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국가기구의 창설, 재편
남한에서 미군 점령군의 효력이 발생한 것은 1945년 9월 조선총독이 미군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맥아더 대장의 대리인인 하지 중장에게 항복한 그 시각부터 시작되었다. 맥아더는 이날자로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 제1호, 제2호, 제3호를 각각 발표했는데 독립국가의 헌법에 준하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관 포고 제1호는 38도 이남의 모든 통치권과 행정권이 맥아더 사령부의 군정 아래서 시행된다고 밝혔으며,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어떤 조직도 주권을 행사할 수 없고 미군사령부만이 배타적이고 유일한 주권의 주체라고 선언했다.(주15)
1945년 9월 12일 하지 사령관은 아베 일본 총독을 해임하고 아놀드 군정장관을 임명했으며, 9월 17일 미군사령부는 총독부 기존 기구를 활용하여 8개 국장(총무, 경무, 재무, 농림, 재무, 학무, 식산, 사정)에 미군 장교들을 임명했다. 미군정은 10월 15일 총독부 기구를 바탕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표2> 참조)
입법, 사법, 행정 각 기관을 망라하여 남조선 과도정부가 성립되고 민정장관 안재홍을 비롯하여 각 부장 및 입법, 사법 기관의 관리들이 모두 한국인으로 교체되었으나 군정장관의 거부권 행사, 각 부처 내의 미국인 고문의 부결권 행사와 간섭 등으로 사실상 자율적인 행정 통제 권한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1946년 6월 29일 한국 민족의 대표기관으로 입법기관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하였고, 군정 법령을 제정한 뒤 1946년 말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설립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입법의원은 군정장관의 해산권 및 새 의원 임명권, 선거 요구 권한 등으로 한국인의 대표기구가 아닌 미군정 통치의 보조기관에 불과했다. 입법의원은 관선의원 45명, 민선의원 45명 등 9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관선의원의 경우 군정장관이 임명권을 갖고 있었고, 민선의원 선거 또한 10월 항쟁 와중에 좌익 정치지도자들이 모두 검거된 상황에서 이루어져 좌익의 참여가 조직적으로 배제되었다. 인민위원회 조직이 와해되지 않았던 제주도에서만 인민위원회 출신이 선출되었고, 대부분 한민당과 독촉계 등 극우인사들이 당선되었다. 한국민주당 12명, 독촉국민회 17명, 무소속 13명, 한독당 4명, 기타 4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무소속은 이승만, 신익희, 이갑성, 이종근 등 한민당과 친이승만계열의 단정지지자, 극우인사들이었다.(주17)
이에 대해 1946년 11월 4일 좌우합작위원회 공동의장인 김규식은 선거 부정이 심하고 친일파가 주류인 민선의원에 대해 재선거를 요청했으나 미소공위 미국측 대표인 브라운 소장은 이를 거절했다. 관선의원의 경우는 민선이 끝난 후 당시 좌우합작위원회의 심사위원이었던 김규식, 원세훈, 최동오, 송남헌 등이 추천한 자들 중에서 하지 중장이 최종 결정했는데, 합작위원 6명, 우익 12명, 중간파 12명, 기타 15명으로 결정되었다.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은 단정수립을 준비하는 입법기구 수립에 반대하여 선거에 불참했으며 관선의원에 지명된 민전 위원을 제명하겠다고 했다.(주18) 이렇게 해서 미군정 국가 행정기구뿐만 아니라 입법의원조차도 친일파, 한민당계, 친이승만계 등 친미세력 일변도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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