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일원상 서원문의 ‘우리 어리석은 중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어리석은 중생’에서 ‘우리’에는 나와 너 모두가 포함된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리석은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의 다른 표현이 어리석음이며 어리석기에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일원상 서원문의 내력에 ‘제불·조사·범부·중생의 성품’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보통 깨닫지 못한 존재를 범부중생이라 하기에, 범부와 중생을 어리석은 중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불·조사는 ‘우리 어리석은 중생’의 범주에서 빠지게 될까요?
만일 제불·조사가 ‘우리 어리석은 중생’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일원상 서원은 범부·중생에 국한된 서원이 되고 맙니다. 제불·조사는 일원상 서원과는 무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어리석은 중생’에는 제불·조사·범부·중생이 다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첫째, ‘우리 어리석은 중생’의 중생은 마음 가진 뭇 생령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불·조사·범부·중생이 다 뭇 생령인 중생인 것입니다.
둘째, 동체대비의 마음에서 보면 범부중생의 어리석음이 제불조사의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불조사는 범부중생이 잘하면 자신도 따라서 기뻐하고 범부중생이 잘 못하면 자신의 일로 여기어 안타까워하는 존재입니다. 만일 제불조사가 중생심을 초월해 버리면 중생이 왜 괴로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중생을 도와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법신불 일원상에서 보면 깨달은 제불·조사라 할지라도 완성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불·조사는 수행이 탁월할지라도 계속 수행해 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대종경 요훈품 6장에서 “자기가 어리석은 줄을 알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지혜를 얻을 것이요, 자기가 지혜 있는 줄만 알고 없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지혜 있는 사람이라도 점점 어리석은 데로 떨어지나니라.” 하십니다.
진정한 수행자는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존재이므로 항상 어리석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도 궁극의 수행자요 뒤로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수행자이지만
법신불 일원상 자체가 아니라 법신을 구현하는 원만보신불입니다.
대각여래위 자체가 그대로 법신불 일원상은 아닌 것입니다.
소태산도 수행자이지 진리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격을 체받는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법신불 일원상 전에 서원을 올릴 때에는 어리석은 중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소태산 당신도 진리를 향해서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서원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중생’과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9년 3월 30일 첫 상경하여 몇 일간 머문 곳이 성성원의 집입니다.
이 성성원의 부군이 진대익으로 그는 경성에서 의사로 개업한 사람이었으며,
소태산 대종사의 법을 좋아하여 부인인 성성원의 교화사업을 후원하였으며 성성원을 따라 의사로써 바쁜 생활 속에서도 익산총부 정기훈련에 참여하곤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일본 유학을 하고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여 경성 경복궁 옆 창성동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기에 자신이 지식이 있다는 상으로 배우지 못한 사람을 무시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진대익은 ‘일원상 서원문’을 읽으면서도 한 대목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에서 ‘어리석다’는 것이 자기와 맞지 않는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나로 말하면 대학을 나왔고 전문의까지 딴 박사인데, 내가 어리석다면 이 세상에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리석다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지 않은가?”하고
어리석다는 단어를 빼고 '우리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이라고 읽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가 진대익을 불러 요즘 공부하는 것이 어떠냐고 묻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어리석은 중생에 대하여 의문이 생깁니다. 제가 왜 어리석습니까?”
소태산 대종사가 진대익에게 되묻습니다. “30년 전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였지?”
“임실에서 보통학교 다녔습니다.”
“그래, 그러면 70년 전에는 어디 있었지?”
“제가 아직 나이가 50도 못 되었는데 70년 전에는 어디 있었겠습니까.”
소태산 대종사는 父母出生前의 자리를 물었던 것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법신불 일원상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통해 시공의 세계로 태어나기 이전 자리를 물으신 것입니다.
삼세의 다생겁래로 변화 중에도 여여한 자리를 물으신 것입니다.
진대익은 자신의 육신이 나온 것이 시작이고 죽으면 없어지는 것으로 알다가
시공을 초월한 본래면목의 자리와 이 자리로 삼세와 다생겁래로 변화하는 이치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서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일원상은 불변하는 유상과 변하는 무상이 하나로 관통하고 있는 두렷한 자리입니다.
父母出生前의 자리와 관련된 예화로 팔타원 황정신행 선진이 돈암동 회관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처음 뵈올 때의 문답이 있습니다. 팔타원 황정신행의 구도역정기의 한 대목입니다.
당시 지식이 있는 신여성이었던 황온순이 시골 촌양반 모습의 소태산 대종사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부처되는 공부를 합니까.”
“내가 가르쳐 주지요.”하시며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며 “이 시계가 어디로 돕니까?”
“오른쪽으로 돌지요.” “몇 번 돌면 하루가 됩니까?” “스물 네 번입니다.”
“며칠 동안 돌아야 한 달이지요?” “30일 돌면 한 달입니다.”
“몇 달 돌면 일 년이지요?” “열두 달되면 일 년입니다.”
이처럼 어린 아이도 다 알 수 있는 것을 물으신 후 다시 묻기를
“사람이 얼마를 살아야 많이 사는 것입니까?” “일흔 살을 살면 많이 살지요.”
“그렇지요. 부처되는 것은 내가 가르쳐 줄 것이니 이완철 교무만 만나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를 살아야 많이 사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은 불생불멸의 자리를 물으신 것입니다. 결국 이 대화는 시계를 인용하여 생사 변화하는 무상 자리와 더불어 생사를 초월한 불생불멸의 유상 자리를 문답한 것입니다.
결국 유상·무상의 일원상 자리를 모르면 지식이 있든 없든 다 어리석은 중생입니다.
또한 깨달았기에 더욱 자신이 어리석은 줄 알고 끝없이 일원상으로 서원해 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일원상 서원문의 ‘우리 어리석은 중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원불교의 가장 핵심 경전인 정전을 강의합니다.
원불교를 신앙하고 수행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강의가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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