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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고향 안동 원문보기 글쓴이: 임동아씨
임동면 (臨東面)
朝鮮 初期 安東府에 속해 있을 때는 臨河縣에 포함되었으며 高宗 時代에 臨河縣으로부터 분리되어 臨東面으로 칭하였고, 1917년 행정 구역 변경으로 원임동을 臨東面으로 개칭하였으며 1974년 7월 1일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행정 구역이 변경되어 輞川 1,2동·枝동·知體 1,2동·馬동·沙月동이 편입되었다. 安東市에서 동쪽에 위치한 본 면을 중심으로 동으로 청송군 진보면과 영양군 입암면에 접하고 남으로 길안면, 서쪽에 임하면, 북으로는 예아년과 접하고 있다. 소재지는 中坪(일명 챗거리)였으나 임하댐 건설로 현재 중평 이주단지가 조성되었으며, 安東市·英陽盈·德靑松으로 통하는 국도가 동서로 관통하며 면내에는 全州 柳氏가 주민의 40% 정도로, 집단부락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 많고, 특용작물로는 고추·마늘·엽연호 등으로 유명하다. 장날은 5일과 10일이다.
면의 중앙부로 흐르는 洛東江의 지류인 大谷川이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흐르며 북부에 두름산(486), 남부의 娥岐山(591) 등을 주봉으로 낮은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경지면적이 협소하며 대부분 임야다. 주로 벼를 재배하며 그 외의 산물로는 배추·무·고추 등이 많이 재배된다. 문화재로는 신라의 고승 의상조사가 창건한 黃山寺가 아기산에 있다. 도로는 면의 남북으로 국도가 통과하며 두 개의 지방도로가 있어서 인접군과 연결된다.
임동면 >연혁
• 임동면은 본래 임하현에 속해 있다가 조선 숙종때 임하현이 분할되면서 안동군에 편입되었고, 1914. 4. 1. 행정구역 개편으로 8개 법정리로 개편되었으며 1974. 7. 1. 안동댐 준공으로 마리 등 7개리가 편입되면서 13개리가 되었다가 1993년 임하댐 건설에 따른 행정구역 조정으로 지례리와 수곡리의 일부가 폐지되었고 1995. 1. 1.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어 『안동시 임동면』으로 개칭되었으며 현재 12개 법정리와 20개 행정리가 있다.
• 중평(中平)1·2리, 수곡(水谷)리, 박곡(朴谷)리, 망천(輞川)1·2리, 고천(高川)1·2리, 지(枝)리, 갈전(葛田)1·2리 마령(馬嶺)1·2·3리, 마(馬)리, 사월(沙月)리, 위(渭)1·2리, 대곡(大谷)1·2리
• 임동면은 안동시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으로 청송군 진보면, 영양군 입암과 접하고 남으로는 안동시 길안면과 임하면 천전리, 북으로는 안동시 예안면과 접하고 있다. 임동면은 원래 임하현에 속해 있다가 조선 숙종 때 임하현이 분할되면서 안동에 편입되었다.
• 안동의 읍지(邑誌)인 영가지(永嘉誌)를 보면 임동면에 관한 부분이 언급되어 있는데 “본디 고구려의 굴화군(屈火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곡성군(曲城郡)으로 고쳤는데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때에 본부(本府)에 예속되었다.” 라고 기록되었다
• 근대에 들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8개 법정리로 개편되었으며 1974년 7월 1일 안동댐 준공으로 마리(馬里) 외 5개리가 편입되면서 13개리가 되었다. 그 후 1993년 임하댐 건설에 따른 행정구역 조정으로 지례리와 수곡리의 일부가 폐지되고 1995년 1월 1일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어 안동시 임동면으로 개칭되었으며 현재 12개 법정리와 20개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 임동면의 소재지는 중평이다.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어서 1989년 신단지를 조성하여 이주하였다. 지명은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주하기 전 중평은 챗거리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옛날 여기에 동해안의 해물과 내륙의 산물들을 거래하는 큰 장터가 있었으며 이 장터에 인마가 끊이지 않고 우마에 채찍질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아서 챗거리라고 하였다.
• 임동면은 비옥한 토질로 다양한 농작물이 경작되고 있으며 주요 농작물로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임동사과와 고추, 담배, 콩, 참깨 등 청정농산물인 산지형 농업이 발전하였으며 천연기념물, 유,무형문화재 15종이 소재하고 있다. 특히 아기산 등산로를 5개코스로 정비하였으며, 지례예술촌, 수애당 등에서 전통고택민박체험 등 임하호 주변에서 가족 휴양지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 근대에 들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8개 법정리로 개편되었으며 1974년 7월 1일 안동댐 준공으로 마리(馬里) 외 5개리가 편입되면서 13개리가 되었다. 그 후 1993년 임하댐 건설에 따른 행정구역 조정으로 지례리와 수곡리의 일부가 폐지되고 1995년 1월 1일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어 안동시 임동면으로 개칭되었으며 현재 12개 법정리와 20개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 다만, 지난 태풍 루사, 매미 등 집중호우로 심해진 임하호 탁수로 어자원의 고갈과 낙동강 하류의 생태계에 악영향을 주어 근본적인 해결이 아쉽다.
임동면 현황
: 4 개 담당(총무.재무.민원.산업담당), 정원 14 명(현원 14 명)
: 경북 안동시 임동면 중평리 840번지 (우 760-853)
: 가구 → 1079, 인구 → 2443명 ( 남 : 1261, 여 : 1182 )
: 대표전화 : 822-3001 , 일반전화 : 822-4807 , 팩스 : 840-4528
: 초등학교 : 1 , 중학교 : 1 , 고등학교 : 0
: 20개 행정리, 12개법정리(중평리, 수곡리, 박곡리, 망천리, 고천리, 지리, 갈전리, 마령리, 마리, 사월리, 위리, 대곡리) 64개반(자연부락 : 80개소)
갈전동(葛田洞)
갈밭·갈전(葛田) 갈대가 무성한 황무지를 개척하여 이룬 마을에서 갈밭, 갈전이라 하며 지금은 굼마·조선마·못밑마 등 작은 자연 부락으로 나뉘어 있다.
못밑·못밑마·지하촌(池下村)·상촌(上村) 옛날에는 갈전의 여러 부락중에서 위에 위치하였던 관계로 上바村로이라고 했으나, 1943년에 완공된 갈전못의 바로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현재는 주로 못밑 또는 못밑마로 불리고 있다. 이 마을은 원래 張氏가 많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韓氏가 주성을 이루며 살고 있다.
조선마·조산촌(造山村) 이 마을 개척 당시에 흙과 돌로 이루어진 무더기가 산처럼 많이 쌓여 있다는 데서 造山村으로 불리었으나, 현재는 주로 조선마로 칭하고 있으며, 전의 흙과 돌무더기는 田畓으로 변하였고, 柳氏가 주성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굼마·항리(港里) 옛날 이 곳에 물이 흐르는 깊은 지대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현재는 柳氏집단 부락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담배·고추 등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봉사골 옛날 鳳山寺가 있었던 계곡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현재 절은 없고, 옛날 탑 해체때 흰 항아리에 은구슬 15개·은수저·명주천이 나왔다고 전하여 온다.
납실·신곡(申谷) 退溪 李 滉 선생께서 이곳을 지나시다가 마을의 지세가 원숭이 형상과 유사하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원래는 柳氏가 많았으나 현재 수몰된 지역이다.
가랫골·추곡(楸谷) 安東과 靑松사이를 왕래하는 산중턱에 위치한 마을로, 가래나무가 많았다 하여 가랫골 또는 楸谷이라고 불리었다 한다.
대실·죽실(竹實) 원래 鄭氏의 竹實派가 40년 전에 자리잡고 살아 이곳을 竹實이라고 불렀으나, 그 후에 이곳에 이주한 사람들이 한자 竹자의 訓을 따서 대실이라고 불렀다.
고천동(高川洞)
양짓마·양촌(陽村) 고천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양지쪽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에 주동으로, 또는 고랫골(高蘿谷)로 불린 때도 있었으나, 다시 陽村으로 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독점·독굴·도구리(陶邱里) 양짓마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옹기를 제작하기 위해 만든 독굴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도구리라고 불리었다. 지금은 별 흔적이 없고 담배나 고추를 재배하며 살았으나 현재 수몰된 지역이다.
평짓마·평촌(坪村) 들 가운데 있는 평화스러운 마을로 평짓마라고 불리었다. 작은 내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에 각각 산재하고 있다. 고추와 담배가 주산물이고 현재 과수원이 마을 앞들에 조성되어 있다.
모싯골·정곡(苧谷) 모시를 많이 생산하던 곳이라 하여 모싯골로 불려졌으나 현재는 가꾸지 않고 있다. 각성이 부락을 형성하여 있고 특용 작물로는 고추·담배를 많이 생산한다.
어신골·어사(於仕) 마을의 지세가 선비를 많이 배출할 모습이라 하여 칭하였다. 또 선비가 은신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1700년 경 柳宣鎬라는 선비가 은거했다는 설도 있다.
덜갱이·덕강(德江) 옛날 신선이 현명하고 우물터를 정해주고 이 우물물을 먹으면 부락이 성하고 자손이 번창한다는 이야기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또 산이 높고 물이 맑아 인심이 온후하고 人德을 갖춘 마을이라는 뜻도 있다. 특히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는 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매년 음력 정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다릿골 독점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피난터로 유명한 곳이라 한다. 마을 한가운데 安心寺라는 절이 위치하고 있는데 옛날 이 절을 세울 때 安氏라는 분이 세워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주로 담배와 고추를 재배한다.
대곡동(大谷洞)
바드래·해천(海川)·상수천(上受川) 마을의 모양이 바다에 배가 떠 있는 형상이므로 海川이라고 하였으며, 산마루에 위치하였다 하여 上受川이라 한다. 또 용굴과 굴터가 있어서 장수와 龍馬가 났다는 전설도 있다. 장수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세운 곳에 말발굽 자국이 윷놀이 판이 형체처럼 바위에 새겨져 있으므로 왕우재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농기구를 제작했다는 곳으로 소부전골이란 이름도 전해오고 있다. 옛날에 기우제를 올렸다는 천혜당이라는 곳이 있어서 날씨가 흐린 날은 산 속에서 물 흐르는 소리와 베틀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다.
샛마·간촌(間村) 대곡동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옛날 안동에서 영양으로 통하는 지름길목이었으므로 소장수 등이 쉬어가던 곳으로 대곡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대곡참나무 大谷洞 새마 북서쪽 300m 지점 산비탈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생으로 참나무과에서는 보기 드문 노거목으로 높이는 약 15m, 가슴 높이 둘레는 5.1m, 터진 가지의 길이는 사방 15.5m 나 된다. 농사일이 조용한 음력 7월 하순이 되면 남정네들은 농로를 보수하고 길가의 잡초를 베며 아낙네들은 집집마다 성심껏 음식을 장만하여 이 나무그늘에서 주연을 베풀었는데, 이 때 마을의 화평을 비는 제를 올리고 흥겨운 하루를 보낸다. 여름철 마을의 크고 작은 모임은 모두 여기에서 열리며 마을 사람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옛날에는 여름 한철이 나무그늘이 서당의 역할을 하였다고도 한다. 봄이 되고 잎이 무성해질 때면 온갖 새들이 날아드는데, 특히 소쩍새(두견새)가 와서 울면 그 해는 풍년이 든다고 하여 온 마을이 기뻐했다고 한다. 건너편에 우뚝 솟은 斗품山과 함께 이 나무는 인심 좋은 大谷의 오랜 역사를 상징한다.
굿마·고사(庫舍·古舍) 옛날 대곡동의 중심 부락이었다는 곳으로 마을 모퉁이에 곳집을 지어 상여를 보관하였기에 庫舍村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굿마로만 불려지고 있다.
한실(寒實)·대곡(大谷) 마을 형성 당시 큰 골이라 하여 한실이라고 칭하고 있다. 옛날 한실 마을과 굿마(庫舍)마을 간에 잡귀를 쫓기 위해 음력 정월 대보름날 횃불전이 남녀노소 없이 참여하여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어느 한쪽이 폐할 기색이면 샛마(間村) 사람들이 약한 마을을 도와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갈마곡·갈골·갈매골·갈마곡(渴馬谷·葛馬谷)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던 곳이란 뜻이 전해지고 있다. 골이 깊고 좁아 맑은 물이 흘러 땀을 씻고 쉬던 곳이기도 했다고 하나 지금은 한적하기만 하다.
가르점·가리점·점못·갈어점(葛於店) 영양과 奉化로 통하는 산마루의 분기점이므로 가르점이라 한다. 현재 외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산비탈에 고추와 담배 농사를 많이 짓고 있다.
돌목이·돌매기·석향(石項) 동네 뒤 고개 마루에 큰 돌 두 개가 마치 성문처럼 놓여 있어서 돌목이라고 했다. 지금은 농사철을 빼고는 사람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다.
금바드래·금수천(錦受川) 장수가 칼을 든 형세의 산이 있고 산마루에 위치한 마을로 錦繡藏甲形像이라고 하며 옛날에는 바다였을 때 배가 통하였다하여 '川'자를 붙였다.
고들마·고도(古道) 옛날 상인들이 영양과 봉화 방면으로 통하던 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근래에까지 소장수들이 英陽에서 安東으로 다니던 유일한 통로였으나 지금은 화물 수송의 발달로 발길이 끊어졌으며, 바드래·금바드래·샛마·새들로 이어지는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복바드래·복수천(福受川) 옛날 마을 뒷산의 큰 古木에 여러 사람이 소원을 빌면 복을 받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여 복바드래로 불려졌다. 현재 여러 성씨가 섞여 고추와 담배농사를 짓고 있다.
새들·신평(新坪) 福受川 海川에 이어 새로 들 가운데 마을이 개척되었다 하여 새들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마을도 복바드래와 같이 고추와 담배가 특산물이다. 양지 바른 산비탈에 생산되는 담배와 고추는 농가 소득원의 주가 되고 있다.
마동(馬洞)
못골·뱀실·사곡(寺谷) 安東댐 건설(1973)로 수몰민 일부가 이곳에 재정착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나 아직도 옛 이름인 뱀실(뱀모양으로 길게 보이기 때문)이 더 알려 졌으며 위치는 면소재지에서 북서쪽이다.
절골·사곡(寺谷) 안동댐 건설로 수몰민 일부가 龍德寺 주위에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절골이라 부른다. 특용 작물로 고추와 담배를 경작하고 있다.
가느래·세천(細川) 폭이 좁고 맑은 시냇물이 마을 앞을 계속 흐른다하여 가느래라고 한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민 일부가 재정착하여 거주하고 있다.
제궁실·제궁골(祭宮谷) 안동댐 건설로 수몰민 일부가 재정착했는데 처음 이 곳에는 두 祭官(祭舍)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주요 산물은 담배를 재배한다.
땅골·지곡(地谷)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민 일부가 이곳에 재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으며 깊은 골이라 하여 땅골로 칭하고 주요 산물은 담배이다.
마령동(馬領洞)
맛재·마령(馬嶺) 마을 모습이 午馬가 짐을 싣고 있는 형국, 또는 말발굽 형상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옛날 이 마을 뒷산에서 노승이 내려와 마을 정자 앞에서 급사하니 동네 사람들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 날 밤 그 노승이 마을 사람들에게 현몽하여 사당을 지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말발굽 모양이 갈라진 자리에 僧堂을 짓고,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제사를 올리고 굿을 하여 영혼을 위로하는 행사가 행해지고 있다. 그런데, 현재 이곳은 우뭇골·창마·가르편·큰마 등 여러 작은 부락으로 나뉘어진다.
호랑이 잡는 마령동의 별신굿 임동면 마령동에서는 10년 만에 한번씩 마을의 당고사를 올린 다음에 별신굿을 갖는다. 이 별신굿은 보통 동해안 영해 지방에서 불러 온 대여섯 명의 무당에 의해서 치러진다. 정월 15일 새벽에 일반적으로 다른 마을에서 올리는 것과 비슷하게 당고사를 올리고 날이 밝으면서 행해지는 별신굿은 풍물의 진신밝기와 걸립, 몇 개의 작은 마을 앞에서 벌어지는 호랑이와 허수아비 잡기, 당에서의 당내림 그리고 무당굿으로 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치는 풍물은 15일 아침부터 망대를 앞세우고 각 마을을 돌아가며 집집마다 지신을 눌러주고 관람한다. 당대는 큰 소나무를 새로 베어 만든 것으로 여기에 창호지 조각 종이꽃 등을 매어단다.
그리고, 집을 다니며 건립한 때마다 사람들은 당대에 울굿불굿한 인조 헝겊 쪼가리나 작은 주머니를 달기도 하며, 방울을 사다가 달기도 한다. 작은 주머니 속에는 일이 백원 정도를 넣는다. 갈립이 끝나면 솔잎이 안보일 정도로 이러한 것들이 달려 있다. 이 때 걸립한 돈으로 별신굿의 경비를 충당한다.
15일에 걸립이 끝나고 16일에는 우무골·큰마·게레렝·청마마을의 입구에서 호랑이를 잡는 놀이를 한다. 호랑이는 짚으로 만들고 겉에는 종이를 발라서 물감으로 그린다. 풍물을 치는 가운데, 포수가 총으로 호랑이를 잡는 시늉을 한다. 포수는 호랑이를 잡으러 가다가 신발이 떨어졌다고 신발값을, 담배가 떨어졌다고 담배 값을, 물건을 잃었다고 물건 값을 달라고 하면, 사람들은 돈을 조금씩 준다.
호랑이를 모두 잡으면 큰마 입구에서 허수아비 두 마리를 같은 방법으로 잡는 놀이를 벌인다. 허수아비를 잡으면 모두 잡았으니 내려 오십사하고 축원을 올리며 정성을 드린다. 무당의 정성이 지극해서 잘 들으면 신이 쉽게 내린다고 한다. 내림이 안되면 내려 올 때까지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당대를 잡는다. 신이 내리면 당대를 잡은 사람은 그 무거운 소나무 당대를 어깨에 메고 춤을 출 정도로 뛴다. 당대가 내리면 다시 풀물을 치고 당집터의 지신을 누른다. 그리고 무당은 마을의 깨끗한 사람의 소지를 올린다. 이 당대 내림은 신에게 굿을 해도 좋은가를 허락받는 표적이라고 한다. 이어서 무당이 굿을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안 밝혀지고 있다.
호랑이와 허수아비는 17일 동공사에서 모든 결산을 본 다음에 불에 태운다. 이때에도 풍물을 계속 친다. 이 별신굿은 요즈음까지도 행해져 오고 있다. 마을의 제사와 함께 치러지는 행사로서 새해를 맞이하여 마을에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악한 일들을 호랑이와 허수아비로 대신해서 물리치거나 없앤다는 뜻에서 생긴 주술적인 놀이로 보인다. 또한 산골이기 때문에 입은 들짐승들의 피해를 예방한다는 의미에서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가축 보호라는 생활의 필요성과 10년 만에 한번 씩 즐겨 노는데서 생기는 일상생활의 변화를 얻고자 치러지는 마을 공동 행사의 하나이다.
우뭇골·운곡(雲谷) 마을에 깊은 늪이 있었다 하여 우뭇골이라 하였다. 또 마을 양편의 산이 동네를 포옹하여 마치 우물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마평동의 마째부락의 중심 부락이다. 朴氏가 주성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임하댐 공사로 수몰되었다.
가르편·갈편(葛鞭) 우뭇골 맞은편 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마째부락 내의 한 작은 부락으로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주로 담배·고추·마늘 등을 많이 재배하고 몇 해 전 새마을 교량 건설로 마을 앞을 흐르는 大谷川을 건너다니고 있다.
쇠랑실·새랑실·소천(召川) 마을이 계곡을 끼고 있다고 하여 召川이라 칭하다가, 새로이 터전을 마련했다고 하여 새랑실이라고 한다. 李氏들이 집단 부락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임하댐 공사로 수몰되었다.
이식골·유곡(有谷)·노곡(露谷)·만천(萬川) 마을 앞을 흐르는 大谷川邊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浦村·包泉이라 하다가 다시 露谷으로 개칭하였으나, 이슬은 하루아침에 반짝거리다 곧 없어진다 하여 萬川 또는 有谷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를 사이에 두고 양짓마와 음짓마(골이식골)의 두 부락으로 나누어졌고, 文氏가 집단 부락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이주단지에 30여 가구가 정착하여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임하댐 공사로 수몰되었다.
새터·신기(新基) 이식골 부락이 형성된 후에 새로 마을을 개척하여 이룬 마을이란 뜻이라고 한다. 주로 禹氏가 살았으며, 마을 앞 상계들은 담배와 마늘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후생촌(厚生村) 6.25 사변 후 공비 토벌 관계로 벽지 독가촌을 소개하여 새로 조성한 마을이었으며, 이 식골 양짓마 북쪽의 산 밑에 위치하고 있었다.
용점·옹점·용정(龍井)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옹점이라고 불린 일도 있다. 또 용이 승천한 우물이 있었다 하여 龍井이라고도 불리다가 용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령 3동 입구의 첫째 마을이었으며 현재는 수몰로 인하여 사라지고 없다.
송골·송곡(松谷) 松林이 무성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옹점 바로 위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李氏가 대부분이었으며 특산물로는 담배와 고추를 많이 생산하였으며 현재는 이정표만 서있다.
한내골·한천곡(韓川谷) 주위의 험한 산과 계곡의 이름을 통칭하여 한내골이라고 한다. 현재 여러 성씨가 언덕배기에 마을을 이루고 있고 담배와 고추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지리실·경곡(徑谷) 골의 길이가 길다(이곳 방언으로 길다는 질다로 소리냄)는 뜻으로 지리실이라 불리었으며 임동면과 영양군과의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 하는 뜻도 있다고 한다. 여러 성씨가 모여 살여 주로 담배와 고추를 재배한다.
활당골 지리실 바로 위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옛날 영양군으로 왕래하던 길목인 동사티재(일명 東山嶺)의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 여러 성씨가 담배와 고추농사를 주로 짓고 있다.
분룡골 마령 3동 골마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초상이 많이 난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한다. 근처에 질 좋은 약수터가 있으며, 주로 담배와 고추를 재배한다..
골이식골·음짓마 이식골 마을에서 응달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주로 文氏가 농사를 짓고 거름마와 골마로 나뉘어져 있다. 담배·고추·마늘로 유명하다.
골마·곡마(谷馬) 말 모양을 한 川馬山 계곡에서 물이 흘러 내려 온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러 성씨가 살고 있고, 마을 앞 냇가에는 옛부터 유명한 지리실 약수터가 있다.
사월동(沙月洞)
새마을·새마·신촌(新村)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사드레, 沙月이 수몰되자, 옛날 성황당이 있었다는 서낭댕이 골 기슭에 새마을을 개척하였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베티·성현(星峴) 이 곳 味麵山에는 옛날에 절과 미륵부처가 있었으며 손님이 찾아오면 스님이 손님 수만큼 주문을 외우면 국수가 나왔다는 전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절과 미륵불이 없어지고 국수가 나오는 영험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星峴이 변했다고 해서 별티가 벼티로, 또 베티로 변해 왔다고 한다.
중벵이·중방(中防) 마을 입구는 협소하나, 옛 사드레 마을과 금댕이 마을 중간에 위치하여 넓은 가운데 방과 흡사하다고 하여 중방이라고 불리어진다. 주로 담배·고추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금댕이·금당(錦塘) 처음에는 이 마을이 발전하지 않고 줄어든다고 하여 오그댕이라고 불리었으나, 마을 안에 아름다운 못이 있고, 또 발전하라는 뜻으로 錦塘이라고 했다.
낙숫골·낙싯골(落水谷) 금당이 재에서 시작된 작은 시냇물이 이 마을 앞을 흐르는데, 이 계곡 중간에 있는 龍秋 폭포의 낙수 광경이 아름답다 하여 낙숫골로 호칭된다.
보매골·보마골(步馬谷) 예안으로 통하는 소로 옆에 위치한 마을로 재가 높아서 말을 쉬게 하기 위해 말에서 내려 걸어서 재를 넘어 다녔다는 이야기에서 전해오고 있다.
수곡동(水谷洞)
무실(務實)·수곡(水谷) 조선 明宗 鶴峰 金誠一의 매부인 柳 城이 이 곳에 정착할 당시 마을 뒤 峨岐山 골에서 물줄기가 마을을 둘러싼 형상으로 흐르고 있다 하여 물실, 水谷이라 칭하게 되었는데 그 후 무실로 되었다. 岐陽書堂·旌閭閣이 있고, 동쪽에는 하름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었으며, 柳氏가 집단 부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버드나무는 물이 많은 냇가에 잘 자란닥 하여 마을을 水谷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실 앞 냇가에 무실수(水谷樹)라는 소나무 숲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英祖 3년(1727년)에 金致萬이 아뢰기를 '혼인은 인간의 大倫이요, 신의는 사람의 根本이라, 전 정승 洪致中의 遺腹 손자와 이미 혼인을 약속하였으므로 이를 저버릴수 없나이다.' 하니 영조가 노하여 감옥에 가두었으나, 그 부인 홍씨와 함께 피신하여 사방으로 다니던 중 이 숲에서 쉬다가 아들을 낳고 고생하는데, 무실에 사는 柳氏가 아들을 데려다가 구호하였다. 홍부인이 信標로 不忘 두 자를 써서 주고 떠났다. 그 후 正祖 원년(1777년) 봄에 무실 柳氏들이 그 일가되는 安東府使 柳義錫을 맞아 이 곳에서 잔치를 하는데 도도한 柳義錫이 갑자기 이 중에 百拙庵 柳 稷의 자손이 잇느냐 물으니 柳氏들이 놀라 대답하되 백졸제로 말하면 우리 자손이나 일가뿐 아니라 영남 일대에서 추앙하는 어른인데 어찌 그 같이 무례하냐! 이런 사람과는 같이 놀 수 없다 하고 모두 헤어져 갔다. 柳義錫이 할 수 없이 봉변을 당하고 돌아와서 분을 못이겨 고민하던 끝에 몇 해 전에 임동면에서 일어났다가 완결된 살인 사건을 들추어 柳氏들에게 뒤집어 씌워서 큰 옥사가 다시 벌어지게 되었다. 柳氏가 크게 놀라서 집에 간수하던 홍 부인의 信標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니, 그 때 마침 이 숲에서 난 金致萬의 아들 鍾秀가 정일품 재상이 된지라 그 신표를 드리니 그 어머니 홍부인이 또한 생존해서 반갑게 영접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아들에게 부탁하여 柳義錫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여 그 일을 무사하게 만들었다 한다. 현재는 임하댐으로 인하여 수곡리 전채가 수몰되고 이주단지에 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한들·대평(大坪) 옛날에 馬氏가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앞에 큰 들이 있다 하여 한들이라 하였다는데, 柳氏가 대부분이다. 신선바위 한들 북쪽에 있는 신선바위(신선암)는 장기판 같이 금이 그어져 있고, 말 발자국,사람이 앉았다 일어선 흔적들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 웅덩이가 파여져서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도 현재는 수몰되어 없다.
원두들·원파(遠坡) 조선 시대 행인의 편의를 도와 주던 원(院)이 있었다고 하여 원두들이라 하고 있으며, 담배와 고추를 재배하여 수확을 올리고 있다. 황산골(黃山谷) 신라 때 지은 황산사(지금의 명칭은 봉황사)가 위치하고 있는 골짜기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이곳도 현재 수몰되어 없다.
늘침·늘치미·누침(樓枕) 원두를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조에 조그마한 누각이 마을 한가운데 세워져 있었다 하여 樓枕이라 칭했다. 현재는 수몰되어 없다.
독골·도곡(甕谷) 옹기굴을 차렸던 마을이라는데서 유래되었다. 동암정(東岩亭) 독골 부락의 북서쪽 산중턱에 있는 정자로 조선시대 영조 때 진사 東岩 柳長源이 공부하던 곳이다.
현재는 수몰되어 없다.
밤나무골 독골 뒤에 있는 마을로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밤나무가 무성하던 곳이라 하여 밤나무골로 불려졌다.
위동(渭洞)
윗골·위동(渭洞) 현재의 大谷川을 옛날에는 渭水 또는 渭川이라고 불렀는데, 수원이 풍부한 渭水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옛날 權氏라는 부자가 있었는데, 손님의 방문이 잦아 고민하던 중 지나가는 大師에게 많은 시주를 한 후 다시는 손님이 찾아 올 수 없는 비방을 묻자 塔골에서 전부자 집으로 흐르는 물길을 산 아래로 돌리면 된다는 말을 듣고 즉시 물길을 돌려 버렸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권부자는 망하게 되어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탑, 사찰이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작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아랫마을과 윗마을로 각각 집단 부락을 이루고 있는데 매년 정월 보름날을 기하여 아랫·윗마을 횃불쌈으로 액운을 떨치던 곳으로도 유명하나 지금은 행해지지 않고 있다. 주산물은 고추와 마늘 등이 유명하다.
새터·신기(新基) 윗골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새로 개척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宋氏와 禹氏가 가장 많이 살고 특산물은 마늘과 고추이다. 여우네골 여우가 많이 살던 곳이라는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현재는 임하댐 공사로 위동 1리는 수몰되었다.
중평동(中坪洞)
챗거리·편항리(鞭港里)·중평(中坪) 영덕 등 동해안에서 安東등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해산물의 수송이 이 곳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교통수단인 우마차에 의존하였기에 우마의 채찍소리가 주야로 그칠 줄 몰랐다 하여 챗거리라 하였다. 또 우마의 채찍을 마련하는 거리(마을)라는 뜻도 이TEk. 임동면의 소재지로 도로변을 따라 남북으로 부락을 이루고 있다. 5일제로 서는 장날은 5,10일이다. 中坪은 두내가 합치는 중간에 있다하여 중드루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중평동이 되었다.
웃채거리·우책걸(牛滯川)·상평(上坪) 챗거리 부락의 윗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옛날 우마차를 사용하던 시대에 상인들의 속박과 片馬의 축사가 운집된 마을이라 하여 우책길이라고 했다. 말뚝소 웃채거리 앞 냇가를 이르는 말인데, 옛날 소나 말의 고삐를 매워두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현재는 임하댐 공사로 수몰되었다.
굴매골·구마곡(九馬谷) 지세가 九首의 말을 채찍질하는 형용이라 하여 九馬谷이라 했는데, 음이 변하여 굴매골로 되었다. 현재는 임하댐 공사로 수몰되었다.
새들·신평(新坪) 챗거리 마을이 형성된 뒤에 새로 조성하여 마을을 두었다고 하여 새들이라고 불리었다.
쑥쟁이·쑥재 챗거리에서 남쪽 산 언덕배기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 말을 馬洞으로 몰아 넣어 쉬게 하였는데, 그 말을 지키며 숙직한다고 하여 쑥재라고 불리었으나 중평리 전체가 임하댐으로 수몰되었으며 현재 지명만 전하고 있다.
지동(枝洞)
갓골·가지골·지동(枝洞) 반변천이 두 곳에서 합류하여 가지같이 생겼다 하여 가지골로 불렀다. 또 산으 형세가 갓 모양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갓골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는 임하댐 공사로 일부 전답이 수몰되었다.
원지(元枝) 옛날 吳昇이라는 장수가 이 마을 개척 당시 제일 큰 나뭇가지가 있다고 하여 원지라고 불렀다. 權氏들의 집단부락이다.
새밤·조야(鳥夜)·신야(新夜) 마을 뒷산에 밤마다 새들이 놀다가 간다고하여 새밤·鳥夜으로 불렀다가, 신작로가 생기고 나무가 없어지고 새들이 오지 않는다고 하여 새밤(新夜)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밀미·미산(眉山) 마을 뒷산의 모습이 사람의 눈썹과 흡사하다고 하여 眉山으로 불리다가 그 후 산을 개간하여 모양이 달라졌다고 하여 밀리로 불린다고 한다.
갈바들·갈밭·갈전(葛田) 마을 뒷산이 옛날부터 칡덩굴로 덮혀 있었는데, 사람들이 칡덩굴 산을 일구어 밭을 만들었다고 하여 갈밭 또는 갈전(葛田)으로 불린다.
논실·답곡(畓谷) 마을 앞으로 반변천이 흐르고 마을 뒤의 계곡에 항시 물이 흘러서 근처의 토지를 모두 논으로 이용하게 되어 논실(畓谷)이라 불렀다. 李氏들이 많이 살았었다.
지례동(知禮洞) - 현재는 전체가 수몰되었음
지례(知禮·芝澧) 옛날부터 약초인 芝草가 많고, 물이 맑아 芝澧라 부르다가, 1900년경에 禮文을 잘 알고 행한다 하여 知禮라고 부른다는 유래가 있다. 마을 뒤쪽엔 靈芝山이 있고 앞에는 맑은 물이 흘러 芝澧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형이 지레처럼 생겨서 지레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궁낭이·국란(菊蘭) 국화와 난초를 많이 가꾼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洛東江의 지류인 半邊川을 따라서 위치한 마을로 두 자연 부락으로 나누어졌는데 윗쪽을 웃궁낭이·웃궁냉이·上菊蘭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金氏들이 집단부락을 이루고 있고, 아랫쪽에 위치한 마을을 하궁낭이·아랫궁낭이·하국란(下菊蘭)이라고 하는데, 李氏들이 주성이다. 흔히 하는 말에 들은(聽)궁낭이지 볼(視)궁낭이는 못된다. 라는 말이 있다.
뒷바들·뒷들·후평(後坪) 이 마을은 洛東江 지류인 半邊川 한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知禮에서 동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마을 뒤쪽에 들이 있다고 해서 뒷바들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특산물로는 고추와 담배 등이고 옛날부터 李氏들이 모여 사는 부락이었으나 현재는 임하댐 공사로 수몰되었다.
내굽·내구비·천곡(川曲) 뒷바들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불리어 半邊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산기슭에 위치하였으며 냇물이 마을을 구비쳐 흐르고 있다고 하여 내구비 또는 川曲이라 하다가 지금은 내굽으로 부른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金氏들의 집성촌이며 마을 뒷산에는 송이버섯이 생산되며 수십 년 전에 건축한 한옥 민가가 특수한 구조와 솜씨로 건축되어 보존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임하댐 공사로 수몰되었다.
내급·내구비·내굽·천곡(川曲)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이 이 마을을 굽이쳐 흐르고 있다 하여 내굽(川曲)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내급이라고 불리어 졌으나 현재는 임하댐 공사로 수몰되었다.
감동이·감동·감동리(甘東里)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 이 마을 앞을 감고 돌아 흐른다고 하여 감동이라고 하였으나 현재는 임하댐 공사로 수몰되었다.
임동의 특산물 마을나들이 >
임동면의 유명한 기념물
안동임동면(安東臨東面)의 굴참나무
문화재지정 : 천연기념물 제 288호 (1982. 11. 4)
소 유 자 : 이동호 (李東鎬)
소 재 지 : 안동시 임동면 대곡리 583
형태및구조 : 자연생 굴참나무
문화재 안내
이 나무는 흔히 도토리나무 또는 참나무로 불리며 옛부터 가장 좋은 숯 재료로 알려져 있다. 1991년 4월 30일 ‘상수리나무’에서 ‘굴참나무’로 지정 명칭을 변경했다. 이 마을에서는 농사일을 마치는 음력 7월에 길일(吉日)을 택해 농로를 보수하고, 잡초를 베는 초연(草宴)을 행한다. 일이 끝나면 온 동민이 모두 이 나무 아래로 모여서 집집마다 정성껏 준비한 술, 국수, 옥수수, 감자 따위로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올리고 흥겹게 하루를 보낸다. 또한 이 나무는 서당(書堂)역할도 했다 한다.
봄이 오면 온갖 새들이 모여드는데, 특히 두견새가 와서 울면 풍년이 든다고 믿어 더욱 좋아한다. 마을 앞에 우뚝 솟은 두룸산과 이 나무는 마을의 상징이다.
봉황사대웅전(鳳凰寺大雄殿)
문화재지정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41호(1980. 6. 17)
소 유 자 : 봉황사(鳳凰寺) 주지(主持)
소 재 자 :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563
수 량 : 1동
형태및구조 : 목조단층와가
문화재 안내
이 사찰은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13년(644)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일명 황산사(黃山寺)라고도 불리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大雄殿)과 요사(寮舍)채, 극락전(極樂殿)만 있으나 전에는 관음전(觀音殿)·범종각(梵鐘閣)·만세루(萬歲樓)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정면 5간 측면 3간의 다포식(多包式) 건물이다. 내외 2출목으로 공포의 형상 등으로 보아 이 건물은 조선중기 이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이 대웅전의 단청(丹靑)은 봉황(鳳凰)이 칠했다고 하며, 단청을 할때 사람이 보지 않도록 하여 전면(前面)을 완료한 다음 후면(後面)을 시작할 때 사람들이 쳐다보아 일을 다하지 않고 날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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