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배(빌 길버트/류광현 옮김) -02-
●제1장 죄없는 전쟁 희생자들과 그들이 겪은 공포
미 해군의 미조리(Missouri)함과 4척의 구축함, 2척의 중량급 순양함, 4척의 로켓함으로 구성된 대 선단이 적의 포화에 대응사격을 가하며 해 안선을 향해 접근하고 있을 때, 필리델피아 출신 37세의 한 상선의 선장 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와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과 적군 포격의 긴 박한 위협 속에서 운명의 부름을 맞게 된다.
한국전 개시 6개월 만인 1950년 크리스마스 때, 레너드 라뤼(Leonard LaRue : 생소한 외국명은 가능한 한 미국식 발음을 따른다. 역자)선장은 북 한 땅 216킬로 깊숙이 있는 홍남 부두에 선령(船齡) 5년의 만 톤 급 화물 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 호를 정박시키고 갑판 위에 서 있었다.
"나는 망원경으로 해안에 펼쳐진 참상을 보았다. 북한 피난민들이 부두로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짐들을 몸에 메거나 수레 위에 싣고 끌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마치 놀란 병아리 같은 아이들도 보였다." 라고 선장은 후에 술회한 적이 있다.
그가 본 군상은 거의 10만에 가까운 공포에 질린 북한 피난민들,ㅡ모든 연령의 여자들과 아이들ㅡ 전쟁 때마다 생기는 죄 없는 희생자들이었다. 자기들 편에 마땅히 서 있어야 할 북한 민간인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잡히면 목을 베어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중공군을 피해 피난민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중공군은 북한 민간인들이 미군과 연합군을 도와주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때 수백 수천 가정들의 비극이 그 부둣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1남 2녀를 둔 29살 어머니가 2살 된 여아는 등에 업고, 한 손으로는 5살 된 아들 두혁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10살 된 딸 군자를 잡은 남
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들은 홍남에서 96킬로 떨어진 원산에 살고 있었다. 다이아몬드와 기타 보석을 파는 보석상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악화되자 공산정권의 공포를 피해 가족의 안전과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탈출하려고 원산을 떠나기로 운명의 결정을 했다.
필사적인 탈출을 위해 혹독한 추위와 눈 덮인 길을 무릅쓰고 걸었다. 김정희의 조카인 피터 켐프(Peter Kemp) 소령은 현재 미 육군 소령으로 복무하고 있다. 그는 현재 서울에 살고 있는 79세의 진외숙모 김정희에게 필자가 궁금해 하는 질문을 전했다. 이제 필자는 그녀가 겪었던 이야기를 듣고 재구성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 남편의 부모를 원산에 두고 떠났다. 남편의 남녀 형제들 은 이미 인민군에 징집되어 있었다. 김정희의 가족은 시베리아 국경 근방에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두고 떠나야만 했다. 그들이 가족을 두고 떠날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피난을 갔다가 몇 개월 안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UN군이 후퇴하고 있었지만 잠시일 뿐 피난을 갔다가 곧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김정희나 그녀의 남편 이만식은 그들의 부모나 다른 가족을 그 이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김정희는 자기 조카 캠프 소령에게 이렇게 회상하며 말했다. "피난길은 영원히 끝이 없어 보였단다. 구름은 짙게 깔리고 날씨는 혹독하게 추웠지... 그녀의 기억에는 그 여정이 최소한 이틀 아니면 그보다 훨씬 더 걸렸다고 했다. 안전과 자유를 찾아 나선 필사적인 여정의 첫 발자국도 끝내지 못하고 도중에 죽은 피난민들의 시체를 보며 걸었는데, 피난길에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홍남까지 걸어가면서 공산정권의 철권청치에 대한 반감을 표시했다. "북한 사람들이 발걸음으로 투표를 했다"고 흥남철수로 구출된 사람들이 훗날 진술한 것이 사실임을 증명한 것이다.
홍남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피난민들은 비행기 기총소사와 폭격을 당했다. 김정희는 그것들이 미국 비행기인지 소련 비행기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수차례 도로변에 뛰어들어 넘어지며 몸을 피했다. 완전히 노출된 피난민들에게 급강하하여 폭격을 가하는 비행기를 피하느라 부모와 자식들이 서로 떨어질 뻔했다.
홍남에 도달하자 부둣가는, 피난민들을 군 수송선에 타지 못하도록 군인과 피난민들을 갈라놓는 과정에서, 서로 밀치고 떠밀며 일대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군인들의 승선이 완전히 끝난 다음 아직 해변에 머물고 있는 미 보병 3사단 장병들은 피난민들을 다른 배에 태워 흥남항을 빠져나가 한국 남단의 항구도시 부산을 향해 항해하도록 돕고 있었다.
지평선까지 까마득히 늘어서 있는 피난민들의 거대한 행렬이 시시각각으로 홍수처럼 불어나고 있을 때, 김정희의 남편은 가족의 먹을거리를 찾아 오겠다고 했다. 이만식은 아내에게 "여기 서서 기다려요! 바로 돌아올 테니..." 당부하고는 딸 군자를 데리고 나섰다. 그가 떠나자 피난민들이 엄청나게 많이 불어났고, 미군 함정이 어느 순간 곧 떠날 거라는 공포감에 군중들의 다툼은 점점 격해졌다. 피난민들은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배를 타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무슨 배인지, 어디로 가는 배인지. 배를 타면 어떤 운명에 처해지게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오직 한 가지 사실은 저기 떠 있는 배 한 척, 무슨 배든지 상관 없고, 그것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이었다.
김정희는 자신을 에워싸는 군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빨리 앞으로 나가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남편이 그 자리에 꼼짝말고 기다리라고 했으니 만일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서로 떨어지게 될까봐 몹시 두려웠다. 원산에서 같이 나온 이웃 사람들마저 안절부절못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갑판 위에 올라간 사람들의 조급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군중의 떠미는 힘이 이 세 모녀를 미 해군의 "LST" (병사, 전차 등을 운반하는 상륙용 배의 약자- 역자) 쪽으로 밀어붙였다. 수 만명의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에게 소리쳤다. "빨리 타요. 이제 막 떠나요. 이 배가 마지막 배요!"
1950년 흥남철수를 목격했던 사람들은, 1975년 미국이 월남전 막바지에 미국 요원들의 철수를 끝내고 떠나려고 할 때, 월남 사람들이 미 대사관으로 몰려와서 지붕 위로 올라가 미군의 헬리콥터로 구출받은 절박했던 드라마의 장면을 방불케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흥남부두에서 김정희 모녀는 사실상 군중에 떠밀려 LST를 탔던 것이다. 그녀는 초초하게 사방을 둘러보며 남편과 딸 군자를 찾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엔 그녀가 남편과 딸을 평생 동안 찾아 헤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80이 다 된 지금도 그녀는 떨어진 가족들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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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난 박정이란 여학생은 항구의 물결에 출렁대고 있는 수많은 고깃배들 중 하나라도 탈 수 없을까 하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면서 어머니와 함께 부두에 서 있었다.
마침내 그녀를 포함하여 빈틈없이 빽빽이 피난민을 태운 작은 어선이 흥남부두를 떠나려고 했으나, 그 고깃배는 수면 위 겨우 10여 센티미터 위로 떠가는 상태였다. 결국 그들이 등에 지거나 소달구지로 실어온 피난보따리 전부를 배 밖으로 던져버려야만 했다. 박정 소녀는 눈물을 머금고 오빠가 아끼던 아코디언과 기타를 바다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 두 악기는 2차대전 종결 후 공산정권하에서 5년 동안 비참한 생활을 할 때 가족들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던 아주 소중한 물건들이었다.
박순이란 또 다른 여학생(박정과 친척은 아님)은 가족이 흥남에서 배를 타려면 즉시 떠나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약 8킬로 떨어진 함흥 학교에서 트럭을 타고 급히 빠져나왔다. 박순의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최초의 기독교 목사로서 온 가족이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이었다. 가족의 신변이 위험하니 피신해야만 한다는 전갈이 그들에게 전해졌다. 학교 직원들이 그들 가족과 나머지 학생들을 홍남까지 트럭에 태워 가겠다고 했으나, 박순의 어머니는 완강히 거절했다. 몸부림치며 울면서도 엄마는 건설회사 직원인 아빠와 독자인 아들과 집에 남겠다고 고집했다. 할 수 없이 박순은 가족과 헤어져 동급생들과 함께 이미 피난민으로 꽉 찬 홍남 쪽 차도로 트럭을 타고 갔다. 박순은 처음으로 가족과 이별하게 되었다.
박순은 후에 메릴랜드 주 켄싱튼(Kensington) 에서 남편과 운전학교를 운영하며 운전교사와 사무 일을 겸하여 일하다가 은퇴했다. 그녀는 회상하기를, 당시 학생들은 모두 3일 내로 함흥시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사실은 그 후 모두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다른 피난민들이 겪은 고난을 살펴보자. 철수 작전 4개월이 지난 1951년 4월 14일자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The Saturday evening Post)>지에 애슐리 홀시(Ashley Halsey Jr) 기자가 기술한 바에 의하면, "오직 바이올린 하나만 갖고 온 남자, 재봉틀을 머리에 이고 배다리를 비집고 건너오려는 여인, 사람이 타야 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온 가족이 끙끙대며 피아노를 끌어올리는 사람들 즉시 갑판 하부(下)는 다리를 펼 수도 없이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찼다. 늦게 탄 사람들은 러시아워 때의 버스나 지하철처럼 줄곧 서 있어야만 했다. 3살짜리 여자 아이는 살아있는 병아리 한 마리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해안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사관들과 선원들은 그때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193대의 미 해군함정, 상선과 화물선들, 작은 어선들이 흥남항을 꽉 채우고 있는 중에 특별히 그들의 배가 역사적으로 가장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실상 그들의 배와 그 배가 이룩한 영웅적 행위는 해군 작전상 어떤 행위가 영웅적인 것인지 새로운 표준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포학한 현대전에서 벌어지는 절망과 혼란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장면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대규모 해상 구출작전의 클라이맥스의 순간이었다. 이 작전은 10년 전 불란서 던커크(Dunkirk) 해안에서 나치스의 추격을 받으며 십만여 명의 연합군을 철수시킨 그 기적적인 성공과 맞먹는 것이었다.
미군의 방어 진지로부터 불과 6,000야드(약 5,400미터) 거리의 전방에 12만 명의 인민군과 중공군의 대 병력이 피난민들을 사살 또는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미군을 향하여 맹렬한 공세로 접근하고 있었다. 피난민들 앞에는 망망한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 유일한 희망은 안전과 자유를 찾아 한국의 남단 부산항으로 탈출하는 것뿐이었다.
흥남 항구의 사태는 새로운 세계전쟁 중에 최근에 터진 폭발적인 위기 국면이었다. 개전 후 6개월간은 위기와 승리, 놀랄만한 반전을 거듭하며 숨 막히게 급변하는 사태의 연속이었다.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전쟁이 또 터졌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