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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악마 이반의 악몽(E)
바로 2,3일 전에 일어난 일이 또 있어. 수무 살쯤 된 금발의 노르만 처녀가 늙은 신부를 찾아왔었지. 아름다운 얼굴, 날씬한 몸매, 착한 마음씨 ㅡ 그 어느 것을 보나 군침이 도는 아가씨였지. 처녀는 허리를 굽혀 고해틀 너머의 신부에게 낮은 소리로 죄를 고했어. 그러자 신부는 '사랑하는 내 딸아, 그대는 다시 죄를 지었단 말인가........O, Santa Maria(오오, 성모 마리아여), 이 무슨 소립니까? 이번엔 그 남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짓을 되풀이할 셈인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하고 탄식조로 말하자, 'Ah, mon pe're. ca lui fait tant de plaisir et a moisipeu de peine!(아아, 신부님, 그 일은 그 사람을 매우 즐겹게 해주었고 저도 괴롭지는 않았습니다!)' 하고 죄 많은 처녀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어.
자, 생각해 봐. 정말 기찬 대답이 아닌가! 그때 나는 그만 뒷걸음을 치고 말았어. 그건 천성의 부르짖음이었어. 원한다면 이건 순결 그 자체보다 나은 거야!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의 죄를 용서하고 돌아서서 가려고 했지. 하지만 얼른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어. 그때 신부가 고해틀 너머로 처녀와 그날 저녁에 만날 약속을 하는 걸 들었거든. 신부는 부싯돌처럼 딱딱한 노인이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넘어가 버렸어! 그건 천성이었어. 천성의 진리가 자기 권리를 주장한 거야! 자네 또 화가 나서 외면을 하는 건가? 도대체 어떡하면 자넬 즐겁게 해줄 수 있는지 모르겠는걸......"
"나 좀 가만 내버려 두게. 자넨 짓궂게 따라붙는 악몽처럼 내 머리 속을 두들기고 있어." 이반는 자기 환영 앞에 힘을 못 쓰고 애처롭게 신음소리를 냈다. "자네하고 있는 데 이젠 넌덜머리가 났어. 못 견디게 괴로워! 자넬 쫒아 버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다 하겠어!"
"다시 말하지만 너무나 많은 기대를 갖지 말게. 나한테서 '위대하고 멋진 것'을 요구하지 말란 말이야. 하지만 두고 보세. 우린 서로 사이 좋게 지내게 될 테니." 신사는 감명 깊게 말했다.
"자넨 분명히 나를 보고 화를 내고 있지. 빨간빛 속에 '우레와 번갯불을 번득이며' 불같은 날개를 달고 나타나지 않고 이렇게 초라한 꼴을 하고 나타났다고 말이야. 첫째, 자네의 심미감이 상했을 것이고 둘째, 자네의 자존심이 상했을 거야. 자네와 같은 위대한 인간에게 어찌 이렇게 비천한 악마가 찾아올 수 있냐고 하겠지? 맞았어, 자네에겐 그러한 낭만적기질이 있어. 일찍이 벨린스키가 그렇게 조소한 바 있는..... 어쩔 수 없겠지, 젊은 친구니까. 사실 아까 자네에게 올 준비를 할 때 난 장난삼아 카프카즈 지방에서 복무한 퇴역 4등관처럼 연미복에 '사자와 태양'의 훈장을 달고 나타날 생각이었어.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겁이 났어. 최소한 '북극성'이나 '시리우스'훈장이면 몰라도 연미복에 감히 '사자와 태양' 훈장 같은 걸 달고 나타났다고 나에게 한 방 먹일 것 같아서 말일세.
자네는 걸핏하면 나보고 바보라고 하지. 하지만 나는 지적인 면에서 자네와 동등하다고 주장하진 않아.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 앞에 나타나서 자기는 악을 원하지만 선한 일밖에 하지 못한다고 자신에 대한 증언을 했어. 그야 제 마음이지만 나는 그와는 정반대야. 아마 이 세상에서 진리를 사랑하고 진심으로 선을 바라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을 거야. 나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주님이 오른쪽에 못박혀 죽은 도둑의 영혼을 자기 가슴에 안고 승천할 때 거기서 '호산나'를 부르는 소천사들의 즐거운 부르짖음과 천지를 진동하는 대천사들의 우레와 같은 환성을 들었네.
그때 나도 이 천사들의 합창에 끼어들어 함께 '호산나'를 부르고 싶었어! 이건 모든 신성한 것 앞에서 맹세할 수 있어. 가슴속에서는 벌써 터져나올 정도였어.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감수성이 무척 예민하고 예술적인 감동을 잘 받거든. 그런데 그 상식이란 놈이 ㅡ 내 성격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그 상식이란 놈이 나를 의무의 테두리 속에다 가두어 두었지 뭔가.그래서 나는 그 순간을 놓치고 말았어!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 '내가 호산나를 부른다면 어떻게 될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지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결국 나는 자신의 의무와 사회적 지위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억눌러 버리고 자신의 더러운 책임을 계속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야.
어떤 사람이 명예로운 선을 독점하였으므로 나에겐 더러운 일밖에 남겨지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사기적인 생활의 명예를 탐내진 않네. 나는 야심이 별로 없으니까. 이 우주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필이면 왜 나 혼자만이 모든 점잖은 사람들의 저주를 받아야 하며, 그들의 발길에 채이도록 운명지어졌을까? 인간의 탈을 쓸 때 때때로 그런 모욕을 받아야 하니 말이야. 거기엔 어떤 비밀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알지만 그것을 내게 절대로 알려주려교 하지 않는단 말이야. 만약 그 비밀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내가 '호산나'를 불렀다간 당장 필요한 마이너스가 사라지고 온 세상에 예지가 판을 치게 되며,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은 종말을 고하게 될 걸세. 심지어 신문도 잡지도 말이야. 아무도 그걸 구독하려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결국 나는 단념하고 억조 킬로미터까지 걸어가서 비밀을 알아낼 수밖에 없지.
그러나 그때까지는 나도 세상을 등진 채 이를 악물고 또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참이야.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천 명을 파멸시키겠단 말일세. 옛날에 한 사람의 의인 욥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숱한 사람을 죽였고 얼마나 많은 고귀한 명예을 짓밟아 버렸던가! 그 때문에 나도 무척 악용을 당했었지. 사실 그 비밀이 드러날 때까지는 나에겐 두 가지 진리가 있어. 하나는 내가 조금도 모르는 저쪽 세계의 진리고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의 진리지. 한데 어느 것이 더 순수한 진리가 될지 그건 아직 알 수 없어. 자네 잠들었나?"
"그럴 만하잖아." 이반은 화가 나서 으르렁거렸다. "내 본성 속의 어리석은 생각들 ㅡ 오래 전에 생명이 다 된 내 지혜로 짓씹어서 썩은 고기처럼 내던져 버린 그 모든 것들을 무슨 새로운 사상인 양 내 앞에 제시하다니!"
"이번에도 자네의 기분을 좋게 할 순 없겠군! 실은 문학적인 표현을 써서 자네를 좀 구슬려 보려고 했었는데. 하늘의 '호산나'라는 표현은 정말 나쁘지 않았지? 그리고 또 그 하이네식인 풍자적 말씨도 괜찮았을 거야. 그렇지?"
"아니야, 나는 한 번도 그런 종과 같은 천한 인간이 되어 본 적이 없었어! 어떻게 내 영혼에서 너 같은 머슴이 태어났을까?"
"여보게, 친구, 나는 아주 매력 있고 사랑스러운 젊은 러시아 귀족을 한 사람 알고 있네. 젊은 사상가요 문학 대애호가며<대심문관>이란 제목이 붙은, 장래가 약속된 시의 작자이기도 하지. .....나는 그 사람만 생각하고 있었어!"
"<대 심문관> 얘긴 하지마." 이반은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소리쳤다.
"그럼 <지질학상의 대변동>은 어떤가? 생각나지? 그것도 멋진 시였지!"
"입 닥치지 못해. 안 그러면 죽여 버리겠어!"
"자네가 날 죽여? 그러지 말고 미안하지만 내 얘기 마저 듣게. 나는 그것으로 기쁨을 맛보러 왔으니까. 오오, 나는 삶에 대한 갈망으로 몸부림치는 열렬한 젊은 친구들의 꿈을 좋아해. '그곳엔 새로운 사람들이 있다'고 자네는 지난봄에 여기로 올 생각을 하면서 결론을 내린 적이 있지.
'그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식인(食人)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바보 같은 녀석들,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내 생각엔 아무것도 파괴할 필요가 없고 인간 속에서 신의 관념만을 파괴하면 될 것 같아. 일은 여기서부터 착수해야 해! 시작은 바로 여기서부터야. 오오, 아무것도 모르는 장님들! 만약 모든 사람이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면(그 시기가 지질학적인 시기와 비슷하게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있다) 이전의 모든 세계관, 특히 이전의 모든 도덕률은 식인주의의 야만적인 행위가 아니라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고 모든 게 새로 나타날 것이다.
인간은 인생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생으로부터 얻기 위해 결합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현세에 있어서 행복과 기쁨을 얻기 위함일뿐이다. 인간은 신성하고 거인적인 자존심으로 위대해질 것이고, 그리하여 인신(人神)이 출현할 것이다. 인간은 시시각각으로 자기 의지와 과학으로 무한히 자연을 정복해 가면서 그때마다 그것으로 큰 희열을 느끼기 때문에 천국의 기쁨에 대한 인간의 옛 꿈을 보상해 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신처럼 자존심을 가지고 조용히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자존심 때문에 인생이 순간적임을 불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자기 동포를 사랑할 것이다. 그 사랑은 인생의 짧은 순간에도 만족을 줄 것이지만 사랑의 순간성을 인식함으로써 사랑의 불길을 더욱 강렬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무덤 저편의 무한한 사랑을 꿈꾸던 시절에 훨훨 타오르던 사랑의 불길에 못지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일세. 정말 근사한 말이지!"
이반은 양손으로 귀를 막고 앉아 방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신사는 말을 계속했다.
"여기서 내 젊은 사상가는 이렇게 생각했지 ㅡ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그러한 때가 올 것인가,하는 점이다. 만일 온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인류는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뿌깊은 어리석음 때문에 어쩌면 천년이 걸려도 토대를 마련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원리 위에 제 마음대로 생활의 토대를 잡아도 무방하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겐 어떤 일이나 허용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설사 그런 시기가 결코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신이니 영생이니 하는 것은 없으니까 새로운 인간은 자기 혼자서라도 인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새로운 지위로 승격한 이상 필요하다면 옛날 노예와 같은 인간의 그 어떠한 한계도 마음대로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신을 위한 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있는 곳이 곧 신의 자리인 것이다! 내가 서있는 곳이 곧 제일 가는 자리인 것이다 ㅡ '아무 짓을 해도 괜찮다.'
이 한마디로 족하다! 정말 근사한 말이지. 하지만 사기를 치려고 한다면 구태여 진리의 재가를 받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긴 그것이 우리 러시아의 현대인이지. 러시아의 현대인은 진리의 재가 없이는 사기를 칠 마음도 먹지 못하니까. 그만큼 그들은 진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손님은 분명히 자기 웅변에 도취된 듯 목소리를 점점 높여 가며 주인을 비웃는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반은 테이블에서 컵을 집어 손님에게 획 던졌다.
"AH, mais c'est be'te enfin!(하지만 그건 바보 같은 짓이지!)" 손님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찻물을 손가락으로 톡톡 털면서 소리쳤다. "루터의 잉크 병 생각이 떠올랐던 모양이지? 나를 보고 꿈이라고 하면서 그 꿈을 향해 컵을 던지다니! 그건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나는 자네가 귀를 틀어막고 있는 체하면서도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나 생각했었는데 역시 그랬었군......"
이때 갑자기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쾅쾅하고 들여왔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소리 안 들이나? 여는 게 좋을걸" 하고 손님은 소리쳤다. "자네 동생 알료샤가 아주 뜻밖의 흥미있는 소식을 갖고 온 모양이야, 틀림없어!"
"입 닥치지 못해. 사기꾼 같으니! 너보다 먼저 알았어, 그게 알료샤란 걸. 그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거든, 물론 쓸데없이 온 건 아니지. 틀림없이 '소식'을 갖고 왔을 거야!" 이반은 미친 듯이 말했다.
"열어 주게. 어서 그에게 문을 열어 줘. 바깥엔 눈보라가 치고 있어. 저앤 자네 동생이 아닌가. Monsieur, sait-il le temps qu'il fait? C'est'a ne pas mettre un chien dehors.......(자네, 날씨가 이렇지 않은가? 이런 날씨엔 개도 문 밖에 내놓지 않는 법이지.....)."
노크 소리는 계속되었다. 이반은 창문으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무엇에 갑자기 팔다리가 묶인 것 같았다. 그는 쇠사슬을 끊어 버리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허사였다. 창문의 노크 소리는 점점 높아져 갔다. 마침내 이반은 팔다리의 쇠사슬을 끊고 소파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지친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양초 두 자루는 거의 다 타 버렸고, 방금 손님에게 던졌던 컵은 자기 앞 테이블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맞은편 소파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의 노크 소리는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었으나 방금 꿈속에서 들은 것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반대로 소리를 죽여 아주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건 꿈이 아니었어! 맹세코 그건 꿈이 아니었어! 모든 것이 지금 실제로 있었던 일이야!" 이반 표도르비치는 이렇게 소리치며 창문 쪽으로 쫒아가 조그만 통풍창을 열었다.
"알료샤, 나한테 오지 말라고 했잖아!" 이반은 동생에게 거친 말투로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 뭣하러 왔어? 한마디로 말하란 말이야. 알겠어?"
"한 시간 전에 스메르쟈코프가 목매달아 죽었어요." 알료사가 문 밖에서 대답했다.
"층계 쪽으로 들어와, 곧 문 열어 줄게." 이반은 이렇게 말하고 알료샤에게 문을 열어 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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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침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나보네요,..이반이. 결국 알료샤가 악마를 쫒는 역할을 했구요.^^
섬망증에 걸ㄹ린 천재들의 내면을 읽어내려니 두뇌가 좀 어지럽네요^^
여하튼 잘 읽었어요~~
당최,.....적응이 안되더라구요. 결국 끝을 보지 못했던 이 작품에 대한 도전도 그래서 였다 생각되네요. 이제 그 태산을 명료하게 넘어가고 있어 행복합니다.
스메르쟈코프가 자살한건 자신의 신념을 기댈곳을 잃은 탓이겠지요? 이반을 바라보며 계속 확인하고 싶었던 것들이 다 무너지는걸 느끼고 결국 삶을 끝내버리고...
이제 이반 차례가 오겠군요?? 에구...
아,...^^신념을 잃은 탓이라~~ 그러면 이반도 스메르쟈코프의 길을 따를까???
어차피 죽을 거면 미챠나 살리고 죽지.....
그러게 말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결론 지을지,...작가의 의도가 많이 궁금합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