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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시 126: 1-6>
<Yesterday, Today, and Tomorrow>
<여는 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만드신 하나님>
시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는 시간도 없었습니다. 창 1: 2에 보면 천지창조가 있기 전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creatio ex nihilo, 'creation from nothingness'--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중에 삼라만상을 지으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창조가 있기 전에는 시간도 없었습니다. 결국 시간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영원한 천국이 도래하게 될 때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시간 속에 산다는 사실이야말로 '피조성'과 '유한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시간은 언제나 세 가지 동태로 이루어집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입니다. 시간은 이 세 가지 시제로 끊임없이 나누어지고 또 나누어집니다. 과거는 이지 지나가 버린 시간입니다. 현재는 바로 코앞에 주어진 찰나의 순간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현재로 다가와 과거로 사라질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현재의 시간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현재가 되고, 현재는 다시 과거로 흘러 들어가는 연속 동작을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과거를 기억하면서 추억에 잠길 줄 아는 존재입니다.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그리워하던지, 후회하던지, 슬퍼하던지 하면서 과거를 돌아봅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미래에 대한 희망은 점차 줄어들고 과거에 대한 추억만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과거를 깨끗이 잊어버리자고 수없이 강조하지만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마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나 미친 사람만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지 보통 사람은 늘 과거를 기억하며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잘했든 못했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기뻤든 슬펐든 간에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울 교훈이 있습니다. 잘한 일들은 계속해서 잘해야 할 것이고, 실수하고 실패했던 일은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웃으며 기뻐했던 순간은 오늘과 내일에도 계속 살려야 할 것입니다. 울며 괴로워했던 과거는 이제 "안녕!"을 고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역시 중요합니다. 지금 눈앞에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지 않으면 우리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과거의 시간으로 덧없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아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엡 5: 16은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우리는 언제나 순간순간 주어지는 현재에 정직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지만 과거나 현재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미래는 언제나 기대와 소망을 열어놓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미래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품습니다. 아무리 현실이 각박하고 비관적이라 할지라도 미래는 괜찮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과 관련된 한국말을 깊이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이라는 말은 한문이 아닌 순 우리 나라말입니다. 그런데 '내일'(來日)이라는 말은 한문으로 된 말입니다. 내일을 말해주는 순수 한국어는 이상하게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수 천년 동안 전쟁과 가난과 고통으로 시달리다 보니까 어제와 오늘만 있었지 내일에 대한 소망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늘 어제와 오늘의 문제로 씨름하다보니까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미래의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미래의 소망이 없는 개인은 오늘을 충실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래 역시 귀중합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과 이스라엘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가 바로 대강절인데 우리는 설렘과 기쁨 한 가운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대강절 세 번째 주일에 우리는 시 126편을 본문으로 정했습니다.
시 126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A Song of Ascents)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가 흔히 이 카테고리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 시들은 모두 유대 백성들이 삼대 절기, 즉 유월절과 초막절과 맥추절에 순례자가 되어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갈 때 불렀던 노래라고 해서 이 이름이 부쳐졌다고 합니다(출 23: 14-17; 신 16: 16 참조). 어쨌든 간에 이 시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사용되었던 찬송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시 126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 온 직후에 쓰여진 시입니다. 주전 586년경에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II)가 이끄는 바벨론 제국은 예루살렘 성을 초토화시키고 왕을 비롯한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향 땅을 떠나 약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이국 땅에서 온갖 치욕과 고난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3차에 걸쳐서 약 5만 여명이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시 126편은 언제인지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직후에 쓰여진 시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 126편을 읽을 때 과거와 현재, 미래의 세 시제의 눈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① 과거
제일 먼저, 1-3절을 봅시다.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온, 즉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오게 하신 과거의 사건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들이 예루살렘에 1차로 귀환한 시기가 주전 538년경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 때의 흥분된 체험을 돌아보고 있을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에 빠졌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1절에 보니까 고향 땅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겨지지 않아서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착각을 했을 것입니다. 서로 꿈인가 생신가 해서 얼굴을 꼬집고 허벅지를 꼬집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의 약속대로(사 14: 1-2; 44: 24-45: 25; 48: 20-21; 렘 29: 14; 30: 3; 33: 7, 10-11; 암 9: 14 참조) 바벨론 포로 귀환은 현실로 이루어졌는데 이 때의 경험을 시 126편은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2절에 보니까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웃음'(laughter)과 '찬양'(shouts of joy)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남의 나라에서 종노릇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 당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니 이들이 크게 웃고 기쁨의 찬양을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일제 시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재일 동포들이 광복이 되어서 고향 땅으로 돌아왔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사할린에 강제 징용 갔던 동포들이 고국 땅을 밟았을 때의 감격을 그려보십시오. 그 기쁨과 감격은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꼭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너무 기뻐서 너나할 것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웃고 또 웃으며 기쁨의 찬송을 크게 불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거에 기뻐 웃었던 적이 언젠가 생각해봅시다. 과거에 너무 좋아서 입술에 찬양이 끊어지지 않은 적이 언제였던지 돌아봅시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혹시 웃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얼굴에 기쁨이 사라진 채 너무 경직되어 있지 않습니까? 입술에 찬양은 사라진 채 불평과 비난만 가득차 있지 않습니까? 과거를 돌아봅시다. 우리에게 웃음을 주었던 시절을 기억해봅시다. 우리 입술에 찬양이 떠나지 않았던 그 시절을 돌아봅시다. 그 감격을 되새겨 봅시다!
② 현재
시편 126편 기자는 두 번째로, 현재의 참담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고향 땅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현실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은 잿더미가 되어서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의 제사를 드렸던 예루살렘 성전은 형편없이 허물어져버렸습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마음대로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6-25 동란 때 북한의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을 떠나 피난을 갔던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얼마 후 서울 수복이 있었을 때 사람들은 서울로 되돌아갔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가족들이 살던 옛 집 옛 동네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은 기뻤겠지만 현실은 참담했을 것입니다. 건물들은 다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고 먹을 것 입을 것은 턱없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이와 같은 형편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이와 같이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4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우리 말 성경은 정확하지 않은데 영어 성경 NRSV는 좀더 분명하게 번역해놓았습니다. "Restore our fortunes, O Lord, like the watercourses in the Negeb."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운명을 과거에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셨던 것처럼 다시 한번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 고향 땅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처참하오니 제발 옛날처럼 도와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도 그냥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라 '남방 시내들' 같이 넘치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남방 시내'는 이스라엘 헤브론 남쪽의 네겝(Negeb) 시내를 말하는데 중동 사막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기(雨期)를 제외하고는 늘 물 없이 말라있던 시내를 말합니다. 흔히 '와디스'(Wadis)라고 부르는 이 시내들은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아서 말라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폭우가 내려서 강둑이 무너질 정도로 쏜살같이 흘러내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남방 시내들 같이' 우리를 돌리라는 말은 그 옛날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해주셨던 같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쏜살같이, 그리고 넘치도록 풍성하게 자기들을 구원해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십시다. 혹시 우리의 모습이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같지는 않습니까? 연말연시를 맞아 쓸쓸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실망스럽고 비참하지는 않습니까?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직장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자식들이 속을 썩입니까? 건강 때문에 고생하십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신속하게 그리고 넘치도록 도와달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까? 위기에 빠진 우리를 얼마나 많이 도와주셨습니까? 그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지금 현재에도 도와달라고 간구합시다. 어제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분명히 도와주실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③ 미래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는 미래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피력합니다. 5-6절을 보세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현재 엄청난 시련에 봉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미래의 소망인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예루살렘 성이 폐허가 되어서 비참하게 되었지만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기하거나 주저 앉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이렇게 형편없이 비참하지만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씨앗을 뿌리고 가꾸라는 격려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포기하고 주저앉아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현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6-25 동란의 비극으로 한국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온 나라가 폭삭 망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난감한 현실 앞에서 주저 앉아있지 않았습니다. 정반대로 힘차게 일어났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그랬을 때 불과 몇 십년만에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잿더미 위에서 다시 일어나 우리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오늘 고난과 위기에 빠진 분들은 이 말씀을 들으십시오. 아무리 현실이 비참해도 망연자실(茫然自失) 주저앉아서는 안됩니다! 일어서야 합니다.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을 믿고 재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며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편이 되어 주셔서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눈물이 변해서 웃음이 되게 하시고, 슬픔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씨앗이 자라나서 열매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일어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과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울며 씨앗을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둔다는 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연합군은 수천 명의 전쟁 고아들을 모아서 도와주었습니다. 고아들에게 잠자리를 주고 먹을 것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을 얻어먹은 고아들은 잠자리에 드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연합군 측에서는 문제를 알아차리고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 모든 고아들에게 빵 한 조각씩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고서는 이 빵은 절대로 오늘 밤 먹어서는 안되고 내일 아침까지 꼭 손에 쥔 채 잠을 자야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한 후부터는 놀랍게도 고아들이 잠을 편안히 잘 자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지 못했던 이유는 내일 먹을 끼니를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내일 아침에 굶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에 쉽사리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한 손에 빵 조각을 쥐고 침대에 누웠을 때에는 "아, 내일도 먹을 것이 있구나!" 하는 희망 때문에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미래를 향하여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가 뿌린 씨앗 그대로 열매를 거둔다는 진리를 믿고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과 진실과 성실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닫는 말: 웃음과 기쁨의 찬양을 회복하자>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주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이천 년 전에 아기 예수님을 이 땅위에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어떻게 인류와 우리 자신의 운명이 바뀌어지게 되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현재에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구주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간구하기만 하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눈물이 변하여 웃음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의 찬양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무엇보다도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부지런하게 씨앗을 뿌릴 때 언젠가 기쁨의 열매를 거둔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대강절 기간 동안 어제를 돌아보아 어제의 웃음과 기쁨의 찬양을 회복합시다! 오늘을 직시하며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과 소망을 품고 내일을 기다립시다! 아멘.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
(2) 해방이 주는 기쁨 / 정경환 목사
시 126:1-6
서론 : 오늘은 해방 66주년을 기리는 바로 그날입니다. 우리의 젊은 세대에게는 해방의 날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지만 민족에게 이날만큼 잊어서 안 되는 날도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생일을 잊을 수 없는 것 같이 광복절은 국가적으로 잊을 수 없는 날인 것입니다.
독립하지 않는 나라는 지상에 존속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월이 아무리 지나가도 이 8.15의 해방의 감격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 민족이 B. C586년 바벧론에 잡혀가서 70년 동안 포로생활 하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고레스 왕에 의하여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때, 너무 기뻐서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는 죽음보다 강합니다.
1. 해방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그것은 종 된 삶, 예속된 삶,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1910년 8.23.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한일합방에 조인함으로 그때부터 나라 잃은 백성이 되고 해방되기까지 36년간 슬픈 역사의 주권 없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땀 흘려 농사지은 것 공출로 착취당하고 아버지는 보국대, 형님은 징용으로 전쟁터에 총받이로 누님은 정신대로 끌려가서 위안부가 되고 이름도 성도 빼앗기고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말도, 글도 빼앗기고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애국자는 감옥으로, 지식인들은 조국을 등지고 망명하고 남은 백성은 생존의 권리마저 잃고 확대 ,빈곤, 설움에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교회는 일본귀신들여놓고절하게하였습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방이되었을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2) 해방은 이 모든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잃었던 우리의 주권, 땅 그리고 자유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종살이 하다가 해방이 되었을 때 홍해를 건너서 얼마나 기뻐하였으며, 70년 포수가 끝나고 고국에 돌아오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기뻐하였습니까? 해방의 기쁨은 나라 잃어본 망국의 백성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입니다.
2. 해방은 하나님의 대사였습니다.
3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하였습니다. 유대 민족의 해방은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대 역사의 사건이었다는 말씀입니다. 70년 포수생활은 2세대가 지난 긴 세월이었는데 거기서 해방된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애급 400년 종살이에서 모세를 통해서 이끌어 내실 때도 하나님의대역사로 그들은 가나안을 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조국도 우리 힘으로가 아닌 연합군의 도움으로 해방을 이루었으니 하나님의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은 8/17에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 무수히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8/15일 해방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배후에서 역사를 운전하고 계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해방은 하나님의 큰 역사로 얻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해방도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은 얼마나 큰 역사입니까?
우리가 그리스 도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에서 해방된 그날부터 우리의 심령에는 자유가 있고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소망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롬 8:1-2>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
3. 해방된 자는 남은 형제의 해방을 위해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합니다.
<4-5절>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이것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남은 형제들이 홍수가 넘치듯이 모두 돌아오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결과를 확실하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일을 위해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지난달 우리 민족의 해방을 맞기까지 일제치하에서 얼마나 많은 성도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습니까? 피를 흘렸습니까? 눈물과 핏기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의 이 민족이 받은 영육간의 축복은 수백만 성도의 매일의 새벽기도, 산기도, 심야기도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구원받지 못한 남은 현제, 이웃 위해서 눈물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눈물의 기도가 있을때수많은 영혼이 해방되어 돌아와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먼저 구원빠다은 우리는 또 다른 형제 해방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4. 해방이 가져다주는 축복
1)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하였습니다, 주권, 국토, 자유, 민족혼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2) 이전보다 더욱 자유롭게 잘 사는 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던 1945년의 국민생활 수준을 통계청에서 발표하였는데 당시평균수명 44세,유아사망율은 1000명당 102명으로 세계에서 인도 다음 2위로 높았습니다. 문맹자 77%,이것은 수탈당했던 민족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48년이 된 지금의 우리의 형편은비교할 수 없는 복된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마귀에게 종노릇할 때 모든 것을 잃었다가 구원받고 해방된 후 천국의 축복과 영육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나라의 국방이 튼튼하고 경제가 튼튼해야 하듯이 교회도 튼튼하게 힘이 있어이마귀세력 물리치고 계속 발전,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도하는 파숫군이 많아야 하며, 전도의 군사가 많아야 하며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부흥, 성장해야 합니다. 정지는 후퇴를 의미합니다.
결론 : 우리 모두 해방의 기쁨을 찬송하면서, 감사하면서, 계속하여 이 해방의 축복을 지키고 발전하는 나라, 교회,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