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 5: 8 그리스도의 죽으심
4. 그리스도의 죽으심 ( 5: 7 - 8 )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 -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
본 절은 8절과 함께 우리가 연약하고 경건치 않았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증거 한다.
'선인(善人)'은 원문에 '그 선인'이라는 말로서 앞에서 말한 '의인'을 가리킨다.
1]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 혹 있거니와
본 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한다(Lenski). 물론 문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Lightfoot, Murray).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 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본 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Murray).
이와 같은 본 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본 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 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 격이다. 서론 격이라 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결국 본 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롬 5: 8 그리스도의 죽으심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확증이었다.
요한복음 3: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 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본 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 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J. 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준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 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 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 2),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 14)등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을 위하여'(*, 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는 본 절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어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 '안티'(*, '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 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휘페르'라는 단어의 사용은 매우 적절하다.
3]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 고후 5: 19 -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 요 15: 12-14 -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 요일 4: 10, 19 -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본 절의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슈니스테신'(*)은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무엇보다 본 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슈니스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가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때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때였다.
(1) 아직 연약할 때였다(6절)
(2) 아직 경건하지 않을 때였다(6절).
(3) 아직 죄인 되었을 때였다(8절).
(4) 아직 하나님 아버지와 원수 되었을 때였다(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