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본기 유리 이사금 31년
三十一年 春二月 星孛于紫宮
儒理 31년(AD54년, 甲寅)=>儒理 17년(AD109년, 己酉)
봄 2월, 星孛(성패)가 자궁(紫宮)에 나타났다.
>> 유리 31년 봄 2월 성패가 자궁(紫宮)에 나타나 탄식하였다.
보조해석.
이말은 첫째 한반도라면 2월은 절대 봄이될 수가 없다.
봄은 3월이 되어서 춘삼월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도보다 아랫지방인 중국의 강서성 일대를 말한다.
강서지방이라면 2월에 봄이 온다.
아연실색할 정도로 혜성(星孛/성패/살벌할패/안색이 변할패)이 나타났다는 말은
석탈해가 궐한, 궐용(궐융), 유이족 무리를 이끌고 북쪽에서 남하하여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들어와서 숫자가 많았다는 의미이다.
星은 고전에서 의례적으로 북쪽을 지칭하는 말이다.
자궁(紫宮)은 천제가 거주하는 천궁을 말하는데,
그 천궁은 북쪽에 있고 천제가 거주하는 곳에서 갈라져 나와
신라 왕궁을 천궁과 대등하게 자궁으로 격상시킨 금성을 말한다.
(신라가 원래 북방의 천궁(돈황 지구)에서 갈라져 나와 새로 세운 금성궁을
부를 때 자궁이라고 불렀다.)
紫(붉은 보라빛자)는 자초근, 지초, 지치, 지혈초가 자생하는 곳에서
처음으로 나온 말이지만, 주변의 강물이 붉은 보라빛색으로 흘러가는 곳에서 출발하였다.
흑하 주변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초는 한반도에도 널리 분포하여 자생한다.)
반도에는 황토물이 흘러가는 강물이 없으므로 감숙성, 청해성 흑하를 말함이다.
황하강 최상류의 황토물이 햇볕에 노출되면 붉은 보라빛으로 비춰지며 흘러가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흑룡강성의 흑룡강은 토지가 검을 뿐이고 물이 검은 것은 아니다.)
감숙, 청해성 일대 원래 살았던 돈황지구에 천궁이 있었고, 그곳은 부도지에 나오는 마고성을 말한다.
紫微垣(자미원)은 성을 쌓고 성 앞에 도랑을 깊이 파서 물을 채워 침입자를 막는
해자가 있는 자미성을 말하고, 그 자미원의 근원은 마고성을 말함이며,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고성은 실크로드 비단길 감숙성 돈황지구 막고굴을 말하는 것임]
자미원이 단순히 큰 곰자리의 북극성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三十三年 夏四月 龍見金城井 有頃 暴雨自西北來 五月 大風拔木
儒理 33년(AD56년, 丙辰)=> 儒理 20년(AD112년, 壬子)
여름 4월, 용이 금성(金城)의 우물에서 나타났는데, 조금 있다가
폭우가 서북쪽에서 부터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보조해석.
>> 유리 33년 여름 4월에 석탈해 무리가 금성앞(도랑/해자)에 나타나 탐색하더니,
잠시후 석탈해 무리가 서북에서 공격하여 몰려 들어왔다.
용의 최초 기원은 산서성 대동시 용성지구를 말한다.
석탈해족의 조상이 살았던 곳이 용성국인데, 산서성 대동시 용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강서성, 안휘성 남부 포양호 일대의 장강(양쯔강)주변 남창시라면 4월이 여름이다.
5월에 석탈해 무리 [용의 무리]가 공성 끝에 왕궁이 무너지고 석탈해 무리에게 점령당하여
뿌리가 뽑혔다는 말이다.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 謂臣寮曰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俾卽大位 以無忘我遺訓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儒理 34년(AD57년, 丁巳)=> 儒理 20년(AD112년, 壬子)
가을 9월, 왕이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 왕이 죽어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보조해석.
>>> 유리 34년 가을 9월에 왕이 부상을 당하여 신료들에게 말하길
탈해 무리와 연합하여 같은 겨례 무리를 이루어 재위 보전케 하고,
그의 공명을 세워 나라 안에 알려지게 하라.
짐의 두 아들은 탈해의 재주에 미치지 못하였다. (탈해 무리를 막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것임)
내가 죽거든 대를 이어 탈해에게 즉위시켜 주고 나의 유훈을 잊지 않도록 하라.
유리왕과 탈해는 원래 뿌리가 같은 종족이었다는 말로 위안을 삼으며
친척이었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전쟁에 패해서 강제로 양위당하는 장면이다.
즉 두 아들들에게 정권을 되찾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겨울 10월 유리왕이 (반강제로) 죽임을 당하여 사릉원 내에 장사를 지냈다.
(薨(훙/횡)은 왕이나 제후왕 등 높은 신분이 죽으면 쓰는 용어이지만,
여기에서는 변고로 인한 죽음의 의미가 들어있다.
석탈해 무리에게 점령당해서 은유법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지도부 무리는 글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 기록은 남겨야겠고, 탈해 무리들 모르게
기록하기 위해서 은유법을 사용하여 기록한 것이며,
반 강제적으로 양위당하는 장면을 서술한 것이다.
儒理 34년(AD57년, 丁巳)=> 儒理 20년(AD112년, 壬子)
脫解(탈해)는 말그대로 청해성 서북방의 해서/숙몽고 자치주와 해서 장족 자치구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최초 산서성 대동시 용성에서 서쪽 내몽고 사라선맹 지구와
감숙성 지방으로 이주해갔다가 북흉노에 밀려 합랍호와 청해호의 근거지를 이탈하여,
안휘성 남부와 강서성, 강소성 서북일대의 강회 신라인 유리 이사금 땅으로 들어와서
사로를 점령하였다는 말이다.
사로의 유리 이사금을 전복하고 이사금으로 오른 자를 昔脫解(석탈해)라 부르게 된다.
(기자조선의 후신인 서불한우로국(서국,불국,한국,우국,노국)인 강회신라를 말함)
그 당시의 단파국은 현재의 감숙성 북동부 내몽고 서남부의 단파 길림 사막일대를 말하는 곳이다.
파단[단파]길림 사막지방을 뜻한다.
昔(옛석)은 그들이 해서지역 (감숙성/청해성에서 살던 옛 고토)를 잊지 않고
이어간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사금 세력이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후 마립간 세력이 들어오고 성촉/성한/대성의 성한왕 이웅, 이세한 세력>하/후하/대하 세력
열한인 무열황제 혁련발발 세력의 후예가 신라로 들어온다.
이것이 김춘추, 김법민이 말하는 제천지윤전칠엽이다.
後漢書に出る帥升が 107年に生口160人を漢に捧げた記事の主人公は
神武天皇で明かされるようになります.
帥升(솔승)
107年 倭国王帥升、後漢に朝貢(「隋書倭国伝」は倭奴国王とする)
>>> 후한서에나오는 수승(솔승)이 107년에 포로 160명을 한에 받치는 기사의
주인공은 신무천황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수승 107년
왜국왕 수승 , 후한에 조공 (수서 왜국전은 왜노국왕이라고 한다.)
산서성, 하남성/안휘성 일대의 후한(동한)에 산서 동북/하북 서부의 위나라의 노예들이
절강성 일대로 탈출하여 세운 왜노국으로 후한에 조공하는 것을 말한다.
왜노국은 승문제도[조몬제도]를 따라 구주[큐슈]로 들어가게 된다.
p/s
석탈해족 이동경로.
산서성 대동시 용성지구>섬서성 한중시>보계시 계림지구>감숙성 경양시>
청해성 동부 청해지구>강서성~안휘성남부 강회신라로 동남하>한반도 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