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매일묵상 | 21.8.11(수)
갈라디아서 3장 24절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의롭다고 하심을 받다”는 말로 한국 교회는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신앙이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아무 수고도 없이 받기에 은혜라고 여깁니다. 결정적으로 그 은혜를 예수의 십자가로 받은 구원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은 ‘의롭게하다’는 동사 ‘디카이오오’의 수동태를 ‘의롭다고 하심을 받다’고 오역하여 생긴 문제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구원 받는다’는 말로 일반화 된 것도 이런 오역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았음을 확신하라고 다그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멘!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에 나오는 그 유괴 살인범처럼 말입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설령 이게 사실이라도 나 위해 죽으신 분을 앞에 두고 “아멘! 할렐루야!” 말한다는 것은 정신 나간 일이 아닙니까? 이게 믿음의 확신, 구원의 확신인가요?
십자가의 당사자 예수님은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 8:34)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자기 십자가가 ‘의로워짐’을 나타냅니다. ‘의롭게하다’의 수동태는 ‘의롭다함을 받다’가 아니라 ‘의로워지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나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를 따르는 자기 십자가가 나를 의로워지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나를 구원하다는 단순 도식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막 5:34)는 그 믿음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따름입니다. 그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처럼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로워지지 않은 사람이 예수 믿은 그 때부터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공허한가요? 의로워지기를 추구하지는 않고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면서 구원의 확신만을 가르치고 있는 작금의 교회 현실이 아닌가요? 믿음 참 쉽습니다. 싸구려 믿음이 판을 칩니다.
사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로 죄를 깨닫기도 합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도 중요하지만 그 죄를 깨달아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 그리고 이 회개를 통해 의로워지려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복음을 통해 율법에 담긴 의롭게 하심을 드러내게 하신 것입니다. 율법에는 단죄와 심판만이 아니라 의로워짐의 기능이 있고 바울은 바로 이 의로워짐을 구원으로 보았습니다(롬 10:10). 이렇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에이스 소테리안)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복음입니다(롬 1:16). 이것이 주님이 오시어 이루신 율법의 완성(마 5:18)입니다. 그러나 그 완성은 ‘이미’가 아닙니다. 앞으로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미래입니다. 오늘의 확신이 아닙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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