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모 칼럼 (2025.8.30)
<제1부>
(대통령 박정희와 인간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재임 18년 6개월의 통치기간 그가 즐겨 쓰는 휘호 대로 내일 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치셨습니다.
제2차 대전 후 카다피나 무바라크카스트로, 마르코스 등 장기 집권 독재자는 자신의 치부와 권력 남용으로 조국에는 빈곤과 파멸을 남겼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만이 조국의 선진화를 이끌어 조국에 희망과 영광 그리고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근대 세계사의 영웅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필자 저서 "중화학 공업에 박정희의 혼이 살아있다" (기파랑 2004.12 발간)에서 청와대 생활에서의 후일담을 실어 놨습니다.
이것은 필자가 71년 11월에서 79년 11월까지 만 8년간을 청와대의 실무담당 비서관으로 한자리에서 근무한 오직 한 사람의 비서관의 자격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색채가 많은 기사가 아닌 경험에서 얻은 것을 바탕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에서 중화학 및 핵개발등을 담당한 비서관으로 8년간을 한자리에서 위로는 오원철 수석 비서관과 김정렴 비서실장 밖밖에 없이 위로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 각하였습니다.
청와대 비서실의 내규에 따라 각하께 대면 보고는 수석비서관 이상이라야 했으므로 대면 보고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사진 한 장 없습니다.
명함도 못 만들고 관용이 아닌 자가용 번호 승용차만 사용케 했고. 점심은 구내식당을 권했고 청와대 비서관으로 품위를 지켜야 된다는 것도 들어 있었습니다.
각하를 청와대 구내에서 봐온 것은 본관에서 당직 설 때 두 번으로로 귀청 하실 때 고생 한다고 악수릍 해주셨습니다. 구내 이발관에서 1번 합쳐서 3번밖에 없었습니다.
필자는 하부 직원이 없는 최하 담당비서관으로 많은 보고서와 재가서류 또는 병풍식 미니 차트를 만드는 것은 저의 소관사항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은 팔자가 8년 간이 근무했으니까 얼굴은 모르지만 이름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오원철수석이 77년 어느 날 대통령께 김광모를 상공부
공업 진흥청장으로의 승진을 건의드렸을 때 좋아! 승진시켜야지라고 말씀하셨다가 각하께서 "중화학에 지장이 없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오수석이 "있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는 통에 "없던 걸로 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필자의 청장 승진의 기회는 없어지고 필자는 평생을 비서관으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공계( 공대 화공과) 출신 "중화학 담당 실무자가 보는 대통령 박정희와 인간 희"라는 제목에서 인간 박정희 부분과 대통령 박정희를 같이 한꺼번에 요악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용이 비사를 주로 하여 정사와 섞여 두서없이 쓰다 보니 장문의 글이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인간 박정희와 대통령 박정희>
(첫째 ) 외강 내유의 인간성을 보유한 다정다감한 인물이다
근엄함이 몸에 베여 외강내강의 인사로 보이나 내부적으로는 다정다감한 인사였다.
농촌에서 밀짚모자 쓰고 모내기하는 모습 자주 본다. 하계휴가시 공고를 방문하여 실습하는 학생들을 어루만져 주는 기회가 자주 있었다.
기능인력 양성 모범공고인 부산 기계공고는 네 번이나 들리셔서 격려해 주셨다.
70년대는 하계휴가시 진해 저도에 머무르실 때 창원 기계공단에 들르셔서 격려 휘호도 써주시고 건의사항을 해결해 주셨다.
여기 어떤 날의 대통령 시찰 스케줄을 참고로 기재해 본다.
방문 스케쥴 예시
현대양행 》삼성중공업》쌍용중기 》점심 후 제2단지 》 대우중공업》공단 괸 리 시무실
(시간이 정해져 있었음)
<마산 수출자유 지역 방문>
60년대의 한국의 수출은 주로 손재주 좋은 한국의 여성인력에 의하여 섬유 봉제품이 만들어짐으로써 수출한국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최대의 수출 자유지역인 마산 공단을 방문하셨다.
흰지북을 입고 재봉틀을 한 대씩 앞에 놓고 스웨터를 재봉하고 있는 한일합섬 공장이었다
대통령은 마이크를 잡으시고
"내가 수출역군으로 일하는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선물로 좋겠느냐?"하고 물어 섰다.
한 여공이 대뜸 일어나 "영어를 가르쳐 주는 야간학교를 설치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회사에서 일할 때 작업 지시가 전부 영어여서 영어가 부러윘던 것이다.
회사는 대통령 지시로 여공을
위한 야간학교를 설립하여 교복과 모자를 주어 시골집에 갈 때 자랑스럽게 가도록 하였다.
야간학교는 학생들의 희망에 따라 주로 영어가 원이서 영어를 주로 하고 역사와 한문을 부제로 하여 가르쳤다.
졸업 시 야간 특수학교니까 중학졸업장을 줄 수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아시고 특례를 만들어 졸업장을 주게 하여 졸업 시에 졸업장 수여 때는 식장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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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수행예 잘못이 있거나 비리가있을 때는 용서가 없다. 재해사건 사고가 있을때는 도와주셨다.
동료 이석표 비서관이 일선에서 ADD의 병기 시사행사 시 필자와 같이 참관 중 가슴에 파편을 맞아 생명이 위독했었다.
대통령은 이를 보고 받고서
어떡하든지 살려내라고 엄명을 내려섰다. 필자는 입원실에서 사흘간 밤새워 지켰다. 그의 유해는 지금도 ADD 정문 앞에 안장되어 있다.
대통령이 어느 봄날 경호실 모터 사이클을 앞세우고 지방순시를 하기 위해 시골길을 달렸다.
농부 한 사람이 봄갈이를 위해 손을 몰고 갔는데 소가 비키지를 않았다. 오토바이가 붕붕소리를 내어 소를 쫓고 농부를 야단쳤다.
박대통령은 차에서 내리시어 농부에게 "미안합니다. 우리 경찰들이 몰라서 한 짓입니다" 하고 사과를 했다는 일화는 대통령의 인간성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다.
(둘째 ) 인간 박정희는 다재다능했다
박정희 장군의 혁명포부를 밝힌 책 "국가와 혁명과 나"는 그가 손수 쓴 작품이다. 그의 저서는 서너 권 더 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마을이 밝았네의 권면가나 새마을 노래는 그가
작사작곡 한 것이다. 육영수 여사를 기리는 사부곡은 시인 수준이라는 평가다.
붓글씨 솜씨는 많은 휘호를 쓰신 걸 보면 알 수 있다. 민족 진흥회 가 발간한 두꺼운 휘호집이 있다.
스포츠도 틈을 내어 즐겨 하심으로서 쳬력을 연마하셨다. 관저 뒤편에 승마와 양궁장이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좋아하셨다. 틈틈이 낚시도 하셨다.
보안 때문에 어디에나 가실 수 없어 인천에 있는 한국화약 저수지에 자주 들르셨다.
넓은 저수지에서는 낚시로 고기가 잘 안 잡힌다. 한국화약은 이틀 전에 연락을 받고 고기를 몇 광주리 잡아 저수지에 쏟아부어 대통령의 낚시에 고기가 잘 잡히도록 하였다
이 연락은 오윈철 수석과 한국화역의 권혁중 전무가 담당하였다.
이분은 어디서나 통한다고 해서 권통일 불렀다.
뙤약 생산의 오직 하나의 생산업체였던 한국화약이 회약수송 중 이리에서 50여 명의 사망사고를 수반한 대규모 화약 열차 폭발사고가 있었다.
매스컴은 대서 특필하고 경영자를 구속하고 공장문을 닫게 해야 된다고 했다. 난장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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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의 화약생산공장에서 건설현장이나 광산에 폭약을 공급할 수 없었다.
담당이 아니지만 오원철수석이 용감하게 나섰다. 사고의 원인은 주제품인 폭약 TNT의 자연 발화에 연유된 것이라고 보고 드렸다
사고 조사는 철저히 하되 경영자 처벌이나 면허 취소는 면하게 하여 화약생산 공급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지금 모든 군용 탄약을 생산하는 방산 탄약 저 정업체인 한국화악은 대통령의 지시로 살아났다는 비사도 있다.
(셋째) 박정희의 시정방침은 명백하고 확고부동했다.
그의 18년 6개월간의 재임기 중 매년 연초에 대통령 연두기자 회견으로 거년의 실적을 국민에게 보고하고 당해년의 계획을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하였다.
그 후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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