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 대학로 입구 허접한 건물 앞에 선다. 한 사람이 겨우 올라갈 수 있는 가파르고 좁은 이층 계단을 오른다. 한 사람 한 사람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는 아가씨는 행사를 주관하는 분인 듯하다. 오늘 여기에서 해금과 기타, 기타와 타악기의 이중주가 연주된다고 한다.‘
웬만해서 대문을 나서지 않는다. 그런 내가 답답하게 보였는지 집에만 있지 말고 색다른 경험도 해보라는 아들 권유에 용기를 내어 찾아온 곳이다. ‘골방에는 작은 음악회’였다. 희미한 불빛이 비치는 골방 안에는 아주 작은 무대가 만들어져 있다. 몇 평 되지 않는 객석에는 먼저 온 사람들로 꽉 채워졌다. 맨 뒷자리에 있는 빈 의자에 앉았다. 내가 알고 있는 골방이 이렇게 색다른 문화 공간으로 변하다니.
아들이 연주회에 가자고 했을 때 약간은 짐작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의가 젊은 층이다. 몇 명이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사십 대 후반쯤으로 보인다. 내 연배의 사람은 한 명도 없는 듯하다. 나이를 의식하니 앉은 자리가 어색하고 마음이 불편해진다.
나에게는 아직까지 골방의 추억이 남아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다. 최씨 집안의 종가댁인 큰집에서는 대소사가 그치지 않았다. 침침한 골방에는 제사에 쓰일 귀한 식재료 들이 보관되어 있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홍시, 곶감, 생엿, 강정 같은 것들이다. 또래의 사촌과는 죽이 잘 맞았다. 맛난 것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마음은 종종 거사를 치를 때가 있다. 어른들이 집을 비우는 날을 골라 둘이서 긴장된 마음으로 침침한 골방 안으로 들어선다. 순간 돌아가신 증조할머니가 우리 행동을 지켜보며 버릇없는 요년들! 하고 긴 담뱃대로 후려치는 듯해서 소스라쳐 뛰쳐나오기도 했다.
골방에 대한 내 추억은 그런 것이지만 지금의 골방 문화가 확연히 달랐다. 옛 골방이 음식을 저장하는 곳이라면 현대의 골방은 문화를 저장하는 곳이라 느껴진다.
클래식 연주자 두 분이 좁은 무대에 섰다. 티브이에서 보는 연주자의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은 아니었다. 군인들이 한겨울에 입는 파카 안에 든 내피를 입고 있다. 일명 깔깔이라는 누비옷이다. 오늘 의상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면서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웃음을 준다. 전혀 음악가 같지 않은 수더분한 모습이다.
리더로 보이는 연주자가 젊은 연주자를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소개했다. 독일에서 연주 공부를 마친 제자가 지금은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가라며 대견해 하는 표정이다.
연주하는 몇 곡들은 귀에 익은 곡이다. 어색했던 자리가 조금씩 편안해진다. 한 곡 연주가 끝나고 다음 연주될 곡에 대한 설명을 해주니 감상과 이해가 한결 수월하다.
기타 연주자의 손길에 눈이 간다. 우람한 체구에 남자의 손 치고는 작고 창백했다. 손가락도 말랐다. 저 가냘픈 손으로 기타 연주가 아니었음 무엇을 하고 살아갈 것인가. 손이 작아 거친 노동일을 할 수 없어 기타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것이 손이 작은 연주자의 평생 주어진 노동으로 생각하며 또한 축복이라 하겠다.
나는 여자 손 치고 몹시 거칠어 부잣집 큰 머슴 손 같다. 바쁜 일상을 챙기느라 고무장갑을 끼는 번거러운 시간마저 줄이느라 늘 맨손으로 세제에 손을 담그며 살았다. 내 손에게 주인으로서 참 미안하다. 하지만 누구 앞에서도 내 거친 손을 부끄러워한 적은 없다. 어쩜 사람은 손이 생긴 대로 삶도 그렇게 주어지나 보다. 그래서 손금으로 앞날의 운명을 가늠해 보기도 하는 것 같다.
해금 연주는 처음 들어본다. 너무 생소하고 새롭다. 전통과 현대가 어울리는 곳이다. 연주를 듣는 내내 전율이 흐른다. 해금의 줄로 애절한 소리가 골방 가득, 내 가슴속에도 그득, 절절히 흐른다. ‘적념(寂念)’ 음악 제목이 주는 듯 그대로 마음이 고요해진다. 중간중간에 몸통을 두드려내는 둔탁한 기타 연주 음악 효과가 듣는 귀로 하여금 슬픔에서 일깨워 준다.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은 타악기의 연주도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신명을 돋게 한다.
곡이 끝나면 연주자는 손을 흔들기도 하고 잠시 손가락을 마사지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 현란한 연주를 하느라 손가락에 통증이 오나 보다. 기타 연주가 좋아서 선택했지만 결국 잘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가 말했다. 오늘 공연을 위해 연습하느라 며칠 밤을 새웠다고 한다. 아무리 좋아하는 기타지만 건강을 잃으면 모두가 끝나는 것인데 그런 줄 알면서 죽어도 포기는 못한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보이기는 한데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단다. 수수하다 못해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모습에서 예술가의 고단한 삶이 읽혀진다.
연주하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짠하다. 아무리 끈끈한 애정과 신뢰도 가난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달아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연주를 하고있는 그들의 모습은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하다. 기타 하나만을 붙들고 사는 가난한 예술가의 승화된 연주를 보여준다. 음악이나 문학, 또는 화가,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혼은 그 어떤 이유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음악 연주회가 끝났다. 젊음 속에서 새로운 연주를 감상한 것이 새롭고 환상적이다. 나오는 입구에는 작은 모금함 상자가 마련되어 있다. 가난한 예술가를 위한, 새로운 예술의 장르를 체험한 감사함의 뜻으로 약간의 금액을 넣었다.
타악기의 신명이 남아 있나 보다. 들어갈 때의 추춤해 하던 모습과 달리, 골방을 나서는 나는 어깨가 들썩이고 몸은 날아갈 듯이 가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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