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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성경공부의 주제를 왜 “예수님을 새롭게 다시 만납시다!”로 정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우리 모두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기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교회생활을 통해서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만났고, 기독교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들은 서구문화에 녹아들어 있는 기독교문화를 통해서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구체적이든 모호하든,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일정한 상(像:image) 또는 관(觀:view)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 성경공부 주제를 “예수님을 새롭게 다시 만납시다!”로 정한 이유는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예수상(像) 또는 예수관(觀)을 재조명해보자는 것입니다.
▷ 왜 기존의 예수상(像)을 재조명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기존의 예수상(像)이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신교 주류 교단들의 교인수 감소가 그 구체적인 증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서구교회만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고, 한국교회가 당면해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미국 성공회 뉴왁(Newwark) 대교구 주교로 24년간 봉직하다가 지난 2000년에 은퇴한 존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감독은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결코 가슴이 예배할 수 없을 것이다”(the heart will never worship what the mind rejects)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는데, 그의 말대로 많은 현대인은 기존의 예수상(像)을 머리가 거부하기 때문에 가슴으로 예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떠났거나, 아니면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보다 설득력 있고 앞뒤 조리가 맞는 새로운 예수상(像)을 찾으려고 갈망하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 캐나다 리자이나(Regina)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던 오강남 교수가 쓴 <예수는 없다>라는 책이 한국에서 크나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비(非)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저는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상(像:image) 또는 관(觀:view)을 재조명하여,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수상(像)과 예수관(觀)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둘째,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는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상(像)과 예수관(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교회사에서 있었던 아리우스 논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리우스 논쟁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는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예수상(像)과 예수관(觀)에 대한 논쟁이었는데,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신적 지위”가 쟁점이었습니다. 당시 알렉산더의 주교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높였고, 아리우스 장로는 하나님에 가까운 위대한 인간으로 높였습니다. 둘 다 예수님을 높이는데 취지가 있었으나, 높이는 정도에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주교는 예수님이 처음부터 하나님이었다고 주장한 반면,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하나님에 가까운 위대한 인간이기는 하나 여전히 인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신(神)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 가까이 접근한 위대한 인간(人間)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히 예수님의 신적 지위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어느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예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신(神)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통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는 철저히 무능한 죄인으로 이해되는 반면,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예수님에 대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것뿐이고, 인간은 그 결과로써 죄와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하나님에 가까이 접근한 위대한 인간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통 인간과 질적으로 같은 인간으로 이해하되, 보통 인간들이 쉽게 다다르지 못하는 위대한 삶의 경지에 앞서 이른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보통 인간보다 훨씬 앞선 위대한 삶을 살아가기는 했지만, 보통 인간들도 노력하기만 하면 (최소한 잠재적으로는) 누구나 예수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예수님에 대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앞서 사신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이고, 그 결과 인간은 예수님의 길벗, 즉 도반(道伴: fellow traveler)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는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상(像)과 예수관(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상(像)과 예수관(觀)의 차이는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에까지 차이를 가져옵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신뢰성 상실’이라는 위기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기는 해도 살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고 살지는 않는 (혹은 못하는) 것일까요? (‘예수를 산다’는 다소 비문법적인 표현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표현의 상대어로 사용하기 위해 ‘예수의 삶을 산다’는 표현을 축약한 것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뿌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예수상(像)과 예수관(觀)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인간 대신 죽었다. 인간은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이 있다”는 기존의 기독교 교리 때문입니다. 이 교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고 예수를 살지 않아도 되는 명분 혹은 빌미를 제공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라면, 보통 인간은 예수님처럼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만약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인간 대신 돌아가셨다면, 죄인인 인간은 굳이 예수님처럼 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만약 구원이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지 행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처럼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행함으로 구원받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이러한 논리가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 한국교회는 사회적 신뢰성을 상실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새로운 예수상(像)과 예수관(觀)을 세우고 그것에 기초하여 새로운 삶의 비전과 태도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 그렇다면 기존의 ‘교리(敎理)’를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기존의 교리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하자는 것입니다. 교리라는 것은 기독교 전통이 낳은 신앙고백이요 일종의 해석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있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신앙고백과 해석이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신앙고백과 해석을 먼저 만났습니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전기’(biography)가 아니라 ‘해석’(interpretation)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제가 <예수님을 새롭게 다시 만납시다>라는 제목의 성경공부를 통해 시도하고자 하는 바는 그 순서를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먼저 지난 2천 년간 교회에 의해 덧입혀진 ‘교리’라는 안경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해석을 재조명해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래의 순서를 따라가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역사적 상황들과 경험들이 그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는지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러한 교리가 오늘 여기에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보다 생동감 있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즉,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체험으로 기존 교리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 도대체 기존의 교리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번 성경공부 전체를 통해서 찾아야 할 과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문제만을 제기해 보겠습니다. 혹시 아래의 사진을 기억하시겠습니까? 이 사진은 멜 깁슨(Mel Columcille Gerard Gibson)이 감독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에서 주연을 맡아 예수 그리스도로 출연했던 배우 제임스 카비젤(James Caviezel)의 사진입니다. 이 영화는 “예수는 왜 죽었는가” 하는 ‘신학적’ 질문보다 “예수는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사실묘사’에 집중했었습니다. 그런데 멜 깁슨이 심혈을 기울여 복구했다는 역사적 사실 가운데 사실과 분명히 다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인공인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멜 깁슨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결국 “그윽하면서도 압도적인 눈빛을 가진”제임스 카비즐을 캐스팅 했는데, 그는 ‘잘생긴 백인 미남’ 이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이 백인일 수 있겠습니까?
세계적 명성과 1백 20만 부의 부수를 자랑하는 미국의 과학전문지 <파퓰러 미케닉스>(Popular Mechanics)가 2002년 12월호 커버스토리로 ‘예수의 얼굴’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뒷면의 사진 참조). 종교와 과학의 만남으로 시도된 이 작품은, 영국과 이스라엘에서 법인류학, 고고학, 컴퓨터 최첨단 기술을 전공하는 학자들을 동원하여 서기 1세기경 갈릴리 지역에 살았던, 전형적인 30대 유대인 남성의 얼굴을 복원하였습니다. 그 사진 속의 예수는 뭉뚝한 코에 까만 곱슬머리, 짙은 갈색 피부를 한 전형적인 농사꾼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과학자들이 복구한 뒷면의 얼굴이 실제 역사적 예수의 얼굴은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일한 연령대의 유대인 남성의 얼굴일 뿐입니다. 컴퓨터 그래픽에서 얼굴 근육 위에 살을 붙이는 과정은 기술도 다양하고 그에 따라 결과에 큰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가령 미간이나 코와 입술 사이의 거리를 얼마나 길게 하느냐에 따라 모습이 확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예수님의 얼굴은 사실 서양 예술가들의 상상력과 인종적 편견이 개입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제껏 예수님을 파란 눈에 금발을 한 서양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진 속의 예수님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금방 깨닫게 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오뚝한 코에 깊고 푸른 눈을 가진 금발머리 서양 청년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생각해 왔을까요? 그건 우리가 서양 사람들이 그린 예수 얼굴(像)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림 속에 그려진 예수상(像)만이 아닙니다. 생각이나 이론에 그려진 예수상(像)이 더 큰 문제입니다. 소위 서구 신학계가 형성해 온 ‘교리’가 그리고 있는 예수상(像)이 더 큰 문제라는 말입니다. 파란 눈에 금발머리를 가진 예수, 그런 예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껏 서구의 그리스도론이 말해 온 예수, 그런 예수 역시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역사적 예수’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신약성경과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하나의 합의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합된 고백의 구조로부터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사유하는 분석적 사고 구조로의 이행입니다. 그분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할 때에는 죽음과 부활 이후에 경험한 그분을 일컫습니다. 반면에 그분을 가리켜 예수라 할 때에는 부활 경험 이전의 인물을 일컫습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 도상의 환상 속에서 체험한 분이 그리스도라면, 갈릴리에서 함께 살았던 열두 제자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한 바로 그 인상적인 인물은 예수입니다. 그래서 ‘환상 속의 그리스도’가 신앙과 고백 차원의 인물이라면, ‘기억 속의 예수’는 역사의 지평에 서있던 한 인간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제의화(祭儀化) 된 예배의 대상이라면, 예수는 인간미를 물씬 풍기던 실제 인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그 분의 신성(神性)을 염두에 둔 말이라면, 예수는 인성(人性)을 전제한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그리스도’가 하늘에 거한다면, ‘역사의 예수’는 이 땅의 사람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교회는 그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선포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와 ‘신앙의 그리스도’ (faith of Christ)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음을 잘 설명해 줍니다. 하지만 ‘신앙의 그리스도’의 뿌리에 ‘역사의 예수’가 있음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역사의 예수’를 간과한 채 ‘신앙의 그리스도’에만 관심 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그 뿌리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예수와 상관없는 그리스도를 신앙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 이상이지만, 그렇다고 예수 이하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예수’는 누구일까요? 그는 대체 누구였기에 바울을 비롯한 역사의 수많은 인물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 전체를 헌신토록 하였을까요? 아니, 무엇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가 되었고, 또 신앙의 전부가 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무엇 때문에 그를 그리스도라 믿었으며,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를 그리스도라 고백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는 진정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새롭게 다시 만납시다!”는 성경공부 전반부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성경공부는 그 성격상 학문적인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우회해 우리 신앙의 뿌리를 찾는 길은 없습니다. 아무쪼록 이 성경공부를 통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재발견하고, 나아가 오늘 여기서 “예수 믿음이(believer)”를 넘어 “예수 따름이(follower)”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비전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왜 예수를 ‘믿는’ 것을 넘어 예수를 ‘살아야’ 합니까?
두레마을 공동체를 이끌고 계신 김진홍 목사는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잘못)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일은 바로 믿지 않으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김 목사님과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의 문제가 예수를 올바로 믿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만 하지 닮으려고 하거나, 따르려고 하거나, 살려고 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구원자라고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은, 이러한 믿음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태도가 기독교의 전통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기독교 역사에서 첫 번째 이단은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을 주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처럼 보이다” 혹은 “~인 것처럼 나타나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어원을 가진 가현설은, 예수님이 인간인 것처럼 보였고 인간인 것처럼 나타나기는 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겉모양만 인간이었지 실제로는 인간이 아니었고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인간”이었음을 부정한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가현설이 이단사상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독교의 표준적인 신조(信條)처럼 생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었음은 물론이고 “참 인간”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크리스마스 사건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크리스마스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초인간, 즉 슈퍼맨(superman)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통 인간, 참 인간이 되신 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사건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초인간이 아니라 참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던 이유는 “나도 인간이었다. 보통 인간인 나도 그렇게 살았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살 수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것을 몸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예수가 그리스도다, 구세주다”라는 믿음에만 안주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넘어 예수를 닮고, 닮음을 넘어 예수의 삶을 따르고, 그래서 우리가 삶으로 예수를 살아내는 것, 이것이 우리 믿음 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이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우리네들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시도도 해보지 않는 것과 시도하다 실패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패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용납해 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칭찬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첫 술을 뜨지 않으면 결코 배고픔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닮고, 따르고, 살아내는 것은 멀고 요원한 길이지만, 만약 우리가 이 길을 향해 첫발을 내딛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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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오래 전에 썼던 <예수님을 새롭게 다시 만납시다!>라는 제목의 <역사적 예수> 성경공부 1강 자료입니다. 어제 수업 중 질문에 답이 될 것 같아서 참고하라고 올립니다. 단 사진은 생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