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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5강은 쉬운 것이 아니라서 저같은 둔재는 일의 중간에 틈나는 대로 듣고 또 들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들어 이제야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굳이 올리는 것은 이 15강은 너무 중요한 강의라서, 제딴에는 반드시 알아야할 강의라고 생각해서 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해한 바를 올려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에게는 도움을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고, 제가 안 것이 바른 이해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 아시는 분의 점검을 받고자 올리는 것입니다.
글이 긴데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하시는 분들은 끝의 4. 이상을 종합하면만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1] 중관학은 이런 것이다.
깨달음에는 인지적 깨달음인 견도와 감성적 깨달음인 수도가 있다.
중관학은 인지적 깨달음으로 인지적 고통을 해소시키는 것이다.
무엇인가?
종교적 철학적 의문인 삶과 죽음의 문제, 사물과 존재의 문제에 대해 모르는 것과 그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갖는 사견이 모두 치심이고, 이런 치심이 인지적 고통이다.
이런 의문조차 품지 않는 먹고 사는데만 관심있는 대다수 축생같이 사는 사람들은 치심도 없는 것이다.
이런 인지적 고통을 죽어보지 않고 눈을 뜨고 있는 이 순간에 해결해주는 것이 중관학이다.
다시 말해,
중관학은 대충 보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분석해 들어가(보아),
모든 치심이 실상의 세상과 무관한 허구라는 것을 자각해서,
종교적 철학적 의문을 해소시키는 논리학이고,
모든 생각을 해체시키는 논리학이니,
반논리의 논법 즉 반논리학이다.
중관학은 이같이 반논리의 논법을 익히는 것이니, 답을 아는 것이 아니고 답을 아는 방법, 테크닉을 익히는 것이다.
[2] 반논리의 논법인 중관(中觀)이란 무엇인가?
중도를 관찰함이다.
중도를 관찰하여 어떻게 종교적 철학적 의문이 해소가 되는가?
중도는 양극단에 대한 비판이다.
영극단이란 무엇인가?
고행주의와 삼매주의가 양극단이다.
이같은 실천적 양극단인 고행도 삼매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도이다. 곧 연기를 관찰함이다.
초기불교의 양극단 비판의 중도는 이같이 수행의 중도라서 실천적 중도라 한다.
양극단이란 무엇인가?
생멸(生滅(생멸)) 상단(常斷) 일이(一異) 출래(來出) 정구(淨垢) 등이 양극단이다.
이와 같은 인지적 양극단 즉 흑백논리를 비판하는 것이 중도이다.
대승불교의 중도는 이같이 인지적 양극단을 비판하므로 사상적 중도라 한다.
그러므로 양극단에 대한 비판인 중도에 대해 관찰하면,
양극단이 모두 실체가 없는 허구임이 드러나 모든 생각은 해체가 되고 모든 의문은 해소가 되어, 모든 종교 철학적 문제인 인지적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철학적 의문인 삶과 죽음의 문제, 나는 무엇인가 등 존재에 대한 문제, 세상은 존재하나 안하나 내생이 있는가 없는가 등의 세상의 문제 등으로 인한 치심의 인지적 고통을 해결해주는 것이다.)
[3] 우리의 문제 해결 방식을 보면 다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1.
양극단 =
대충 봄 =
이분법적 흑백논리 =
동물적 문제인 먹고 사는 문제 즉, 먹고 사는 의문을 해결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견·단견 등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먹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일률(A는 A다), 모순율(A는 A가 아닌 것이 아니다), 배중률(A나 A아닌 것 말고 제3의 것은 없다)의 흑백논리의 논리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흑백논리 아니면 못산다.
어제 동네사람 잡아먹은 호랑이는 엄밀히 보면 오늘의 호랑이가 아니나 대충보면 그 호랑이다.
그래서 까불지 않아 살아남을 수 있다.
어제 본 건물은 엄밀히 보면 오늘의 건물이 아니나 대충보면 그 건물이라 와서 강의 듣는다.)
그리고 이것은 진화과정에서 형성된 신경망 조직(구조)에 의거하여 살아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2.
중도 =
엄밀히 봄 =
흑백논리 비판(초월) =
종교철학적 문제인 삶과 죽음, 세계와 존재의 문제 등 나고 죽는 깊은 의문 즉 인지적 고통을 해결한다.
왜냐하면,
흑백논리로 흑백논리를 비판하여 흑백논리가 허구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것은 흑백논리를 초월한 논리학이다.
(대충 보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닌, 흑백논리로는 나고 죽거나 존재의 깊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진화과정에서 형성된 뇌의 신경망 구조를 갖고 뇌의 신경망 구조를 비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언어를 갖고 언어를 버리고, 논리를 갖고 논리를 넘어서는 벗어나는 것이다.)
[4] 중론을 저술한 용수는 대승의 아버지이자 팔종의 조사로 붓다 이후 가장 뛰어난 자이다.
저술 십주비바사론에서 십지경을 처음 해설했으니 화엄종의 시조
십주비바사론에서 난행도이행도를 처음으로 보였으니 정토종의 시조
중론24장 18번째게송에서 일심삼관을 처음으로 보였으니 천태종의 시조
중론 백론(제바著) 십이문론은 삼론종의 소의 경전이니, 자연 삼론종의 시조
(격의 불교시대에 중국에 공을 비로소 알게 한 것이 이 삼론이다)
이외 유식종, 선종, 율종, 밀종의 시조가 되기에 동아시아 8종의 조사라 한다.
용수의 저술 중론은...
초기불교에서 소홀히 한 법공을 드러내 공이 무엇인지를 구명한 논서이니 초기불교의 온전한 계승이고,
유식논사들은 중론을 주석하지 않은 이가 없으니 중론의 온전한 계승자들이다.
중론은 27장 455수의 게송으로 이루어진,
공을 오해하지 않고 공이 무엇인지 영원히 재생산될 수 있게 만든, 절묘한 테크닉의 책으로,
중론에 대한 반론(1~21장)을 되받아치는(21장~50장)
71수(1송은 연기=공성=중도 보임)의 게송으로 이루어진 회쟁론과 더불어 중관학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이다.
중관학문헌은 모두 8권인데, 다음과 같다.
중론, 회쟁론 + 공칠십론, 육십송여리론, 광파론 = 5如理論
십이문론, 백론(제바著), 사백관론(제바著)이다.
무엇보다 중론은 용수의 친술이라 정확하다.
오해없이 1800년 전의 불교의 통찰을 그대로 알 수 있는 귀하고 드문 저술이다.
[5] 중론 보기 - 중론은 어렵다. 그러나 논리학과 대비시켜 이해하면 쉬워진다.
중론 445 게송 전체를 보면,
선언적 게송 + 비유의 게송이 반이고, 논리적 게송이 반이다.
논리적 게송은 다시 개념 판단 추리에 대한 비판의 게송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이 판단에 대한 비판 4가지이다.
(附... 중론의 판단에 대한 비판의 게송이, 4가지 오류의 논법인 4구 비판으로 분류됨을,
1600년전 당시 중론과 유식의 논사들은 모두 알았지만,
현대 세계의 학계는 아직도 중론에 4구비판의 논법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김성철 교수의 자발적 노력으로 중론의 논리적 게송에 그런 4구 비판이 있음을 찾아내어, 중론 유식의 논사들이 쓰던 4구 비판과 일치함을 발견하였으니 극히 드문 일이라 할 것이다.)
서양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6가지 논리서의 통칭인 오르가논(Organon,대조직)을 2천년동안 넘지 못했다가 근대에 와서 잘못이 있음을 자각해 변하기 시작했다.
※ 6가지 논리서들은
범주론 (라틴어: Categoriae)
명제론 또는 해석론 (라틴어: De Interpretatione, 고대 그리스어: Περὶ Ἑρμηνείας)
분석론전서 (라틴어: Analytica Priora)
분석론후서 (라틴어: Analytica Posteriora)
토피카 또는 변증론 (라틴어: Topica)
소피스트적 논박 또는 궤변론 (라틴어: De Sophisticis Elenchis) - 출처 : 나무위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오르가논)은 개념 판단 추리 오류로 구성된다.
이에 의거하여 중론은 다시 개념비판하는 게송 + 판단비판하는 게송 + 추리비판하는 게송으로 나눠볼 수 있다.
1. 먼저 오르가논의 논리학과 중관학의 반논리학을 대비해 보자
【 ① 논리학(오르가논) / ② 반논리학(중관학)
① 개념론: 어떤 개념(단어하나)은 실체를 갖는다. /
② 환멸연기: 어떤 개념이든 의존적으로 발생한 것 즉 연기한 것이기에 공하다.
① 판단론: 어떤 판단(단어두개이상)은 사실과 일치한다. /
② 4구비판: 어떤 판단도 사실과 무관하다.
모든 판단은 4구인 증익견 손감견 상위견 희론견으로 분류(정리)된다.
어떤 판단도 4구 판단 각각은 의미중복(增益), 사실위배(損減), 상호모순(相違),
언어유희(戱論)의 오류에 빠진다.
① 추리론: 어떤 추론은 타당하다. /
② 상응논법, 자띠Jāti논법 (상위결정,이율배반): 어떤 추론이든 상반된 추론이 가능하다.】
2. 중관의 논법
우리의 생각을 가옥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논리적 사고'는, 개념의 벽돌로 판단의 기둥과 벽을 만들어 추론의 집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중관학의 '반논리학'에서는
낱낱의 모든 개념은 연기한 것이기에 실체가 없어서 공하며,
모든 판단은 분류하면 4구로 정리되는데 4구 각각 ①의미중복의 오류, ②사실위배의 오류, ③상호모순의 오류, ④언어유희의 오류에 빠지며,
모든 추론은 상반된 추론이 가능하다는 점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논리적 사고를 비판한다. - 불교문답게시판 75번과 76. 중론 게송의 분류 중 -
중관학의 핵심은 답이 아니라 방식을 익히는 것이다.
답(중관학과 반야경의 답은 무)을 외우는 게 아니고, 답을 내는 테크닉을 익히는 것이 중관학이다.
1) 개념론 비판
어떤 개념은 실체를 갖는다.
아니다. 어떤 개념도 실체가 없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기에 (환멸연기)
① 개념의 실체성 비판 (경문)
- 가는 놈을 떠나서는 가는 작용은 얻을 수 없다. / 가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 어떻게 가는 놈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은 한마디로, 가는 놈이 없으면 가는 작용이 없다. 가는 작용이 없으면 가는 놈이 없다.는 말이다.
- 또 비가 내린다 는 판단에서 내림이 없으면 비가 없고, 비가 없으면 내림이 없다.도 개념의 실체성 비판이다.
2) 판단론 비판
어떤 판단은 사실과 일치한다.
아니다. 어떤 판단도 사실과 무관하다.
네가지 오류의 사구 비판에 들어가므로 (사실성 비판)
① 판단의 사실성 비판 (경문)
제1구 비판(증익견 비판)
만일 가는 놈이 간다면 가는 작용이 둘이라는 오류에 빠진다.
가는 놈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과 가는 놈이 있는데 그 놈이 간다는 것(의 두가지)이다. - 월칭소
가는 놈이 간다는 비가 내린다로 대체할 수 있다.
하나의 현상인데 주어와 서술어를 붙이는 것이다.
즉 비가 내린다 (가는 놈이 간다)는 하나의 현상인데 둘로 나눈 것이다.
비에 내린다란 의미가 들어가 있어 다시 내린다 써 의미 반복하는 오류, 즉 비에 내린다가 들어가 있어 의미 중복의 오류 즉 증익견 비판이다.
제2구 바판(손감견 비판)
가는 놈이 간다고 하는 주장을 하는 자, 그 자는 오류에 빠진다.
가는 작용 없이 가는 놈이 있어서 (그런) 가는 놈의 가는 작용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 월칭소
가는 놈이 간다는 비가 내린다로 대체할 수 있다.
비가 내린다고 하는 주장을 하는 자, 그 자는 오류에 빠진다.
내림이 없이 비가 있어서 그런 비가 내린다 하는 것이기에 그런 비는 없기에 사실 위배의 오류다.
또 하늘 위 어딘가 비가 있어 내린다 할 때, 하늘 위 구름도 내리는 비가 아니므로 비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리지 않는 비는 없다.
어딘가 비가 내린다할 때 그런 비는 없기에 손해보고 감소시킨 것이라 손감견이며,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하면 사실 위배의 오류, 즉 손감견 비판이다.
제3구 비판(상위견 비판)
어떻게 열반에 비존재와 존재의 양자가 되겠는가? 이 양자는 같은 곳애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밝음과 어둠과 같다.
존재하면서 비존재다. 상호 모순의 오류다.
비가 내린다로 대체하여 말한다면,
내리면서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이니, 주어의 상호 모순의 오류, 즉 상위견 비판이다.
제4구 비판(희론견 비판)
만일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열반이 존재한다면 비존재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라는 그것이 무엇에 의해 표시되겠느냐?
언어유희 말장난의 오류다.
비가 내린다로 대체하여 말한다면,
내리는 것도 아니고 내리지 않는 것도 아닌 비가 내린다. 이니,
말장난의 오류 언어 유희의 오류 즉 희론견 비판이다.
② 4구비판 논법의 근거
√ 섭대승론석 (무착著, 세친釋)
『말에 네가지 종류가 있는데 네가지 비방이다.
유를 말하면 증익이고,
무를 말하면 손감이며,
역유역무를 말하면 상위이고,
비유비무를 말하면 희론이다.』
√ 아리야제바의 광백론석 (제바著 호법釋)
√ 유식논사들의 중론주석서
3) 추리론 비판
어떤 추론은 타당하다.
아니다. 어떤 추론도 타당성이 없다.
3단논법은 언제나 반대의 3단논법제시가 가능하므로 (타당성 비판, 중론24장 방편적제시)
예) 모든 게 공하다면 사성제도 무너지니, 불교 비방되고 부정된다.
모든 게 공하지 않다면 사성제도 무너지니 불교가 비방되고 부정된다.
이 추론비판논법을 상응논법이라 하고 이율배반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3. 귀경게 첫 게송
1소멸하지도 않고 2생겨나지도 않으며 (불생불멸)
3이어지지도 않고 4단절된 것도 아니며 (불상부단)
5동일한 의미도 아니고 6다른 의미도 아니며 (불일불이)
7오는 것도 아니고 8가는 것도 아닌 (불래불출) -緣起,
9희론이 寂滅하며 10상서(吉祥)로운 緣起를 가르쳐 주신 正覺者, 설법자들 중 제일인 그분께 예배합니다.
생멸 상단 일이 래출의 흑백논리가 들어가지 않는 중도가 연기다.
비가 내린다와 같은 현상은 하나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어서 홀로 일어나는 것은 없다. 다 연기한다.
인과관계도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가져온다는 상견적인 인과도 원인은 결과와 무관하다는 단견적인 인과도 아닌 불상부단의 중도적 인과이다.
그러므로 실상은 생멸 산단 일이 래출의 흑백논리가 아니라,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출의 중도적인 연기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세상 모든 만사의 실상이 바로 연기다.
실상에 대한 통찰에는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여덟 수식어가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연기를 말하는 것이다.
연기인 줄 알면 희론인 철학적종교적의문이 다 사라진다.
세계와 존재에 대한 것,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이 사라져 희론이 적멸하게 된다.
그런 문제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다 끝나기에 너무나 신비로워서 상서롭다.
연기를 말한 중론이 이같이 뛰어나나 믿음이 또한 우선된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실체가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므로 공하다 하는 것이니, 공하다는 것도 생각이라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나 효용 공능이 있다.
그래서 공사상은 응병여약이다.
불립문자도 자가당착에 빠진 말이나 공능 효용이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공능 효용이 있으려면 그것을 쓰는 이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처음이고 끝인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지혜의 문제가 아니라 복덕의 문제이다.
그래서 복을 줌이 믿음을 만들게 하고, 그 믿음의 중요성을 알기에 논리적인 문헌인 중론의 앞과 뒤를 믿음의 게송으로 장식한 것이다.
4. 이상을 종합해 보면,
양극단이 아닌 중도의 연기는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출하다.
즉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단멸하지도 않고,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
(이러하기에 먹고 사는 얕은 문제에는 유용하지 않다.)
이것은 엄밀히 보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러하기에 나고 죽는 깊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유용하다.)
그래서 연기는 개념은 실체가 없고 판단은 사실이 아니며 추론은 타당하지 않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극단의 흑백논리는 생멸 상단 일이 래출(래거)하다.
즉 생하거나 멸하고, 항상하거나 단멸하고, 같거나 다르고, 오거나 간다.
(이러하기에 먹고 사는 얕은 문제에는 유용하다.)
이것은 대충 보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하기에 나고 죽는 깊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유용하지 않다.)
그래서 흑백논리는 어떤 개념은 실체가 있다고 하고, 어떤 판단은 사실이라고 하며, 어떤 추론은 타당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 연기에 입각하여 양극단의 흑백논리를 비판하면, 흑백논리를 구성하는 개념 판단 추론을 비판할 수 있다.
단, 방편의 흑백논리로 비판할 수 밖에 없다. 땅에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날 수 밖에 없듯이...
먼저 중도 연기에 입각하여 방편의 흑백논리로 흑백논리의 개념을 비판하면, 모든 개념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기에 실체성이 없다.
다음 중도 연기에 입각하여 방편의 흑백논리로 흑백논리의 판단을 비판하면, 모든 판단은 네가지 오류의 네가지 견해에 들어감으로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의미중복의 오류인 증익견이거나, 사실위배의 오류인 손감견이거나, 상호모순의 오류인 상위견이거나, 언어유희의 오류인 희론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도 연기에 입각하여 방편의 흑백논리로 흑백논리의 추론을 비판하면, 모든 추론은 3단논법이라 언제나 반대의 3단논법제시가 가능하므로 타당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미 개념은 실체성이 없고, 판단은 사실이 아니고, 추론은 타당성이 없으니, 셋으로 구성되는 흑백논리는 허구인 것이다.
이미 허구이니, 치심에 해당하는 모든 종교철학적 의문과 문제가 허구라, 모든 종교철학적 의문과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허구임을 알아 치심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즉 인지적 고통에서 벗어남이다.
다시 방편의 흑백논리도 흑백논리라서 허구인 것이니,
사돈 남말하는 격이고 자가당착이나 인지의 고통을 없애는 효용과 공능이 있는 것이다.
중론은 치심을 치료하는 약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약이 훌륭하여도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약을 주는 사람을 믿어야 약을 먹을 것이다.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복덕이 있어야 한다.
복덕을 갖추어야 믿게 되는 것이다.
복덕이 없으면 복을 지어야 한다. 밥사주고 빵사주어야 믿는다.
행이 시원찮으면 누가 믿겠는가?
그에게 잘하지 못하면 그가 믿겠는가?
위의를 갖추는 것조차 나를 위함이 아니라 남을 위함이니, 믿음을 북돋기 위함이다.
그래서 공자도 겉과 속이 어울려야 한다고 문질삼삼을 말씀하셨던 것 같다.
믿지 않으면 아무리 수승한 방편이라도 소용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을 처음과 끝에 둔 것이리라.
여기서 알 수 있다.
혼자 해탈하려면 복지을 것 없다. 그러나 남을 위하려는 이는 복을 지어야만 한다.
제가 비록 이렇게 이해했으나 여전히 잘 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검증이 필요합니다.
특히 사구 비판의 방식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저 사람은 나쁘다 하면 그것은 판단입니다.
이 말이 어떻게 네가지 오류속에 들어가는 지 제 나름의 이해한 바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사람은 나쁘다 함에
저사람은 나쁘다는 하나의 현상으로 저사람에 나쁘다가 들어가 있어 의미 중복이므로 증익의 오류이고,
저사람을 나쁘지 않은 것으로 하려하면 사실 위배의 오류에 떨어지며,
나쁘면서 나쁘지 않은 저사람으로 하면 상호 모순의 오류에 떨어지고,
나쁘지도 않고 나쁘지 않은 것도 아닌 저사람이 나쁘다 하면 언어 유희의 오류에 떨어집니다.
이렇게 보아 모든 판단은 네가지 오류에 떨어지기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는 않습니다.
교수님이 계셨으면 그 허실과 잘못을 알게 하여 참되고 옳은 이치에 들어가게 하셨을 것입니다.
중론에 대한 것을 너무 늦게 알아 이렇게 중요한 가르침을 분명하게 알 기회를 놓치니 제가 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잘못 안 것이나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그 잘못 안 것과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어 제대로 가르쳐주시면, 정성스런 마음으로 머리 숙여 감사히 듣겠습니다.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되고, 오시는 분들도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상민님이 바쁘신가 봅니다.
모쪼록 바쁜 중에 편안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상민님도 그렇고, 오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으로 합장합니다_()()()_
첫댓글 소크라테스 정도인 사람이 치심을 알 수 있을거라고 하신 부분에서 저는 오히려 맘이 편해짐을 느꼈어요. 저는 한낱 보잘 것 없는 사람이니 완전히 겸손하게 세상을 대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갖으면 부드러운 품성이 길러지는 것 같습니다.
쉽게 거칠게 되지 않아서 왠만한 일에는 화가 나지 않고 좋은 것 같습니다.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따듯한 커피한 잔 마시는 느낌이랄까요?
겸손 자체가 명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겸손을 나눠주시어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교수님께 감사하고 상민님, 청정님께도 감사합니다_()()()_
저도 감사합니다.^^_()()()_
요즈음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으면, 10년 20년 30년 후에도 듣고 있을까 합니다.
그러다보면 정신이 번쩍 차려 집니다.
밖으로 복을 짓고 안으로 마음 밝히는 삶이야말로 지혜로운 삶이라는 생각입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청정님 회향심님 몽우님 감사합니다.
청정님의 노고에 큰 감사와 수희를 바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겠습니다.
합장 _((()))_
중론의 4구비판이 증익 손감 상위 희론견 비판이며, 이미 무착대사께서 섭대승론석에 밝히신 내용이고,
그 사실을 교수님께서 연구중에 알아내시고,
많이 기쁘셨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참 어려운 내용인데도 감히 이해가 될 듯하니 환희심이 납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합장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