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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과 들릴라 / 삿 16:1-22
본문은 '삼손과 들릴라'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내용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삼손이라는 힘센 장사가 여자의 유혹에 빠져서 자신의 종말을 맞게 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영화를 제작한 사람과 같은 시각으로 본문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삼손이라는 사사가 들릴라라는 여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자신만이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을 발설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힘을 잃어버리고 블레셋에 붙들려 비참함에 빠졌다가 결국 복수를 하고 최후를 맞는다는, 어찌 보면 진짜 영화에서나 나올만한 내용으로 이해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은 단지 남자와 여자의 문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어떤 특정 대상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누구라 할지라도 성경을 대할 때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여자의 유혹에 넘어간 남자의 이야기 정도로 이해해 버린다면, 결국 본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범위는 매우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눅 21:34-36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둔하여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본문에서 여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삼손을 생각하기보다는, 누가복음의 말씀대로 마음이 둔하여진 삼손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삼손은 사사입니다. 그리고 나실인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사사와 나실인으로 세워진 자신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들릴라라는 여인을 더욱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로 인해서 사사와 나실인으로서의 삶에 둔하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삼손의 마음이 둔하게 된 원인이 사랑하는 여인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절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가사는 블레셋 족속의 남단의 도시이자 지중해와 가까운 도시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가사는 삼손의 고향인 소라에서 57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상당히 먼 곳입니다. 그런데 삼손이 이렇게 먼 블레셋의 도시인 가사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당시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을 정탐하기 위해서나, 아니면 게릴라전처럼 전투하기 위해 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탐이나 혹은 단신으로 맞붙으라는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으며, 설사 그것을 위해서라고 해도 다른 주요 도시들을 두고 제일 남쪽 도시로 갈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물론 크게 보면, 블레셋을 응징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만, 오늘 본문은 그가 거기까지 간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절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여기서 ‘기생’은 ‘매춘부’를 뜻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삼손이 가사로 간 이유는 자신의 욕정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멀리까지 간 이유는 그가 엔학고레 사건 이후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사사로 세워졌기 때문에 가까이에서는 자신의 욕정을 해결할 수 없어 그렇게 먼 곳으로 갔다는 말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곳과 멀리 가면 사람들이 몰라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멀리 가면 행동도 함부로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디든 여러분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삼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삼손이 블레셋의 도시인 가사로 내려가자 삼손을 원수처럼 여기는 블레셋 측에서 금방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삼손이 들어간 기생의 집을 에워쌌고, 혹시 그가 빠져나갈까봐 성문까지 지키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삼손은 기생의 집에서 새벽까지 보내지 않고 “밤중에 일어나”(3) 안전하게 밖으로 피신했고, 그냥 피신한 것이 아니라 “성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갔습니다. 가사는 강력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기 때문에 성문은 아주 튼튼하고 무거웠을 것입니다. 문의 빗장도 철이나 강한 나무로 만들었을 것인데요. 삼손은 성문과 문설주와 빗장까지 간단하게 뽑고는 그것을 모두 어깨에 지고 헤브론 앞산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헤브론 앞산이 어디입니까? ‘헤브론 앞산’은 가사에서 약 60km 떨어진 유다 지파의 성읍인 헤브론으로 추정됩니다. 삼손이 그 무거운 것들을 짊어지고 그 먼 길을 갔다는 말입니다. 삼손이 그렇게 한 이유는 당시 성문은 그 민족의 국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삼손이 그것을 뽑아버림으로서 그들을 멸할 것과 나아가 블레셋이 장차 이스라엘에 복속될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이 일로 인해서 가사에서 위기를 당하게 되었으나 힘 있는 삼손은 그 위기를 유유히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4절에서 삼손이 다시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삼손이 여자를 무척이나 밝히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여자 때문에 삼손이 망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삼손이 여자 때문에 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를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잘못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큼으로 인해서 자신이 사사며 나실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다만 들릴라라는 여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고자 하는 삼손의 모습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둔하여진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이것을 알게 된 블레셋은 다시 삼손이 사랑하는 여인을 이용하여 삼손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 계획이란 5절에서 말한 대로 삼손을 꾀어서 삼손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것인지를 알아내고 굴복하게 하면 각각 은 천백 개씩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돈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아들인 들릴라는 삼손에게 힘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물음에 처음에는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힘이 없어진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인 것을 알게 된 들릴라는 삼손에게 나를 희롱하고 거짓을 말한다고 하면서 다시 진실을 말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삼손은 두 번째 답에서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묶으면 된다고 답하고, 또 다시 그것이 거짓인 줄 알게 된 들릴라는 다시 삼손에게 세 번째 어떻게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는지 말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삼손은 세 번째 답에서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거짓인 것을 알게 된 들릴라는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15절)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결국 삼손은 들릴라의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7절)고 진실을 털어놓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삼손을 보면서 여러분은 뭔가 삼손이 참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삼손이 들릴라가 자신을 묶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을 때 들릴라가 그것을 물어보는 의도를 몰랐을까요? 더군다나 삼손이 거짓으로 방법을 가르쳐줄 때마다 들릴라는 그것을 실제로 시행을 했습니다. 그러한 들릴라의 배후에 블레셋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삼손이 과연 몰랐을까요? 들릴라의 의도에 대해서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긴 들릴라의 의도를 알았든, 몰랐든 상황은 같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손은 어쨌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삼손의 마음이 둔하여졌다고 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17절의 삼손의 답을 보면 삼손은 자신이 나실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실인이라는 그 사실이 삼손으로 하여금 들릴라의 요구를 이기는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문제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과연 성도라고 하는 그 사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엄청난 그 신분이 과연 여러분의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믿음은 생각과 마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능력으로 증거 되어 집니다. 우리가 스스로 성도라고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도 성도로 인정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성도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도 여러분을 성도로 여기실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무리 여러분이 자신을 성도라고 말하고, 또 주위 사람이 '당신은 성도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성도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시는 것이 곧 구원인 것입니다.
20절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삼손에게서 여호와가 떠났습니다. 이것이 삼손이 비참함으로 연결되어진 것입니다. 지금껏 삼손은 힘이 있었기에 여러 위기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떠난 삼손은 힘을 잃어버렸고, 결국 블레셋에 의해서 비참한 일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비참함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가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떠남은 곧 우리의 비참함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호와가 우리를 떠날까 염려하고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삼손처럼 하나님 말고 다른 무엇엔가 마음을 빼앗김으로 인해서 마음이 둔해진 상태로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이 나실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손은 분명 들릴라에 대한 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둔해진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의 삶보다도, 나실인의 삶보다도 다만 들릴라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기 위해서 나실인이라는 것조차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아니라 들릴라에게 붙들린 것입니다. 결국 삼손의 비참함의 시작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서 둔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긴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둔해졌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 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삼손에게 있어서는 들릴라에게 붙들려서 들릴라를 즐기고 살아가는 것이 곧 마음의 둔함의 결과이며 원인인 것입니다.
삼손의 마음은 여자에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무엇에 있습니까? 굳이 여자에게 마음이 있다고 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마음을 뺏은 뭔가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의 즐거움이 생활의 풍요로움에 있다면 생활의 풍요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마음은 세상에 나뉘어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것으로 즐거워하고 세상 것으로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마음이 둔해지고 눈이 어두워진 채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곧 '나는 성도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자다'라는 것에 대해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임을 잊지 말라는 것은, 그냥 성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성도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세상의 일로 인해서 마음이 둔해지면, 결국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즐거움을 지키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행동하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한 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들릴라가 기생이었다고 해도 기생을 사랑한 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서 여자의 유혹을 이기자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생활 지침서나 윤리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삼손의 문제는 들릴라에 대한 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둔해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둔해진 삼손은 앞서 말한 대로 나실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잊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실인으로서 머리카락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생각하기보다는 들릴라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에 더 급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 하기보다는 들릴라라는 여인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삼손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둔한 마음으로, 세상에 대해서는 예민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들릴라가 삼손을 비참함으로 몰고 가는 덫이었는데도 들릴라를 자신의 덫으로 보지 않은 것처럼, 세상이 우리를 비참함으로 몰고 가는 덫인데도 우리는 세상을 덫으로 보지 않고 삽니다. 우리의 불행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 둔함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서 둔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도, 갈등도 없는 것이 우리의 불행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둔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둔하게 살아가면서도 고민도 갈등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도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끊임없이 스스로 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마음이 둔해진 것이 아닙니까? 성도의 신앙 행위가 어떤가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삼손처럼 자신을 나실인으로 세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 보내셨다면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성도로 살게 하심으로서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성도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떤 일에서든 '어떻게 하는 것이 성도다움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마음을 둔 모습이 아닙니까?
삼손은 들릴라란 덫에 붙들렸습니다. 그로 인해서 마음이 둔해지고 나실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존재성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붙든 덫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덫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서 둔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무관심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단순히 미래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천국을 기대하는 것이 오늘의 삶에서 보여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오늘의 삶에서 보여져야 합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의 믿음이 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이 없다면 내일도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내일도 그리스도인일수 없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내일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막연한 기대는 가지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생각으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택한 자라면 내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은 아닙니다. 우린 성도로서 다만 오늘 어떻게 살았느냐를 생각해야 할 뿐입니다. 혹 하나님에 대해 둔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