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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귀족의 결투 멘탈리티를 보여준 <삼총사>
서양사학자 13인 지음, <서양문화사 깊이읽기>(푸른역사, 2008) 15,000원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1844)는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이 프랑스 정국을 좌우하던 17세기 초반을 무대로 삼고 있다. 고향을 떠나 파리로 올라가는 주인공 다르타냥은 마주치는 상대방에게서 조금이라도 꼬투리가 잡히면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어 결투를 청한다. 결투 강박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좌충우돌 결투에 집착하는 행태를 보인다. 다른 세 명의 총사들도 마찬가지여서 결투금지령을 무시해가며 걸핏하면 싸움을 일삼는다. 이 모든 것은 소설적 재미를 위한 허구적 장치일 뿐일까?
공저자인 임승휘 교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지어내기 위한 작가의 왜곡이 얼마간 있을지 모르나, <삼총사>는 나름대로 충분한 고증에 입각한 역사소설이라고 설명한다. 17세기 초반 대검귀족의 결투 멘탈리티를 이 소설만큼 설득력 있게 문학적으로 표현한 사례도 드물다는 것이다. 작가적 상상력만의 산물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낭만적이지만 비운의 삶을 살았던 역사적 실존인물 프랑수아 드 몽모랑시 부트빌에 대한 설명에 이르러 임 교수의 주장은 반박할 수 없는 설득력을 얻는다.
칼싸움의 귀재 부트빌
부트빌은 1600년에 태어났다. 프랑스 남부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부트빌은 칼싸움의 귀재로, 다들 그를 존경하면서 두려워했다. 24세의 나이에 그는 교회의 계율과 국왕의 칙령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19차례나 결투를 치렀다. 부트빌에게 결투는 놀이이자 스포츠, 어쩌면 사명감에 찬 행동이었을 것이다. 17세기 초 프랑스에서 결투는 하나의 유행이었다. 지나치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결투가 치러졌다. 길을 지나가다가 상대의 눈빛에서 불쾌감을 느끼기만 해도 “왜 째려보는 거야!” 하면서 칼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소설 <삼총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분위기다.
부트빌은 1625년 포르트 후작과 결투 끝에 후작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1626년에는 자크 드 토리니와 결투를 벌인 끝에 다시 상대방을 죽여 버렸다. 이로써 그는 21번에 달하는 결투금지령 위반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동안은 집안 배경과 전투에서의 용맹성 때문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브뤼셀로 도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루이 13세는 부트빌의 행태에 분노했지만 파리와 왕궁에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조건으로 그에 대한 처벌을 면제해주는 선에서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부트빌은 국왕의 배려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21번째 결투 상대였던 토리니의 친구 뵈브롱 남작이 친구의 복수를 위해 결투를 요청하자 부트빌은 서슴없이 이 요청을 받아들였고, 결투를 위해 왕의 명을 어기고 파리에 입성했다.
1627년 5월 12일에 그는 루아얄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결투를 벌였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칼싸움을 벌인 셈이다. 이 결투에는 양측에 2명씩 증인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여차하면 칼을 뽑아들기를 서슴지 않는 친구들이었다. 결국 이 전투에서 뵈브롱의 친구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나고 만다. 부트빌은 체포되어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다. 루이 13세는 이번에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627년 6월 21일 결투금지령 위반죄로 27세의 나이에 자신이 결투를 벌인 그 장소에서 처형되었다.
제임스 본드의 암호명은 왜 007이었을까?
20세기 중반의 영국 소설가 이언 플레밍은 1952년에 최초로 스파이 영웅 제임스 본드를 창조한 후, 세상을 뜰 때까지 14권의 007 소설을 펴냈다. 이 소설들을 원작으로 하여 지금까지 20편의 007영화가 제작되었다. 그런데 ‘여왕의 스파이’인 제임스 본드의 암호명은 어째서 하필 007이었을까? 공저자 설혜심 교수는 그 해답을 얻기 위해 16세기 영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존 디(John Dee)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이혼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1527년에 태어났다. 디가 처음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547년이다.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그리스어 강의를 맡던 시절 그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을 연극 무대에 올렸다. 그는 거대한 딱정벌레를 제작해 무대에 올렸는데, 숨겨진 기계장치를 이용해 날아다닐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놀란 관객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고 곧 디는 뛰어난 고전학자이자 기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은 무적함대 격퇴와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문화적 르네상스 등으로 흔히 ‘번영의 시대’로 묘사되지만, 이 무렵 영국은 아직 유럽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게다가 미혼여성이 군주로 재위하는 전례 없는 상황을 맞아 영국의 입지는 불안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대륙의 상황을 파악하고 민감한 외교적 사안을 처리해줄 스파이의 역할은 매우 요긴한 것이었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학자로서 유럽에 널리 알려진 디는 여왕의 가장 비밀스러운 업무를 맡아 해결하는 스파이로 활동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디 사이의 사적인 외교문서에는 암호명 007이 사용되었다. 디는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의 말미에 ‘두 눈’을 나타내는 두 개의 원을, 그리고 7이라는 숫자를 썼다. 자신은 여왕의 비밀스러운 눈이고 그 눈은 ‘성스럽고 신비로운 행운의 숫자 7’에 의해 보호된다는 의미였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와 서양사의 다른 장면들
무명의 신문기자 레마르크는 1929년에 발표한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통해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발간 1년 만에 100만부를 돌파했고 무려 26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의 통렬한 반전주의 메시지 덕분에 작가는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정작 패전국 독일 국민들에게 이 소설은 불쾌한 것이었다. 특히 베르사이유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보수 진영에게 이 책의 존재는 저주 그 자체였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독일 개봉 첫날인 1930년 12월 5일, 당시 33세의 나치 선전 책임자 괴벨스는 조직적으로 영화상영 방해공작을 펼쳤다. 극장 안에는 100명이 훨씬 넘는 갈색 셔츠 젊은이들이 있었다. 영화가 상영되자 그들은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면서 “유대인 꺼져라” 같은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극장 안에는 연막탄 연기가 진동했고 1층 좌석 밑에는 생쥐들이 활보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영화 상영은 불가능했다. 공저자 고유경 교수는 이 사건을 나치의 ‘영화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이 책은 서양 역사의 주요 국면이면서도 일반 개설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13개의 주제들을 13인의 서양사학자들이 맡아, 관련 인물과 사건들을 상세히 분석하고, 그것들이 그 시대의 문화를 어떻게 투영하고 있는지를 추적했다. 현장감과 생동감이 살아 숨 쉬는 흥미진진한 역사 서술이다. 공동 저술이기에 글에 따라 밀도와 긴장감 면에서 편차가 보이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역사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