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난 주에 이어서 “유혹과 은혜 2 ” 誘惑と恵み 2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4장 5절~6절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5절~6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屋根の端に立たせて、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
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첫 번째 시험으로서 사탄은 예수님께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을 내더니, 이제는 높은 데에서 뛰어
내리라는 시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배경설정이 매우 독특합니다. 그냥 높은 데에서 뛰어내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성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앞서 냈던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는 시험을 세속적인 재물에 대한
유혹이라고 한다면, 이번 시험은 보다 더 차원이 높은 시험이라는 뜻이요, 두 번째 의미는, 이번 시험은 단순히 세상적인 유혹이 아니라
신앙적인 유혹이라고 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돈이나 재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무리 고상한 척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매일 식사도 해야 하고 옷도 입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를 위해서는 자기 것이든 하물며 남의 것이든
간에 돈이나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나 재물을 얻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최종목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물론, 아, 내가 큰 회사를 차려서 큰 돈을 벌어보겠다……라고 한다면 또 모를까, 오늘 한끼 먹는 것이, 예컨대 상황이 대단히 어려울
때에는 오늘 한 끼, 내일 한 끼 먹는 것이 시급한 문제가 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인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선 오늘 한 끼, 내일 한 끼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 한 끼 두 끼 먹는다는 것이 내 인생의 최대
목표가 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하지만 오늘 이 시험은 어떻습니까. 이는 어찌 보면 내 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경우에 따라서는 내 인생의
최종목표가 될 수도 있는 부분에 대한 시험인 것입니다.
첫 시험이 세상적인 방법에 의한 재물에 대한 유혹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두 번째 시험은 바로 세상적인 방법에 의한 명예에 대한
유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험에 담긴 두 번째 의미, 그냥 높은 곳이 아니라 하필이면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시험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당시에는 지금처럼 고층빌딩도 없었을 테니까, 만약 지금 같았으면, 서울이면 남산타워나, 동경이면 스카이트리? 우리가 살고 있는
군마현이라면 군마현청 같은 건물이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성전 꼭대기까지 예수님을 모시고 갔었던 것일까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귀 사탄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음에 말씀 드릴 세 번째 시험을 보시면
아실 수 있겠습니다만, 마귀 사탄의 능력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성전 꼭대기가 아니라 훨씬 더 높은 곳에라도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두 번째 시험을 본다면 굳이 성전 꼭대기에서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명예 중에서도 신앙적인 명예로 유혹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를 확인해주는 근거가 또 하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6절을 다시 한 번 보시면, 사탄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4장 6절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
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놀랍게도 마귀 사탄이 성경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 기록은 성경에 있는 부분입니다.
시편 91편 9절~12절
“9.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10.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それは わが避(さ)け所 主を いと高き方を あなたが自分の住まいとしたからである。
わざわいは あなたに降りかからず 疫病も あなたの天幕に近づかない。
主が 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て あなたのすべての道で あなたを守られるからだ。
彼らはその両手にあなたをのせ 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
이를 보더라도 사탄이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합니다.
자,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신다면서? 그렇다면 뛰어내려봐.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거야. 다른데도 아닌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졌는데도 다치지 않았어. 그렇게 되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다치지 않았다고 믿을
거 아니야. 여기저기서 할렐루야 소리가 나고 너는 박수를 받으면서 믿음이 좋은 사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거야.
이게 지금 마귀가 했다는 말 때문에 그렇지, 만약에 그걸 빼고 들으면 어떻습니까. 성경적으로 볼 때 틀린 부분이 있나요?
만약에 제가 다음 주 주일 아침에, 아니 뭐 꼭 다음 주가 아니더라도, 오늘 이 예배가 끝난 다음에, 여러분들 잠시 바깥으로
나오시라고 하고, 제가 우리 교회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주님 저를 지켜주시옵소서!” 하고 외치면서 점프를 했는데, 그 순간 정말
여기저기서 천사가 날아오더니 제 몸을 붙잡아주어서 제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면, 여러분께서 그것을 보고, “사탄아
물어가라!”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이 소문이 퍼져서
우리 교회도 부흥할 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제 말이 이상한가요? 그런데도 제가 뛰어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제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요? 그렇다면 한 번 제가 오늘, 아니, 지금 곧바로 뛰어내려 볼까요?
지난 2014년 2월 16일, 미국 CNN과 AP 통신이 다음과 같은 뉴스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뭐냐 하면 미국 캔터키 주에
사는 교회의 어느 한 목사님이 뱀에 물려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소식 아닙니까.
그래서 아이고, 어쩌다가 그런 끔찍한 사고를 당하셨을까 했습니다만,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까 이게 좀 이상합니다. 뭐냐 하면 이
목사님은 예배를 드릴 때에 뱀을 가지고, 그것도 살아 있는 독사를 가지고 예배를 드렸다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께서도 어쩌면 이 소식을
접하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니 허고 많은 좋은 것들을 내버려두고 왜 하필이면 뱀을 들고 예배를 드렸을까 했더니만, 이 목사님, 나름대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소식을 전한 한국의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이 목사님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믿음만 있으면
독사에 물려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이른바 뱀 구원설”을 신봉해왔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지금 말이 됩니까. 그런데 그럼 성경에 그런 내용이 없느냐. 아니요. 있기는 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18절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信じる人々には次のようなしるしが伴います。すなわち、わたし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新しいことばで語り、
その手で蛇をつかみ、たとえ毒を飲んでも決して害を受けず、病人に手を置けば癒やされます。」
자, 보세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미국의 그 분도 목사님이셨으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믿었겠지요. 그렇다면 뱀을 집어 올려도, 뱀에 물려도 죽지
말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연합뉴스의 그 기사에 의하면, 그 목사님은, 그 날 뱀에 물리고 밤 8시 30분에 귀가하셨는데, 연락을 받고 출동한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치료를 받기 위해서 빨리 병원으로 가자고 설득을 했지만, 목사님은 이를 거부를 했고, 결국 밤 10시 쯤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참 안타까운 노릇이지요. 저는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래도 그냥 예배 때 무슨 뱀을 유리 상자 안에 넣어두고 그냥 좀 만지거나
하는 수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거 인터넷에 보니까 동영상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구요. 아주 큰 뱀을
꺼내서 만지는 정도가 아니라 목에 걸기도 하고 그러면서 예배를 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내용이 있습니다. 재작년 기사에 보니까 또 이런 내용이 실렸는데, 그로부터 4년 뒤인 2018년 8월 17일에
그 교회에서 또 목사님이 뱀에 물리는 사고가 있었다는 거예요. 아니, 그 목사님은 돌아가셨다면서요? 그러면 이번에는 누가 또 그런
변을 당했나 했더니만, 누구겠습니까. 예, 그 목사 아드님이시래요.
이 아드님도 목사님이셨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아주 물리는 순간의 동영상까지도 인터넷에 올라와 있더라고요. 뭐, 별로 좋은 것은
아니니까 한 번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역시 이 분도 아버지를 따라서 예배 시간에 뱀을 꺼내고 그러는데, 뭐 자기
아버지도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주 그 큰 뱀을 목에 걸고 점프도 하면서 마이크로 설교를 하더라고요. 정말 말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뱀을 손으로 잡고 이렇게 높이 들어올리는데, 그 순간 뱀이 이 목사님 목을 콱 하고 물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막 피가 셔츠에
젖을 정도로 흐르더라고요.
그래도 이 아들 목사님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한 가지 배운 점은 있었나 봅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는 아버지와 달리 순순히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다행이 목숨은 건졌다고 합니다만, 참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베드로후서 3장 16절~17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また、私たちの主の忍耐は救いであると考えなさい。愛する、私たちの兄弟パウロも、自分に与えられた知恵にしたがっ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とおりです。
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
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이렇게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된 명예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처럼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이 성경말씀에 적힌 대로 천사가 나를 살려줄 거라면서, 교회 꼭대기에 올라가서 떨어지면서 설교를 하겠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제발 저를 말려주시기 바랍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고 말씀이 전파되고 예수님이 전파되고 십자가가 전파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건 복음전파가 아닌
구경거리, 싸구려 서커스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자신이 가로채려고 하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건 예전에 제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만, 아마도 2017년 12월 정도로 기억을 합니다. 제가 한 통의 메일을 받았는데 “한국
목사님들을 위해서 설교집을 책으로 출간하면 매우 좋을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저더러 설교집을 출판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는 제의였습니다.
메일을 보내신 분은 알고 보니 한국에 있는 어느 기독교 출판사 대표님이셨습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이와
갈은 메일을 받으니 참 감사하지요. 그래서 그 메일을 받은 것이 2017년 12월이고, 그 다음 달인 2018년 1월에는 마침 또
한국에서 제 개인적으로 중대사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아, 어차피 다음 달 1월에는 한국을 방문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단
연락을 해보았더니 원고를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설교 원고 중에서 주제를 정하고 분류를 한 다음에 며칠에 걸쳐서 교정을 본
다음에 보내 드리고는, 2018년 1월에 한국에 가서 또 출판사 쪽과 연락을 하고 방문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이야기가 좀 이상해지더라고요. 한국에 가서 거기 담당자와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서 하는 말이, 책이 나오면 제가 몇 권을
구입해줄 수 있느냐는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기독교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다른 책들은 몇 권 내보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럴 때 제가 몇 권을
구입한다거나 내가 돈을 얼마 낸다거나 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출판사가 책을 출판하고 책이 팔리면 그 중에서
인세로 제가 얼마 가져가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니, 제가 책을 구입한다는 게 무슨 말씀이세요? 라고 물었더니만 그 쪽 담당자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말이
“목사님께서 책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내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라고 하더라고요.
아니, 그래서 저는 속으로, 내가 책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 책을 사지, 내 책을 내가 왜 사나?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그게
아니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꽤 많은 목사님들이 출판사를 통해서 설교집을 책으로 내고는 그 책을 어느 정도 매입을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기 돈을 내면서 출판하는 자비출판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도대체 얼마나 구입을 해야 하냐고 하니까 무슨
200권이라나, 300권인가를 구입하라는 것이에요.
당연히 저는 거절했습니다. 물론 책을 구입할 그런 돈도 없거니와, 만약에 제가 그렇게 구입을 한다면, 출판사 측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이득은 확보가 된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그 책을 판매할 의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 도대체 이런 식으로 누가 책을 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만,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출판사 건물이 있는
위치가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서울에서도 상당히 땅값이 비싼 지역, 그것도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출판사도 어느 방 하나를 빌려서 하는 것이 아닌, 어렴풋이 기억하기에 4~5층짜리 건물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건물이 그 출판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임대라 하더라도 그 비용이 보통 비싸지는 않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그와 같은 책만 출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 대형출판사도 아닌 중소규모 기독교출판사인데 그와 같은 곳에서 그 규모를
유지한다는 것은 뭐냐.
꽤 장사가 된다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가끔 다른 교회 홈페이지 같은 곳에 들어가서 목사님들의 프로필을 보게 되면, 책 집필 목록이 이렇게 쫘악 적혀 있잖아요?
물론 훌륭한 책들도 많으리라 여겨집니다만, 이런 사실을 제가 직접 경험하고 난 후로는, 좀 기존과는 다른 식으로 제게는 보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명예라고 하는 것이 어디 책 출판 뿐인가요? 무슨 학위 같은 것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학위를 받는
목회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책을 출판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학위를 받는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책들은 많이
나와야 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속적인 방법으로, 잘못된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그것이 무슨 명예가 되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오히려 세속적인 명예로 유혹하는 사탄에 굴복하는 모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특히 한국에 보면 금식을 많이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 금식에 대한 능력을 간증하는 사람들도 많이 계시지요. 믿음이
있으신 분들 중에서 금식에 대해서 이를 나쁘다고 하는 분들은 안 계실 것입니다. 금식의 능력, 금식에 대한 간증 같은 것을 들어보신
분들도 많으리라 여겨집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 서점에서 <금식>이라고 검색어에 넣어보니까 무려 200권 가까이의 책이 나왔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좀 다른 내용이 있는 책도 있었습니다만, 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100권 이상의 금식에 대한 책이 지금 시중에 나와 있다고
하겠지요.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문 같은 곳에 보면 40일 금식을 몇 번 했다 하고 나온 기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40일 금식을 했더니 예수님을
보았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는 이야기, 한 번 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반면에 잘 안 알려진 사실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40일 금식 하다가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한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실은 잘 안 알려집니다. 그러면서 신앙에 있어서
금식을 강조하는 분들이 계셔요. 믿음이 있다면 40일 금식 정도는 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40일 금식도 하지
못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40일 금식에는 근처에도 못 가본 저 같은 경우에는 찌그러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왜 그렇게 금식 기도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성경에는
금식기도에 대한 능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렇게 금식을 강조하는 분들은, 그 분들은 정말 성경적인 금식을 하고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40일 금식기도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셨고, 그리고 구약에서는 모세가 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금식을 했을까요.
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モーセはそこに四十日四十夜、主とともにいた。彼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まなかった。そして、石の板に契約のことば、十のことばを書き記した。
그리고 에스더서도 봅니다. エステル記
에스더 4장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エステル記 4章16節
「行って、スサにいるユダヤ人をみな集め、私のために断食してください。三日三晩
、食べたり飲んだりしない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も私の侍女たちも、同じように断食します。そのようにしたうえで、法令に背くことですが、私は王のところへ参ります。私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たら死にます。」
모세가 40일 동안 금식하는 동안 떡을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시 왕비였던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금식을 당부하는데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고 합니다.
요즘 금식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도 물론 그랬습니다만 물을 많이 마시잖아요? 금식을 하다 보면 배가 고프니까 물로라도 허기를
채우지 않으면 참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기도원에 보면, 금식할 때에는 물을 마실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에 보면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밥을 안 먹는 것만이 아니라 물도 마시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물을 마시면서 하는 금식은 가짜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제대로 금식을 하려면 밥을 안 먹는 것만이 아니라 물도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금식을 한다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자랑이 되기 위한 것인가요? 39일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40일 하면 구원을 받는
건가요? 3일 금식한 사람보다 10일 금식한 사람이 믿음이 더 많은 건가요?
어차피 다 물 마시면서 금식하셨잖아요. 그리고 무슨 보호식 같은 것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장기 금식하기 전에는 며칠 전부터 조금씩
식단 조절을 해야 하고, 금식이 끝난 다음에는 조금씩 또 조절을 해야 한대요.
그게 그러면 성경에 있는 내용입니까. 아니, 그게 틀렸다거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을 위해서 필요하면 하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도 먼저, 무엇을 위한 금식인지를 알고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금식은 나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40일 금식을 했다고 자랑할 필요 없습니다. 금식기간 동안에 물을
마셨느냐, 안 마셨느냐, 금식을 3일 했느냐 40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원에 가면 금식을 오래 하셔서 아무 것도 못하고 기운이 없어서 누워 계신 분들 꽤 많이 있습니다. 저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일어나서 물을 드십시오. 식사를 하십시오. 괜찮습니다.
그리고 기운을 차리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이웃을 섬기십시오. 전도를 하시고 봉사로 섬기십시오. 그것이 훨씬 더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 며칠 금식했다고 말하고 싶어서 금식을 한다면, 이는 분명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는 금식만이 아닌, 돈 들여서 안
팔릴 책을 내는 거나, 떳떳하지 않은 방법으로 석사나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나 다름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꼭대기에 올라가서
떨어지거나 뱀을 들고 설교하는 목사님 같은 사람들과 다름이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あなたがたのうちだれが、心配したからといって、少しでも自分のいのちを延ばす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이는 단순히 육신적인 키나 수명에 대한 말씀 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나 자신을 높이려고
해도, 그것은 헛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누가 높여 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높여 주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우리를 높이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높이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7장 10절~12절
“10.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彼らは大声で叫んだ。「救いは、御座に着いておられる私たちの神と、子羊にある。」
御使いたちはみな、御座と長老たちと四つの生き物の周りに立っていたが、御座の前にひれ伏し、神を礼拝して言った。
「アーメン。賛美と栄光と知恵と感謝と誉れと力と勢いが、私たちの神に世々限りなくあるように。アーメン。」
그렇습니다. 내 힘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고, 단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셨기에 우리는 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고백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21장 26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관을 제거하며 왕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エゼキエル書 21章26節
神である主はこう言われる。かぶり物を取り、冠を外せ。すべてがすっかり変わる。低い者を高くし、高い者を低くせよ。
이사야 52장 13절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イザヤ書 52章13節
「見よ、わたしのしもべは栄える。彼は高められて上げられ、きわめて高くなる。
우리를 낮추고 높이는 권세는 오로지 우리 주님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길이 형통하고 주님께서 높이 들리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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