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진나라 때 무릉(지금의 후난성 타오위안현) 지역에 사는 한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복숭아꽃이 만발한 숲 속에서 길을 잃었다. 숲의 끝에 이르자 갑자기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 같은 세상이 그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전쟁의 난리를 피해 수백년간 세상과 단절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만든 지상낙원이었다. 어부는 그곳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는데, 다시 그곳을 찾으려해도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동진 시대 시인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속 이야기다.
무릉도원은 유토피아, 이상향이다. 세상의 시름에서 해방된 천국이자, 누구나 갈망하는 위안의 장소다.
서양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물론 작가만 서양인이고 배경은 동양이지만) 바로 샹그릴라라는 지명이 등장한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이다.
1930년대 중반 영국 영사 코웨이는 비행기 추락으로 티베트의 어느 험준한 산중에 떨어진다. 불시착한 그 곳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세상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고립된 삶에 만족하며 행복해했고, 늘 싱싱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100살이 넘어도 청년의 얼굴을 하고 었었다. 늙음과 병이 없는 세상이었다 코웨이는 잠깐의 유혹으로 그 마을을 벗어났지만 바로 후회한 뒤 다시 그곳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 샹그릴라라 불리는 중국 쓰촨성 야딩(2017년 여행당시)
동해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 무릉계곡
사람들은 누구나 걱정이 없는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싶어한다. 죽은 뒤에야 갈수 있는 천국과 달리, 무릉도원은 현실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지구상 어딘가에는 무릉도원, 샹그릴라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무릉도원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높아질 수록 오히려 '무릉'의 희소성은 사라졌다. 작은 땅 덩어리인 우리나라 조차 무릉이라는 이름이 붙은 지역명이 꽤 많다. 샹그릴라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에서 샹그릴라라는 이름이 붙은 호텔과 식당만 찾아도 아마 수천개는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수많은 무릉 중 그 이름에 걸맞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강원도 동해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로 이어지는 무릉계곡 말이다. 호랑이가 건너뛰다 빠져죽었다는 '호암소'에서 쌍폭포와 용추폭포까지 이어지는 4km 구간이다. 강원도에서는 무릉계곡을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부른다. 무릉도원은 길을 잃어야 발견할 수 있는 법인데 가는 곳마다 친절한 안내판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걸음마다 느껴지는 용맹한 산세와 푸릇한 숲의 향연속에 무릉도원의 기운이 느껴졌다.
맑은 강원의 물. 부끄럽지만 발을 담궈봤다. 한여름의 힐링이다
반석에 새겨진 글씨
혹시 '무릉'이라는 이름이 플라시보 효과를 주는게 아닐까. 하지만 무릉계곡 바위에 쓰여진 옛 선비들의 글씨를 보면 이곳의 정취에 반한게 나혼자 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이승휴가 무릉계곡에 머물며 <제왕운기>를 쓴 것을 비롯해, 수많은 선비들이 무릉계곡 너럭바위에 이곳을 흠모하는 시와 글씨를 남겼다.
조선시대 말에는 무릉거사라 불리는 선비도 있었다. 최윤상이라는 선비로, 그는 무릉계곡 둘레에 복숭아나무 만여그루를 심어 무릉도원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지금은 복숭아밭이 사라지고 없지만, 복사꽃 향기마저 그윽했다면 얼마나 더 멋졌을까 싶다.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학소대에 그의 시가 전해진다.
맑고 시원한 물에 내 배를 띄우니
학 떠난 지 이미 오래되어 대는 비었네
높은 데 올라 세상을 바라보니
가버린 자 이와 같아 슬픔을 견디나니
- 최윤상 <무릉구곡가>-
우리에게도 익숙한 김지하 시인도 무릉계곡에 관한 시를 남겼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
산이 산을 그리워하던가
된장이 된장을 그리워하던가
양파가 양파를 그리워하던가
쓸데없는 소리 말라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나는 이것을 두타산에서 배웠다
- 김지하 <두타산> -
학소대
아담하지만 위용이 넘치는 삼화사
무릉계곡 초입에 사찰이 있다. 삼화사다. 자장율사가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창건했다. 자장율사는 중국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장경 일부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국내 곳곳에 수많은 사찰을 만들었다. 아담한 사찰이지만 웅장한 두타산의 기운이 그대로 느껴진다. 두타산의 두타(頭陀)는 불교 용어다. 의식주에 연연하지 않고 속세를 벗어나 닭소리 개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지붕이 없는 바위에 앉아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무릉계곡과 그 뜻이 이어져있다.
용추폭포까지 가는 길에는 미소가 절로 나오는 이름들이 눈에 띈다.
선녀들이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부터, 한폭의 예술작품을 보는 듯한 병풍바위와 장군의 얼굴을 닮은 장군바위, 그리고 앙증맞은 이름의 발바닥바위까지. 우리 선조들은 자연의 풍경을 보고 어쩌면 이렇게 이름을 잘 지었을까. 이름으로 대입해서 풍경을 보니 신기하게도 바위가 장군으로도 보이고, 발바닥으로도 보이고 병풍으로도 보였다. 무릉계곡의 또 다른 재미다.
못내 아쉬워서 자꾸만 뒤돌아보고 싶은 순간이 있다. 무릉계곡을 걷는 지금 이 순간이 그랬다. 이 순간이 과거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잡고 싶은 순간이다. 복숭아꽃 향기도 없고, 별천지 같은 세상도 발견하진 못했지만 평온하고 멋진 무릉계곡이었다.
장군바위
선녀탕
쌍폭포
발바닥바위
반석위에서 쉬고 있는 한 가족여행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