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백리 황희 정승 묘소
* 촬영 : 이재익 시인 / 2013. 04. 29.
황희 선생 묘소
* 위치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 18년간 영의정을 지낸 황희 정승의 일화
- 1363~1452, 호 방촌, 본관 장수,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
- 고려 때 성균관 학관 (교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에 은거했다. 두문동 선비들은 의논했다. 이성계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으나 백성들을 생각해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젊고 유능한 인재들에게 벼슬을 권했다. 황희는 이 선배들이 설득에 벼슬길에 나섰다. (태조는 두문동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회유했으나 듣지 아니하자 불을 질렀다. 정조 때 표절사를 세워 그들의 넋을 위로했다.)
-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태종은 왕비 민씨의 두 동생 무구, 무질 형제 (권세만 믿고 안하무인)를 죽였는데 황희에게 신중한 처리를 당부하였던 것. (황희는 이화(태조 이복동생)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게 함- 양녕대군 폐립에 반대하다 남원으로 귀양살이. 세종 때 영의정(69세부터 87세까지 18년간)이 됨. 태조~문종 다섯 임금 사사.
◇ 다리 하나가 길다 할 것이지
- 친구 ; "저기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 하나가 짧네 그려! "
- 황희 ; "여보게 같은 값이면 다리 하나가 길다고 말하지 않고 왜 하필이면 다리 하나가 짧다고 남의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하는가! "
◇ 시비들의 싸움
시비 둘의 말다툼을 듣고 "듣고 보니 네 말이 옳구나!" "음 듣고 보니 네 말도 옳구나!"
조카딸이 "아저씨 그런 대답이 어디었어요. 하나가 옳으면 하나는 반드시 그르다고 대답해야 할 터인데 둘 다 옳다고 대답하시는 것은 사리에 합당하지 않으신 말씀입니다." 음 듣고 보니 네 말도 옳구나!" 세 사람이 크게 웃고 싸움이 끝남.
* 잘했으면 얼마나 잘했으며 잘못했으면 얼마나 잘못했겠는가? 그런 문제에 시비를 가린다면 한편을 좋아할 지 모르나 어느 한 편은 좋아하지 않을 것.
◇ 실 천
- 시골 선비가 황희댁 하인에게 봉변을 당한 것을 하소연하러 왔는데 황희는 미안합니다 라는 한마디 말 뿐이었다. 점심상을 가져온 하인에게 귓속말을 한 것뿐 아무 말이 없는 황희에게 실망하고 저물어서 작별하는데 이미 문제의 하인을 곤장 30대를 쳐서 눕혀놓은 것을 보았다.
◇ 김종서를 나무람
- 김종서가 야인 정벌 후 병조판서가 되어 안하무인이었을 적에 하루는 김종서의 앉은 자세가 몹시 거슬려 하인을 불러 "네 저 병판대감 앉은 교의의 한쪽 다리가 짧은 모양이니 얼른 나무토막을 가져다 괴어 드리도록 하여라." 이 날카로운 풍자에 김종서는 뜰로 내려와 엎드려 사죄하였다. 김종서는
"내가 여진을 정벌할 때 적장이 쏜 화살이 날아와서 책상 앞에 꽂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는데 황정승에게 혼이 날 때에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더라."
김종서에 대해서 너무 엄격하자 맹사성이 물었더니 "김종서를 아끼기 때문이오. 훗날 우리 자리에 앉을 인재인데 성미가 과격하고 기운이 지나치단 말이요." 미리 기운을 꺾어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 관홍대도한 유능한 재상
- 아래 사람에게 반말을 쓰는 일이 없었다. 창밖의 늦복숭아를 이웃 아이들이 와서 따먹어도 "다 따먹지 말아라. 나도 맛 좀 봐야지."
- 사람을 귀천에 따라 구분하는 일이 없었다. 하인의 아이가 종이에 오줌을 싸기도.
◇ 막내딸의 혼수
- 황희 정승이 병석에 눕게 되자 그 부인이 막내딸 혼수를 걱정하니
"그애 혼수는 영남에 사는 광대 바우쇠가 와서 마련해 줄테니 염려마오." 황희가 세상을 떠난 지 3년후 어명으로 공주와 같은 혼수를 하사해옴. 국가 경사시 삼남의 광대를 불러 가무를 즐겼는데 바우쇠는 각종 묘기 후에 꽁무늬에 찼던 수건을 끌러 이 쪽 저 쪽 궁둥이로 가져갔다 가져왔다 하면서
"이것은 황희 정승댁 정경부인 마님이 하도 구차하셔서 속옷 하나를 가지고 막내 따님과 돌려가며 입는 격이렸다." 상감이 감동하여 어명을 내려 혼수를 하사하였던 것. 황희의 임종시의 예언이 적중한 것.
- 왕이 황희를 불러 어느날 새벽에 남대문이 열려서 저녁에 닫을 때까지 이 문으로 드나드는 물건은 모두사서 주겠다는 명령. 그날 하루종일 비가 와 어두운 후 계란꾸러미가 있었으나 그것 마저 하나도 먹을 수없었다(모두 곯아서) "재물은 나에게 태인 것이 아니다."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황희 선생 유적지 임진강변 반구정에 있는 안내문
* 방문한 것은 2013.04.29. 월요일, 반구정의 유적지 운영이 쉬는 날이라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