가 되려는 과정 속에 우리를 파멸로 몰고 가는 시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부자 되세요!" 이런 말은 결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덕담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마 19:23-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자 되세요!"라는 말은 "천국 가지 마세요!"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덕담이 아니라 잘못하면 악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부자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일까요? 예수 믿으면 다 부자는 될 수 없다는 말일까요?
사실 성경을 보면 믿음 좋은 백만장자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창 13:3을 보면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온 뒤에 부자가 되었고, 점점 더 재산이 늘어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부자는 솔로몬입니다. 왕상 10:23을 보면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전무후무한 부를 누렸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나 솔로몬은 사도 바울 말씀처럼 재물 때문에 시험에 들어 파멸에 빠진 일이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나 솔로몬이 예수님 말씀처럼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 이지만 재물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바늘귀를 통과해 나온 낙타와 같은 특별한 부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령은 쉬운 말로 "마음"이라고 풀이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서 복 여부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복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서 가 아니라 그 마음 상태에서 복 여부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그 마음이 비워질수록 복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두 종류의 부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가난한 부자입니다. 부자이지만 마음을 비우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부자는 그 많은 재물 때문에 늘 생각이 많고, 그 재물을 의지하는 마음을 비우기가 거의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이런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들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도 부자인 가난한 부자입니다. 재물이 많아 마음 속에도 재물에 대한 생각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또한 그 재물의 의지하는 마음과 그 재물 때문에 생겨나는 교만이 가득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부자들이 이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가난한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가난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삽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도 비우고 재물 없이는 못살겠다는 마음도 다 비우고 삽니다. 그저 주어진 것으로 족하게 여기며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삽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사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가난하지만 마음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가난하지만 마음을 비우지 못합니다. 여전히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고, 재물 없이는 못살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재물을 모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 여부는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부자도 복되지 않을 수 있고, 가난한 사람도 복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자도 복될 수 있고, 가난한 사람도 복될 수 있습니다. 복 여부는 그 사람의 마음 상태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이 있다는 마음이 가난한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우선 가난하다는 말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한 마디로 가진 것이 적거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헬라어에는 가난을 뜻하는 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페나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형편이 어렵지만 힘들여 일하면 그저 입에 풀칠 할 수는 있는 상태의 가난을 말합니다. 남들처럼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겨우 하루 벌어 하루 먹을 상태는 되는 가난을 말합니다. 즉 상대적 가난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프로카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입에 풀칠할 것 조차 없는 상태의 가난을 말합니다. 그야말로 구걸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의 가난을 말합니다. 즉 절대 가난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프로카스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절대 가난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는 도대체 어떤 상태일까요?
첫째, 마음에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롬 7:21-24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 자신 안에 치열한 영적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그 싸움을 끝낼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재물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고, 그동안 자기가 쌓아온 지식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고, 애써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지위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곤고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자기 안에 무엇인가 많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정작 결정적 순간에 그것들을 살펴보내까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헛됨을 깨닫고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기 마음 속에는 의지하고 붙잡고 나갈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소설가 계용묵이 1935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가운데 [백치 아다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아다다는 벙어리면서 백치입니다. 부자인 부모덕에 넉넉한 지참금 때문에 시집을 가게 됩니다. 처음에 남편은 일생 먹고 살 것을 가지고 시집 온 아다다를 끔찍하게 보살핍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가 남편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때리기 시작합니다. 여자를 데리고 들어옵니다. 시부모들의 시집살이가 노골적이 됩니다. 쫓겨나다시피 아다다는 친정으로 오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아다다는 자기를 사모하는 수롱이라는 노총각을 찾아갑니다. 수롱이는 아다다를 데리고 신미도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뼈빠지게 일해서 돈을 모았고 이제 꿈에도 그리던 땅을 사서 여엿하게 농사를 져보려고 합니다. 그러던제 아다다에게 그동안 모아 놓았던 돈 뭉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때 아다다는 과거 돈 때문에 겪어야 했던 불행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들고 바닷가로 가서 물결 위에 뿌려버렸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좇아온 수롱이는 정신 없이 돈을 찾으려 몸부림쳐 보지만 허사입니다. 화가 난 수롱이는 아다다를 발로 차서 물 속에 빠뜨리고 맙니다. 그 결과 아다다는 물에 빠져 죽고 맙니다.
이 이야기는 돈 때문에 겪는 비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를 적나라하게 표현해 줍니다. 첫 번째 남편은 그 마음이 온통 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에 비해 두 번째 남편은 온통 그 마음이 돈에 대한 애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두 사람 다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듯 그 마음이 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 아닌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마음에 돈을 의지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마음에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마음에 명예에 죽고 사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마음에 향락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자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런 것들을 다 비운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정말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 내려 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둘째, 그 마음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롬 7:25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이 이번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도 바울이 그 치열하던 영적 싸움을 끝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기에 그런 승리를 맛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자기 안에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어 그저 빈 마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마치 거지가 구걸하듯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지난 주간 문성 이민아 선교사님이 다녀가셨습니다. 5년 만에 안식년으로 오셨습니다. 이민아 선교사님은 금요 기도회 때 간증을 하셨고, 문성 선교사님은 수요 사경회 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큰 깨달음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교우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두 분은 20년 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저 오지 중의 오지인 남태평양 파프아뉴기니 섬으로 가셨습니다. 원래 문성 선교사님은 당시 컴퓨터 공학 박사로 종업원이 100명 가까이 되는 중견 기업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민아 선교사님은 정부가 세운 국제학교 교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남부럽지 않는 삶을 살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다 비우고 순종했습니다.
다른 선교사들처럼 파송 교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단이 파송한 것도 아니어서 정해진 후원이 없는 상태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족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분들은 도움을 청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채우시는 것을 받을 뿐입니다.
한번은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손에 가진 것이 80불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지 못하고 그 오지에 갇혀 하늘만 바라보고 눈물로 기도만 했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저 하늘의 소망으로 위로하시더랍니다. 아들이 호주에 있는 대학에 가게 되었는데 뒷바라지 해 줄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3-4년이면 졸업할 수 있는 과정을 8년에 걸쳐 졸업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한 해 공부하고 한 해 일하고 하는 식이지요. 언젠가 아들이 전화를 했답니다. 그래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아빠가 아무런 도움이 되어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라고 했더니 아들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빠 그렇지 않아요 제게 가장 귀한 것을 주셨어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주셨잖아요” 그 소리를 듣고 문성 선교사님은 한 없이 울었답니다. 미안해서 울었고, 아들이 자랑스러워 울었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이처럼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비운 그 빈 자리에 천국으로 채워주신 것입니다.
사실 천국은 장차 우리가 들어갈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천국이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장차 들어갈 곳이기도 하면서, 우리가 믿음 가운데 이 땅에 실현해 가야할 곳이기도 하면서, 또한 우리 마음속에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천국이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가 내려놓기 힘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온 마음을 다 비웠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평안을 채우십니다. 바로 그 평안이 천국의 평안입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기쁨을 주십니다. 바로 그 기쁨이 천국의 기쁨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땅 이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저 천국에서 맛볼 수 있는 평안과 기쁨을 미리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복은 가난한 마음에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하나씩 채워 넣었던 것들을 다 비운 마음입니다. 세상 것 귀하게 여겼던 마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붙잡았던 마음, 내 생명처럼 떠받들고 살았던 마음 이런 마음을 다 비우곤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직 하나님만 귀하게 여기고 그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마음으로만 가득 찬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가난한 마음에 천국을 가득 채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