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26,1-6; 마태 7,21.24-27
+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기원후 373년, 지금의 이탈리아 밀라노 지방의 집정관으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전임 주교가 선종하자 후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과 정통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발생하자, 집정관인 암브로시오 성인이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예비 신자이던 암브로시오 성인이 ‘대화를 통해 평화와 화해를 추구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하자 어린이 하나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뽑자!”고 소리쳤고 양측 신자들이 모두 다 찬성하여 주교로 선출되셨습니다.
사양하던 성인은 결국 승복하였고, 우선 세례를 받고 8일 뒤인 373년 12월 7일, 바로 오늘 주교품을 받으셨습니다. 주교가 된 후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학생도 되기 전에 스승이 되었구나. 배워야 할 내가 가르치게 되었구나!” 그러면서 성경 공부에 매진하셨고, 나중에 후계자가 된 성 심플리키아노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웠습니다.
39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주민 7천 명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서한을 보내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참회하고 당분간 성당 출입을 금하라고 했습니다. 황제가 이를 묵살하고 부활절에 성당으로 행차하자 성인은 성당 문 앞에 서서 이를 저지했습니다. 성탄절에 다시 찾아온 황제에게 또다시 성인은 출입을 막고 학살에 대한 사죄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황제는 굴복하여 사죄했고 성인으로부터 보속을 받았습니다.
또한 동방교회의 전례 양식과 기법을 도입하여 전례를 개정하셨는데 이를 암브로시오 전례라 하며 아직도 밀라노 교구에서는 이 양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암브로시오 성인에 대해 고백록에서 말씀하신 대목을 무척 좋아하는데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에 암브로시오 성인을 찾아갔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가 지닌 희망이 무엇일까. 탁월한 그가 유혹과 맞서 어떠한 투쟁을 하고 있을까. 역경에 대해 그의 위로는 무엇일까. 영성체할 때 그 마음의 그윽한 일이 어떠한 즐거움을 맛볼까.
나로서 이런 일들을 짐작할 수도 없고,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이 역시 내 고민이나 내 위험의 깊이를 몰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의 아쉬움을 돌보는 그이에겐 줄창 일이 밀려서 내가 물어볼 것이 있고, 그러고 싶은 때가 있어도 언제나 나는 그의 입과 귀에서 멀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없을 때면 그는 간단한 식사로 몸을 돕든지, 아니면 독서로 정신력을 기르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 그의 눈은 책장을 젖히고, 마음은 뜻을 새겨 나가는데 그 혀와 목소리만은 쉬고 있었습니다.
그의 주교관은 누구에게나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또 찾아왔다고 그에게 전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따금 우리가 가서 보면, 이 식으로 말없이 독서하였지 다르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한참을 말없이 앉았다가 – 그렇게도 열중해 있는 이를 누가 감히 번거롭게 하오리까 – 조용히 자리를 물러나오곤 하였습니다.”(고백록 6,3)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과 복음 말씀이 연결되는데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입니다. 결국 신의를 지킨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매일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예비 신자 시절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교가 되셨는데, 그것을 전한 사람은 어린아이였습니다. 황제와 대립하려고 작정하신 것도 아니셨지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황제에게 “황제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지 교회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훈계하셨고 그가 참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스스로 내어드린 기도와 전례, 그리고 독서에서 흘러나온 온유하고도 강인한 힘이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행하는 것이 곧 하느님 뜻이다’라는 교만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나 없어도 하느님 뜻은 이루어진다’는 방만함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댓글 새벽에 십여일만에 신부님강론을 보다보니 동영상도 올라와 있네요
글보다 소리가 강론의 뜻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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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는 여러 교우들ㅇㅣ 더쉽게 접하는 방법으로 다음카페보다 유투브채널을 이용하시는게 어떨까합니다
이런것을 마케팅에서는 채널 즉 유통경로라하는데 유투브가 다음카페보다 접근이 쉽지 않겠습니까?
저도 다음까페 신부님강론 들어갈때 사무원에게 부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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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채널 이용시 예상되는 부작용이 있겠으나 많은 교우들이. 쉽게 접할수 있다는 한가지로 다 이해되리라 생각됩니다
유투브채널을 의식하실 필요없이 그저평소 강론 하시는대로 올리시면 될것같습니다만 신부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동영상까지 생성되어 올라온것을 보고 한말씀 드렸ㅈ습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황비오드림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여 주신 내용 깊이 생각하고 논의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