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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들고 인사를 하는데요. 이 시간 성령의 뜨거운 물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제가 할 말을 우리 권사님이 미리 해주셨어요. 우리 교회의 지난 주일부터 지금 뭔가에 이렇게 꿈뚤꿈뚤거림이 느껴집니다. 여러분들 안에서 그 꿈틀거림이 느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요. 이것이 저는 작은 불꽃 스파크가 일어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스파크가 일어날 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빨리 불을 붙을 것들을 갖다 대놓고 불이 붙기만 하면 이제 큰 불로 번지는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일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 더욱더 지금 이제 오늘 월화수 3일이 지났는데 그 이후의 모든 과정 속에 우리 공동체가 더욱더 견고하게 세워지는 시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잠깐 역사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하는데요. 주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근데 그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기독교인들은요. 굉장히 많은 박해와 목숨을 내거는 순교를 당하고 그들은 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원형 경기장에 끌려가서 짐승에게 먹이가 되기도 했고요. 또 그냥 몸에 화염을 입혀서 그냥 불을 밝히는 전등처럼 그렇게 인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313년에 이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지금 이런 외부적인 박해들은 사라졌는데요. 313년 이후에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죽이는 불행이 시작됩니다. 313년 전에는 외부에서 우리를 죽였다면 이제 33년 이후에는 내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죽이는 상황이 생겼다는 거예요.
어떤 상황이냐면 교리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신앙과 다른 신앙을 가졌다는 그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적인 상황에서는 이해가 도무지 되지 않는 상황인데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주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야기 있잖아요. 갈릴레이의 이야기,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이는 진실을 말했지만 파문 당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근데 이런 건 아주 그냥 소수의 이야기에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중세에 500여 년 동안 지속됐던 무지막지한 종교 재판입니다. 이 종교 재판에 조금이라도 생각을 달리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재판을 통해서 가차 없이 태워 죽였습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여러 이제 학자들이 그 추정하는 수치가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공통된 말은 로마 카톨릭 내에서조차 이 종교 재판을 통해서 화형당한 사람들의 숫자가 아마 최저 수백만 명에 달할 것이다고 말합니다.
근데 이 종교 재판 외에도요. 그 당시에 마녀 판결이라고 해가지고 또 수많은 여성들이 화형당했습니다. 마녀라고 그 마녀로 화형당한 숫자만 해도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종교 재판과 또 마녀 사냥 이러한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 기독교 주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몰라요. 어쩌면 이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정말 인류에게 행한 너무나도 치욕적인 상처입니다. 솔직히 히틀러를 우리가 욕하지만 히틀러 못지 않은 그런 교회의 모습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모든 과오는 어디서부터 시작됐냐면 바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진짜다. 너 다른 말을 해 그러면 너는 가짜야
이렇게 판결을 한 것이죠.
근데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어떨까요? 우리 개신교 개신교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종교개혁일이 며칠이에요. 1517년 10월 31일 15 17 우리 교회 뒷번호가 15 17이라고 제가 종교개혁 그 해를 기억하자고 했는데, 우리 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라서 그때 기념하면서 교회 뒷번호를 1517로 했다고요.
근데 여러분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구텐베르크 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이제 그 당시에 카톨릭이 면죄부 판매하는 것에 대하여 반발하여서 이제 그걸 학문적으로 토론하고 싶은 마음에 구텐데르크 대학의 게시판이었던 그 만인 성자교회의 문에 95개 조항을 써서 붙이고 이제 뭔가 토론을 이끌어가려고 하는 그런 시작점이 되었는데 이게 나중에 세계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놓는 종교 개혁의 시작점이 될 줄을 이 루터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타락한 그 중세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이 루터를 사용하셨어요. 근데 이 루터를 통해서 시작된 이 종교의 이 개혁의 불꽃이 막 물밀듯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온 유럽 대륙에 불길처럼 일어났어요. 그래서 곳곳에 개혁의 지도자들이 막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수많은 장소 곳곳에서 개혁하는 리더들이 세워지기 시작하는데 이 개혁하는 개혁의 지도자들이 생각이 다른 거예요. 개혁에 대해서는 분명한데 개혁의 내용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생각들이 조금씩 다른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아주 큰 영향력을 끼쳤던 독일의 헤센지방의 영주 필리프 백작이라고 하는 사람이 1529년 10월 1일에 마르부르크라고 하는 곳에서 회담을 주선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지도자들을 이렇게 모아가지고 이제 그곳에서 의견을 모아서 지금 우리는 군대까지 동원해서 이 로마 카톨릭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니 우리 개혁 지금 신앙을 가진 우리가 각기 이렇게 싸울 게 아니라 서로 다르다고 분열될 게 아니라 한마음으로 모아서 우리가 대항해야 되지 않냐 이런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회담에서 15개의 의제를 가지고 쭉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한 가지 의제가 통과가 되지 않아 성만찬에 관련된 거였습니다. 결국에는 이 프로테스탄스의 연합체가 이 회의에서 결렬돼 버립니다.
그리고 이때의 결렬이 이 이후에 지금 우리 개신교가 수많은 분파들이 막 있잖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교단들 그런 것들이 시작되게 된 원인입니다. 만약에 이 1529년 이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개혁의 쌍벽을 이루었던 독일 세력 그리고 스위스 세력의 지도자들이 마음을 합하기만 했으면 아마 개신교가 지금 현재 같은 모습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이후에 등장하는 수많은 그 개혁의 지도자들도요. 이때 사건 이후에는 각자 그냥 주장만 하는 거예요. 자기의 개혁의 정신을 가지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 안에서도 건강함이 있었죠. 하지만 교회가 분열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그 뒤로 자기 독자적인 노선의 칼뱅이 등장하기도 하고 또 자신의 이혼과 재혼을 반대했던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면서 세운 영국 성공회 이런 것들이 막 난립하기 시작합니다.
근데 지금 그 뿌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잖아요. 종교개혁 초기부터 이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한 그 모습이 지금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금 얼마나 많은 교단과 교파가 있는지도 몰라요. 저도 교회 목사니까 성결교회 안에 몇 개의 분파가 있는 거 정도만 알고 장로교회도 큰 교회들만 알죠. 장로교회만 해도 몇십 개가 된다고 하는데 솔직히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이 모든 분열의 원인이 뭐예요? 나와 다른 걸 용납하지 않는 그 마음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수많은 교단들이 있는데 그 교단 중에 참된 교단은 어디일까요? 성결교단은 이렇게 말 안해요. 어떤 교단이 참된 교단이라고 말할 수가 없죠.
어떻게 영혼 무한하신 하나님을 하나의 교단이라고 하는 그 테두리 안에 담아놓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죠. 참된 교회는요. 오히려 교단이나 그런 교세 어떤 그런 교파의 장벽을 뛰어넘어서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함께 마음을 모으고 함께 가는 그것이 바로 참된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이제 본문의 4절에 있는 내용으로 들어가 보려고 하는데요. 예수님이 이제 못 박혀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지난주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신 이후에 이야기가 4절의 이야기인데요. 먼저 오늘은 그 앞부분에 있는 사도들과 함께 모이사라고 하는 이 말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사도 사도와 함께 모이사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원래 원어 성경을 보면 이 사도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 짧은 이 단어 한 단어에 이 초대 교회 그리고 우리 교회의 태동이 어떠했는지 예수님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있어요.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떻게 생겨났고 또 교회가 어떻게 발전했으며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라고 하는 걸 우리한테 가르쳐주고 있거든요.
사도행전의 본격적인 내용의 시작점에 이 함께 모이사라고 하는 이 단어가 바로 모임에서부터 교회는 시작됐다라고 하는 걸 이야기합니다. 근데 그 누가 누구와 모였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 성자 예수님께서 하찮은 제자들 죄인에 불과했던 그 죄인과 같은 제자들, 무식하고 무지하고 추하고 보잘것없는 그런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모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교회 가운데 임하지 않으시면 교회에 수백 명 수천 명이 모여도 이건 교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교회가 존재하는 시작점은 하나님이 이 교회 공동체 안에 함께하신 것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당시에 좀 최하 계층에 속했던 어부에 속한 제자들이 있습니다. 또 마테나 레위처럼 세리의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열심 당원인 시몬도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근데 여러분 지금 이 사람들의 색깔이 너무 달라요.
이 사람들은 섞이기가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에 세리는 나라가 지금 망한 상태에서 지금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우리로 따지면 약간 일제의 앞잡이 같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런 사람들하고 그 당시에 나라가 독립하기를 원하면서 무력을 사용하면서까지 독립을 원했던 마치 우리나라로 따지면 독립군 같은 그런 열심당원이 제자들 가운데 있었다고요.
근데 이 둘이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이게 어색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당시에 온갖 착취에 일삼았던 세리 세리들과 그리고 착취의 대상이었던 어부들, 이 제자들이 한 자리에서 형제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참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됐죠. 그 12명의 제자가 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뭐예요? 바로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몇몇을 살펴보면 너무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그 안에 그룹이 너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냥 모이면 아마 싸움하다가 끝날 모임이에요. 근데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 하셨다는 것이죠.
근데 예수님의 이렇게 생애를 보면요. 지금 제자들의 면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산에 들린 의원이었던 니고데모, 또 아리마대의 거부였던 요셉 로마 장군, 로마 제국의 장교였던 백부장, 이런 유력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한쪽에서는 비천한 빈민 불치병 환자로 정말 빈털털이가 되어버린 사람, 그리고 또 밤거리의 창녀 이런 사람들도 예수님 옆에 존재했어요. 사회적으로 지금 우리가 생각해 보면 지금 당연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 세상에서 이런 모임이 어디 있습니까? 마치 물과 기름 같아서 서로 융화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가능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함께 모이사라고 하는 말을 조금 더 원어적으로 분석을 해드리려고 하는데요. 헬라어로 쉰알리조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함께라고 하는 신이라는 말과 그리고 모으다라고 하는 할리조라고 하는 말이 모여서 함께 모으다라고 하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질적으로 각자 다른 색깔이 다르고 전혀 생각이 다른 이 사람들이 한데 함께 모이게 된 이유 그 구심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시날리조라고 하는 이 원어에는 함께 식사하다라고 하는 의미도 포함돼 있습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주님이 단지 의례적인 이벤트성으로 이 사람들을 불러모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식사를 나눌 정도로 진정으로 그들과 이질적인 제자들이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한 그룹이 되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성경 이 성경책 전체에 이 쉬날리저라고 하는 단어가 딱 이때 한 번밖에 쓰이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냐면 주님께 국한하여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는요. 어떤 유력한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되고 교회가 모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잠시 잠깐은 뭔가 만들어지는 것 같고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되지 않으면 서로 물과 기름 같은 존재인데 어떻게 그거는 모여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니까요. 근데 사람의 힘으로는 금방 흩어져버리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 이 교회 공동체가 온전히 하나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주변에 모임들이 있을 겁니다. 같은 성향이 있는 사람, 또 좋아하는 거를 같이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친목회 또는 동우회 이런 이름을 붙이죠. 또는 교회 안에서도 선교회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근데 여러분 그런 것 자체가 교회가 될 수가 없습니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놓고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기를 원하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일일이 부르셨다고 말씀드렸죠. 예수님이 제자를 한 명 한 명 부르실 때마다 그 안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부르지 않으셨다는 거죠. 세리와 또 그들에게 착취당하던 어부들이 그리고 세리와 또 열심당원이었던 제자들이 모여져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하나 되어지는 모습을 꿈꿔 오셨다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요.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만든 시간도 다르고 또 사용하신 재료가 그리고 만들어진 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우리는 틀리다고 말할 때가 참 많아요. 다른 것은 다른 겁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또 볼 수 있는 것이 달라서 함께 연합하여 더욱더 함께 한몸으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겁니다. 서로 다른 것은 서로 다름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됨으로 하나님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우리를 보여주신 거예요.
여러분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것 그것은 당연합니다. 여자는 남자가 아니고 남자는 여자가 아닙니다. 서로 사고 방식이 달라요. 여러분들 꼬마 아이들만 봐도요.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을 키울 때 다른 여러분들의 성향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일부러 그렇게 키운 게 아니에요. 그렇죠 아이들의 성향이 그리고 그 어떤 행동 방향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거예요. 인지 구조와 사고 방식이 행동 양식이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부모 안에서 태어난 쌍둥이조차도 100% 우리가 볼 땐 똑같이 생겼다는 쌍둥이조차도요. 다르다는 거예요.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우리가 이렇게 많은 분들이 지금 이렇게 계시지만 이 많은 분들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수용해 가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사랑한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다름을 존중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부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여러분 혹시 다음 때문에 불편하고 그것 때문에 싸움이 원인이 되는 일들이 참 많죠.
저도 역시 진행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고 서로 다름을 존중해 주고 또 내가 못하는 것은 못한다고 미안하다고 서로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 그렇게 하면서 한 몸을 이루는 그것이 온전히 한몸을 이루는 것처럼 교회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상대가 다름을 부정함으로써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는 관계를 이끌어갈 때가 참 많아요.
아까 말씀드렸던 종교 재판으로 수백만 명이 불에 타 죽을 때 그 이유가 뭐였다고요? 나와 다르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관과 너는 달라 그러면 죽였다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하나 되라고 하셨고 사랑하라고 그러셨고 조화를 이루라고 하셨고 하나의 일치를 이루라고 하셨는데 그게 바로 교회 공동체인데 지금 우리의 교회의 모습은 어떤지 한번 점검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내 옆에 지금 내 배우자가 있지 주님께서 나의 곁에 그를 두셨기 때문이라고 여러분 마음에 확신을 가지십시오. 왜 하필이면 이런 사람하고 내가 동역자로서 지금 살아가고 있지? 주님께서 그와 나를 한데 불러 모아주셨다는 거 왜 배경이 다른 서로 우리가 마음이 다른 우리가 이렇게 하늘 소망 공동체라고 하는 공동체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뭔가를 이루려고 하지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인정하면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인정하고 나면 이거는 내가 여기에 등록하려고 내가 사인을 해서 내가 여기에 온 거야라고 하는 내 가가가 되면 안 되고요. 주님이라고 하는 거기서부터 우리 교회는 시작돼야 합니다. 주님이 개척할 때도 또 중간에 등록할 때도 주님이 이 과정을 이끄셨음을 우리는 확신하길 원합니다.
그러고 나면 서로 우리가 다를 때 솔직히 다음이 불편할 때가 있죠. 근데 그 다름을 서로 인정하고 주 안에서 좋아하고 하나 되게 일치되게 만들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참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005년 4월 2일에 교황이었던 요한 바울로 2세가 300년 전에 진실을 주장하고자 파문당한 갈릴레이를 사면 조치했습니다. 그리고 수백만 명의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했던 개혁 종교 재판의 기록을 사람들에게 공개했습니다. 이 내용은 그 로마 카톨릭에게는 치부였기 때문에 비밀 문서였던 거야 1급 비밀 서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픈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 그 신앙 안에서 죽어갔는지에 대한 회개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분명하게 고백하고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조화를 이루고 또 일치를 이루어 가겠다라고 하는 결단의 그러한 시간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한국교회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우리 교회만 중심으로 신앙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우리 다 똑같은 우리 하나님 나라에서 교회니까요. 한국교회가 어떻습니까? 보수 중도 진보 자기들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분열하고 대립하고 경쟁합니다. 이념 계층 세대 지역 찢어질 대로 찢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요. 이런 아픈 현실 속에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 되게 모으셨습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교회가 사도행전 29장을 기록할 수 있는 그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지금 오늘 본문에 이 중요한 단어에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적으로 우리 모두가 나와 우리 옆에 있는 동역자들이 함께 서로를 수용하고 서로를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목적을 기억하고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음 달이면 우리는 창립 7주년을 맞이합니다. 근데 여러분 7년이 지나는 동안 한번 다음 주 주일 예배를 드릴 때 한번 여러분들 이렇게 보십시오. 이 공간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 나하고 한마디 말을 섞어보지 않은 사람이 혹시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 알고 있는 것 같고 우리는 가족입니다.
아모입니다라고 외치고 인사하고 했는데 정작 시간이 지나는 과정 속에 나도 모르게 그냥 나와 편안한 사람들과만 교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좀 불편하면 거리를 두고 그게 교회 안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일이라고 우리가 혹시 외면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와 다른 성도들의 모습을 접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때 그 사람을 부정하거나 그 사람의 모습에 실망하는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다른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또 다른 역사하심을 발견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전혀 이질적인 전혀 다른 느낌의 제자들을 불러모아서 하나 되게 하셨던 주님, 그 당시 교회 공동체가 정말로 끈끈히 모일 수 없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져서 정말 놀라운 일을 이룬 그 모습처럼 우리 교회는 더욱더 조화를 이루고 하나의 마음 일치를 이루는 진정한 이 시대의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고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특별히 사도행전에서 교회의 근본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시는 그 주님의 뜻을 붙들고 우리가 더욱더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여러분들 가정에서도 하나 되는 일에 힘쓰는 여러분들 되시라. 여러분들 때문에 여러분들 부부가 또 자녀들과 하나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직장 동료들이 짝 지어서 서로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때문에 직장 동료들이 하나 되어지는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들로 말미암아 더욱더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런 쓰임 받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