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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초대 기독교 여성
정용석(이화여대)
1. 들어가는 말
흔히 기독론적 고백을 최초로 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한
베드로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베드로와 똑같은 고백을 베다니의 마르다라는 여자가 하였다는 사실(요 11:27)을 모르거나 간과하기 쉽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전하는 사도 바울은 수백 명의 남자들이 그 증인이라고 말하면서 여자들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심지어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도
빠져 있다(고전 15:1-8).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일까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누락시킨 것일까? 예수의 복음 전파 활동에서
여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수와 일행을 물질로 섬겼으며 말씀을 듣고 제자로서 예수를 따랐다. 예수에게 기름을 부어 장사를 예비하고,
예수가 체포되어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까지 믿음의 절개와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으며, 예수의 부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사람도
모두 여자들이었다.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기독교의 역사를 공부할 때 무의식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남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전통적인 기독교 역사 연구는 교리의 발전이나 교회 지도자의 삶과 가르침, 또는 조직 교회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사
기술에서는 남자가 역사의 주체가 된다. 교회 지도자로서 목회하고 가르치고 교인들을 지도한 사람들은 주로 남자들이었고 여자들은 남자들의 뒷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은 아무리 중요한 역할이나 공헌을 해도 인정받기 어려웠고 때로는 이단으로 몰리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초대
기독교 역사를 연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초대 교회의 지도자인 교부들은 모두 남성이었으며 거의 모든 문헌이 남성에 의해서, 그리고 남성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초대 기독교 여성에 대한 연구도 예외가 아니다. 어떤 여성 학자의 지적대로 "초대 기독교 여성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여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주로 남자들이 여자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초대 기독교인의 과반수를
차지했던 여성들의 삶과 그들의 역할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했었을까? 초대교회가 유대교의 방해, 로마제국의 탄압, 이단의 난립이라는 삼중고를
극복하고 로마제국의 종교로 발돋움하게 되기까지 밑거름이 되고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오직 남자들이었을까? 초대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서
여자들의 지위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2. 초대교부들의 여성관
여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
여성에 대한 초대교부들의
견해는 당시 그레코 로마 사회의 가부장적 사고와 제도를 반영하고 있다. 남성 중심적 또는 남성 우월적 전통 속에서 여성은 죄악시되거나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다. 고대 그리스 속담에 "여자들은 제우스가 만든 가장 큰 악이다" 또는 "여자가 당신[남자]을 신선하게 하는 때는 이틀뿐이다.
그것은 결혼식 날과 그 여자를 장사지내는 날이다"라는 말이 있다. 초대교부들의 여성관도 예외는 아니다. 초대교부들 중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말을
해서 악명(?) 높은 사람은 서방신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이다. 그는 여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악마의
출입구이다. 당신은 금지된 나무의 과일을 처음으로 딴 사람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
린 최초의 사람이다. 당신은 악마도 감히 넘보지 못할
남자를 유혹해서 너무도 쉽게 남자, 즉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였다.
이레니우스도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됨을 가르친다:
두
사람[아론과 미리암]이 똑같이 모세에게 대항하는 행동을 했을 때 왜 미리암 만 벌을 받았을까? 그 대답은 우선 여자는 본성이나 계명에 따라
남자에게 종속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더욱 흠이 많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트는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엉뚱한 예를 든다:
그의[남자의] 턱수염은 남자의 표식이며 그가 틀림없이 남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턱수염]은
이브보다 더 오래된 것이며 [남자가 여자보다] 더욱 강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상징이다. 털이 있다는 것은 남자의 뛰어난 속성 중의
하나이다.... 털이 있다는 것은 털이 없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더 건조하고 따뜻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남자는 여자보다 더 털이 많고 더
따뜻한 피를 가지고 있으며 더욱 완벽하고 더욱 성숙하다.
여자의 영혼은 남자의 영혼과 같기 때문에 그녀는 같은 덕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몸의 구조에 있어서는 뚜렷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여자는 아이를 잉태하고 집안 일을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3세기 후반
로마의 암브로시아스터는 남자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남자의 지배에 복종해야 하고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하도록 정해진
여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자는 가르칠 수 없고 법정에서 증인이 될 수 없으며 서약을 하거나 판결을 내릴 수
없다."
여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낮추고 활동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자는 교회에서 설교하거나 가르치거나
성례전을 집행할 수 없었고 단지 남자 성직자의 일을 보조하는 데 머물러야 했다. 교부들은 여자가 사제가 되거나 가르치거나 세례를 주는 것이
이단이나 이방종교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주장한다.
세례를 주는 여자들은 결코 적지 않은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함부로 그것을 행하지 않도록 충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험하며 또한 사악하고 불경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이방 무신론의 무지한 행위들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신들을 위하여 여사제들을 세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만일 세례가 여자들에
의해서 집행되어야 한다면 우리 주님도 요한이 아닌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또는 세례를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사도들을]
보낼 때 여자들도 보냈을 것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말해서는 안되며 가르쳐서도 안되고 세례를 주거나 헌금을 걷어서도 안되며 남자의
직분이나 성직을 맡아서도 안된다.
여자는 교회에서 가르칠 수 없으며 단지 기도하고 교사들의 가르침을 들을 수만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열두 제자를 보내셨지만 어디에도 여자들을 설교하라고 보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다." 그러므로 몸의 지체가 머리를 다스리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이다
306년경에 열린 스페인 남부의
엘비라(Elvira)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교회법을 제정했다:
아내는 남편의 허락 없이 다른 교인에게 편지를 써서는 안된다.
아내는 남편의 이름이 적히지 않고 자신에게만 온 안부 편지를 받을 수 없다 (canon 81).
여자는 밤에 묘지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기도보다는 사악한 일을 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canon 35).
여자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견해는 이브가
아담을 유혹해서 타락시켰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되었고,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자보다 열등하며 남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다. 또한 생리는 여자가 불결한 존재라는 상징이며 생리 기간에는 제단에 접근하거나 성찬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여성에 대한 긍정적 견해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가부장적 사고를 초대 교부들이 지니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남녀평등을 시사하는 진술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자비와 그 결과로
따라오는 하늘의 은총은 성이나 나이나 사람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뉘어짐을 알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며, "모든 사람은 나이나
성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생각하고 느끼는 역량과 능력을 가지고 똑같이 태어났음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특히 자기 수행과 덕의 실천은
남녀에 관계없이 똑같이 행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남자와 여자의 덕은 같다.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의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주님도 또한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의 교회와 하나의 절제와 하나의 겸손이 있다. 음식도 공통된 것이며 결혼도 같은 멍에이다.... 공통된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같은 은총과 같은 구원을 받는다. 사랑과 훈련도 그들에게는 공통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이름은 남자나
여자에게 공통된 것이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 다른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 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절제와 의,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덕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종이나
자유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같은 본성은 하나의 같은 덕을 지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교부들은
성서에 나오는 훌륭한 여성들, 예를 들면 미리암, 드보라, 훌다, 유딧, 에스더, 동정녀 마리아, 안나, 엘리자베스, 빌립의 딸들 등의 믿음과
행동을 높이 평가하고 여자들이 그들을 본받을 것을 권면했다. 특히 동정녀 마리아의 순종적 태도와 순결성은 크게 칭송을 받았고 나아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3. 초대 기독교 여성의 역할
가부장적 전통이 초대교부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독교는
타종교 사회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상승시켰다. 워싱턴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스타크는 초대 기독교 승리의 원인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의 제5장에서 "기독교 성장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흥미로운 고찰을 한다. 가부장적인
그레코 로마 사회에서는 절대적으로 남자 선호의 경향이 있었다. 당시 여성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은 수명이 다해서 죽는 사망이나 병사 또는 사고사가
아니라 유아 살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아 살해였다. 기원전 1년에 쓰여진 편지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그 편지는 이집트에 근무하던
힐라리온이라는 로마 군인이 로마에서 출산을 앞두고 있는 부인에게 보낸 것이다. 그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전히
알렉산드리아에 있음을 알립니다. 모든 사람이 돌아가고 나만 알렉산드리아에 남아있더라도 염려하지 마시오.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들을 잘 보살피기를
요청하고 바랍니다. 봉급을 받는 대로 당신에게 보내겠소. 만일 당신이 [내가 귀향하기 전에] 출산을 했을 경우 아들을 낳으면 키우고 딸이면
없애버리시오. 당신이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말을 전해왔는데 어떻게 내가 당신을 잊겠소.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
아쉬켈론(Ashkelon)이라는 이태리의 한 항구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고대 하수구에서는 약 백여 구의 어린아이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
어린아이들은 태어난 지 며칠이 되지 않아서 하수구에 버려진 것으로서 학자들은 이 아이들 중 거의 전부가 여자아이인 것으로 추정한다. 남아 선호의
경향은 남녀 인구의 불균형을 초래해서 고대 로마시의 남녀 비율은 131대 100, 그밖에 이태리,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역은 140대
100이라는 불균형을 나타내었다고 추정된다. 여성 사망의 또 하나의 치명적인 원인은 낙태였다. 당시 낙태의 방법은 치사량에 미치지 않는 독약을
먹거나 독극물을 자궁에 주입시키거나 바늘, 갈고리, 칼을 이용한 것이었다. 무분별한 독극물 사용과 비위생적인 수술은 태아뿐만 아니라 산모의
목숨까지 빼앗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어린 나이에 결혼한 로마 여성은 결혼 생활의 행복을 느끼지 못했으며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되면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로마 황제가 과부들의 재혼을 종용하는 법과 자녀 출산을 장려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여성 인구의 저하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한의 약화와 함께 출산율의 저하를 초래했고 결과적으로 로마제국의 인구가 감소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로마제국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유아 살해나 낙태를 살인 행위로 규정하였고 피임이나 변태적 성행위,
혼외정사, 일부다처, 이혼 등을 철저하게 금지하였다. 또한 로마제국의 여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임에 따라 남편과 가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인들은 당시 로마제국의 이교도 여성이 조혼하는 경향과는 달리 비교적 성숙한 후 결혼하는 비율이 높았으며, 따라서 부부관계도
원만했고 출산율도 높았다. 이러한 결과로 로마제국의 인구 감소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 인구는 급증하게 되었다. 초대 기독교인은 여성이 남성보다
월등하게 많았다고 추정되는데 그 이유로는 첫째로 낙태나 유아 살해를 교리와 교회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이고, 둘째로 남자보다 여자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한은 이교도 여성들에 비해 높았다.
초대 기독교 여성들은
특히 "그들의 신앙을 전파하는 특성"(the communicative character of their faith)으로 기독교가 로마제국 전역에
확산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서 비교적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제약에 매이지 않았으며 때때로 새로운 문화와 종교에 대해서
남자보다 더 개방적이었다. 여자들이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이어서 남편과 자녀, 그리고 가솔들이 개종하였고 또한 이웃에도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에사랴의 바질은 어려서부터 할머니 노(老) 마크리나에게서 신앙 교육을 받았음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의 동생인 닛사의
그레고리도 어머니 에멜리아가 그들의 누이인 소(少) 마크리나에게 성서를 가르쳤다고 말한다. 이렇게 신앙은 가정의 일에 속했으며 주부에 의해서
이전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전해졌다.
기독교가 시작된 초기 단계에서 여성의 활동은 비교적 활발했었으나 로마제국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조직화되면서 여성의 활동은 제약을 받기 시작했으며 교회의 법령들이 제정되어 여성의 직분과 역할을 제한했다. 자연히 여성의 활동은 위계질서와
규범이 강한 정통 교회 안에서보다는 분파나 이단에서 더욱 활발했다. 몬타누스 주의나 영지주의에서는 여자 지도자가 사제직을 맡아서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을 집행했다. 교부들은 이런 일이 성서와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교회의 여신도들에게 이단자들을 본받지 말라고
훈계했다.
교회의 여신도에게 비록 사제직이나 가르치는 자격이 부여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비공식적인 활동을 통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승인 이후 부와 권력을 지닌 거의 모든 귀족층의 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그 역할과 영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예를 들면, 콘스탄티노플 감독인 요한 크리소스톰은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왕비 유도키아와 그녀의 측근이며 막강한 권세를
지닌 마르사, 카스트리키아, 유그라피아와의 갈등 끝에 결국 감독직에서 축출되고 유배를 당했다.
기독교 여성들은 교리 논쟁에도
관여하였다. 로마의 마르셀라는 제롬 부재 시에 성서 본문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 판정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로 신학적 조예가 깊었다.
그녀는 오리겐주의자들을 지지했으며, 노(老) 멜라니아는 오리겐 저서의 번역자인 루피누스가 비난을 받자 그를 옹호하기도 했다. 동로마제국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딸이며 데오도시우스 2세의 누이인 풀케리아(Pulcheria, 399-453)는 여황제(Augusta)로서 국정을 운영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경건하고 수덕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는 동생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남편 마르키온과 함께 칼케돈 공의회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파를 정죄하고 정통교회의 신앙을 지키는 주역을 담당하였다.
순교(martyrdom)와 수덕주의(asceticism)는 초대
기독교 여성들이 기존 사회 체제를 벗어날 수 있는 두 개의 통로였다. 기독교는 네로 황제의 박해 이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승인을 받을 때까지
약 250년 동안 고난을 겪으면서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했고 그 중에는 여신도들도 있었으며 아그네스, 블란디아, 페르페투아, 휄리키타스 등의
순교사화는 기록으로 남겨져 당대와 후대의 신자들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주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승인을 받고 황제의 강력한 지원을
받게되면서 순교의 기회가 사라지자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열정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대안으로 수덕주의를 발전시켰다. 이런 경향 속에서 로마제국의
귀족 여성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수도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막대한 재산을 자선을 위해 기부하거나 수도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화비올라(Fabiola, d. 399년)는 이태리 여러 곳에 병원을 설립하고 병자와 노인을 보살폈다. 그녀는 또한 포르토 로마노에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를 세웠다. 파울라, 올림피아스, 소(少) 멜라니아 등은 수도원과 수녀원을 세우고 기도와 성서 연구에 힘쓰면서 많은 수도자들을 영접하고
가난한 사람과 병자를 구제하여 칭송을 받았다.
기독교가 로마제국 전역에 퍼지게 된 저변에는 기독교 여성들의 적극적 선교활동과 헌신적인
봉사가 있었다. 교회는 또 하나의 가정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굳게 결속하여 고난을 극복하였고 불안의 시대에 정신적, 물질적 안정을
갈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끌어드리는 구심력을 갖게 되었다.
4. 초대 기독교 여성 지도자들
(1) 과부
초대교회 여성의 교회 직분으로서 먼저 과부직을 들 수 있다. 과부는 원래 고아, 거지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처지에 있어서 교회의 돌봄을 받았다.
로마의 감독 코르넬리우스에 의하면 251년 로마에는 천 오백 명의 과부들과 거지들이 교회의 도움을 받았으며, 요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 교회가
삼천 명의 과부들과 동정녀들을 지원했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과부라는 교회의 직분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주로 기도, 금식, 병자들을 돌보는 일,
전도 활동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교회의 직분을 열거하면서 감독, 장로, 집사 다음으로 과부직을 언급한다. 과부는 "하나님의 산
제단"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재혼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서 60세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직제와 그 기능에 대해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이나 『사도교훈집』에 의하면 과부는 안수 받지 않고
임명되었으며 말씀을 가르치거나 성찬 집례의 보조를 할 수 없었고 반드시 감독과 남집사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3세기 중반부터 여집사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과부직은 사라지기 시작하여 4세기말에는 교회의 직제에서 사라졌다.
(2) 동정녀
초대 교회에는 동정녀
직분이 있었는데 그리스도와 약혼하고 독신으로 순결하게 살기로 서약한 여신도가 안수 없이 이 직분을 받았으며 나이가 많아지면 과부직에 임명되기도
했다. 동정녀의 직분을 받는 것은 결혼을 하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수행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위한 것이다.
동정녀는 후에 발전된 수도사와 수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동정녀는 "그리스도의 권능과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증거"라고 일컬어지기도 했으며,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제" 또는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키프리안은 동정녀를 찬양하면서 계속해서 순결을 지킬 것을
훈계한다.
이것은 교회의 씨앗이 꽃을 피운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바쳤다. 그들은 육체적인 비도덕성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약했다.
순교자들의 첫 열매가 백 가지라면 여러분의 것은 육십 가지이다....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상은 은총 안에서 [순교자들 다음으로] 두 번째가 된다. 그들 다음으로 굳건하게 인내하자.... 여러분은 여자의 슬픔과
신음의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다. 여러분의 주인이요 머리가 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며 그 분이 남편의 자리를 대신한다. 여러분의 운명과 처지는
[남자와] 같다.... 여러분은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채 세상에서 벗어났다. 계속해서 절제하며 순결을 지킨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다.
여집사
과부직을 대체하면서 나타난 여집사직은 대체로 동정녀 중에서 임명했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결혼을 한 번만 했던 과부
중에서 성실하고 존경받는 사람을 임명했다. 『사도교훈집』은 감독을 하나님의 형상, 집사를 그리스도, 여집사를 성령, 그 밖의 사제들을 사도들,
과부와 고아를 제단에 비유하기도 한다. 니케야 공의회는 여집사를 평신도로 간주했지만 칼케돈 공의회는 여집사의 안수에 대해 언급하면서(canon
15) 40세 이전에 이 직분을 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도법령집』도 여집사가 감독의 안수와 기도에 의해 임명되는 직분임을 말한다.
6세기에 저스티니안 황제가 세운 교회에는 60명의 사제, 100명의 [남]집사, 40명의 여집사, 90명의 부집사, 100명의 독자(讀者),
25명의 독창자, 100명의 문지기가 있었다.
여집사의 임무는 주로 여신도를 상대하는 보조적인 것이었다. 여집사는 여신도에 대한
세례나 성찬을 보조하고 여신도 병자에게 성찬을 운반하거나 교회에서 여신도를 안내하고 감독이나 집사의 여신도 방문이나 면담시에 동반하는 일을
하였으며 그 외의 일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여집사는 축복 기도를 할 수 없으며 장로나 [남]집사의 직분에 속한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그녀는 단지 여자들에게 세례를 줄 때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문을 지키거나 장로들을 수행해야 한다.
여집사는 특히
여신도가 세례를 받을 때 옆에서 보조하고 도유(塗油) 의식을 맡았다. 가운 하나만 걸친 여신도에게 세례를 주고 몸에 기름을 바르는 일은 거북한
일이었고 추문이 날 염려가 있었다.
여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성실하고 경건한 여집사를 안수하여 임명하라. 왜냐하면 때로는 불신자들
때문에 감독이 [남]집사를 여자에게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의 상상을 피하기 위해서 여집사를 보내야 한다. 우리는 많은 일로
여집사가 필요한 상태이다. 예를 들면, 여자들에게 세례를 줄 때 집사는 성유(聖油)를 그들의 이마에만 바른다. 그 다음에 여집사가 그들에게
기름을 바른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남자에게 [몸을]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동방교회에서는 여집사직이 안수 받고 임명되는
교직으로 널리 인정되었으나 서방교회에서는 여집사보다는 동정녀나 과부가 여신도의 일반적인 교회 직분이었다. 예를 들면 3세기 로마 교회의 교직
명단에는 여집사직이 없다. 서방교회에는 여집사직이 널리 퍼지지 않았으며 여집사직을 이단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의 서방 교회회의, 예를 들면 오렌지 회의(441년), 에파옹 회의(517년), 오를레앙 회의(533년)에서는 여집사 임명을 금지하거나
기존의 여집사직을 폐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동방교회에서는 12세기에 들어설 즈음 여집사직이 사라졌다.
(3) 예언자
1세기의 교회에는 여예언자가 있었다. 그러나 정통교회에서는 여성이 대중 앞에서 말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억제했기 떄문에 여예언자들은 분파나
이단종파에서 많이 활동하였다.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초반에 걸쳐 흥했던 예언운동인 몬타누스 주의에는 프리스킬라(Priscilla),
막시밀라(Maximilla), 퀸틸라(Quintilla)와 같은 여예언자들이 몬타누스의 동역자로서 활동했으며 몬타누스가 죽은 후 지도자로서
말씀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고 성찬을 집례했다. 특히 프리스킬라는 자신이 "말씀이요 권능"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자신에게 계시를 주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빛나는 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내 안에 지혜를 심어주었고, 이 장소[페푸자]는 거룩한
곳이며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이곳에 임재할 것이라고 계시했다." 208년 이후 몬타누스 주의에 합류한 터툴리안도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프리스킬라에 대해서 말한다: "그녀는 천사들과 대화하며 때때로 주님과도 이야기한다. 그녀는 신비스러운 교통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식별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치유하는 방법을 알아내기도 한다." 터툴리안은 그들의 가르침에 잘못된 것이 없음을
강변한다:
몬타누스, 프리스킬라 그리고 막시밀라는 다른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며 어떤 특정한 신앙 규범이나 소망을 바꾸지도 않고 단지 결혼보다는 금식을 자주 할 것을 가르칠 뿐이다.
그러나
정통 교회의 교부들은 여자들이 지도자가 되어 말씀을 가르치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들은 보혜사 성령이 이
여자들에게 임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전을 통해서 율법서와 예언서 그리고 복음서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그들은 이 가증스러운 여자들이 사도들이나 모든 은사보다도 위에 있다고 과장한다. 더욱이 그들 중 일부는 그녀들에게 그리스도보다 우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카타프리기아인들(Cataphrygians)처럼 프리스킬라와 함께 퀸틸라를 창시자로 여긴다. 그들은
이브가 지혜나무의 열매를 처음으로 먹었기 때문에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쓸모 없는 많은 증거를 제시한다. 그들은 여자를 성직에
임명하는 행위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모세의 누이를 여예언자로 여긴다. 또한 필립의 네 딸이 예언했음을 말한다. 가끔 그들의 모임에는 사람들에게
예언을 하기 위해서 흰 옷을 입고 등불을 든 일곱 명의 동정녀가 들어온다. 그들은 황홀경에 빠진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속인다.... 그들
중에는 마치 [남자와 여자의] 본성에 있어서 구별이 없는 것처럼 여자들이 감독, 장로, 그리고 그 외의 직분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나 여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떡과 치즈의 사람들(Artotyritai)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찬식에 떡과 치즈를 사용하며 이런 식으로 예식을 치르기 때문이다.
몬타누스 주의자들은 여지도자의
이름을 따라서 프리스킬라인들(Priscillians)이라고도 불렸다. 그들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의
구별 없이 모두가 하나"라는 말씀을 근거로 남녀의 동등한 지위와 역할을 주장하였다. 교회는 여러 차례 회의를 소집하여 몬타누스를 정죄하였고 그
후 몬타누스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통교회는 예언을 경계하게 되었으며 특히 여성의 예언을 억제하였다. 현대 여성신학자들은 몬타누스주의에 나타난
여성의 지도적 역할과 사제직 수행에 관심을 갖고 이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4) 순교자
로마 제국의 박해 하에 많은
여자 순교자들이 나왔다. 여종이었던 블란디나(Blandina, d. 177)는 리용의 순교자로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고 오히려 다른 신자들에게 강건할 것을 당부했다.
그들[고문자들]은 그녀의 온 몸이
부서지고 찢겼는데도 아직 살아 있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그 복된 여자는 훌륭한 운동선수처럼 계속해서 힘있게 신앙을 고백했고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여자이며 우리 중에는 어떤 사악한 일도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녀가 받은 고문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평안과 안정과 자유를
얻었다.
블란디나가 맹수의 먹이로 기둥에 달렸을 때 동료 신자들은 그녀 안에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았다.
블란디나는 결국 그물에 묶여져서 황소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페르페투아(Perpetua, d. 203)와
휄리키타스(Felicitas, d. 203)의 순교사화는 현존하는 기독교 문헌 중 여성에 의해서 기록된 최초의 것이다. 이 순교사화는
카르타고에서 순교한 페르페투아라는 젊은 여성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글과 후대의 편집자가 첨가한 글로 이루어져 있다. 순교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휄리키타스가 출산의 고통으로 괴로워하자 간수가 그녀에게 지금 그렇게 힘이 들면 나중에 맹수들에게 던져질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했다. 휄리키타스가 대답했다. "지금은 내가 고통을 받지만 그때는 다른 분이 내 안에서 나를 위해 고통을 짊어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그분을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옷이 벗겨지고 그물로 덮여서 경기장으로
끌려나갔다. 한 사람은 젊은 여자였고 또 한 사람은 최근에 출산했기 때문에 젖을 흘리고 있어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결국 그들은
다시 불려 들어가 헐렁한 옷이 입혀졌다. 페르페투아가 먼저 [황소에게] 받혀 넘어졌다. 그녀는 마치 고통보다는 정숙함을 염려하는 듯 일어나 앉아
한 쪽이 찢어진 옷자락으로 다리를 가렸다. 그리고 순교자는 흩어진 머리카락을 한 채로 고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떨어진 머리핀을 집어서
꽂았다... 그녀는 심한 상처를 입은 휄리키타스를 보고 그녀에게 가서 손을 뻗어 일어서게 도왔다.... 그녀는 남동생과 세례준비자들에게 외쳤다.
"믿음과 서로간의 사랑 안에서 강건하시오. 우리의 심한 고통을 보고 걸려 넘어지지 마시오."
페르페투아와 휄리키타스 순교사화의
주제는 '저항과 해방'이며, 순교를 믿음을 통한 자기완성의 길로 묘사한다.순교는 기독교 여성들에게 억압에 저항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순교자들은 그들과 고통을 나누며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믿음의 신비를 맛볼 수 있었다.
(5)
수도자
4세기 후반부터 수도원주의가 발전하면서 많은 기독교 여성이 결혼 생활 대신 수도자의 삶을 선택하였다. 수도자의 길은 여성이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종속적이고 보조적인 지위와 역할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여성들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극기와 절제, 헌신적 봉사와 구제활동, 학문 연구, 성지 순례, 남성 성직자와 수도자들과 교분을 통해 삶의 이상과 의미를 추구하였다.
특히 마리아의 순결성과 전설적인 여성 데클라의 수덕적 삶은 기독교 여성의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이코니움 출신인 데클라(Thecla,
1세기?)는 사도 바울을 존경하였는데 스스로 자신에게 세례를 주고 머리카락을 자른 후 남장을 하고 바울을 찾아가 만나 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데클라의 세례와 기적에 대한 이야기 중 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자 그녀[데클라]가 서서
손을 뻗고 기도하는 동안 그들은 많은 짐승들을 몰아넣었다. 그녀는 기도를 끝냈을 때 물이 가득한 큰 웅덩이를 보고 말했다. "이제 나 자신에게
세례를 줄 바로 그 시간이다." 그녀는 [웅덩이로] 몸을 던지면서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지막 날에 나 자신에게 세례를 주노라."
그것을 본 여자들과 모든 군중은 "너 자신을 물에 던지지 말라"고 울면서 소리쳤다. 총독조차도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바다표범에게 먹힐까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바다표범은 불꽃의 섬광을 보고 죽은 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 주위에는 불 구름이 있어서 어떤 동물도 건드릴 수
없었고 아무도 그녀가 알몸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교부들은 데클라가 스스로 자신에게 세례를 베푼 일을 문제삼았지만 많은
여성들은 데클라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 금욕적 삶, 기적으로 인해 그녀를 존경하였으며 딸을 낳았을 때 데클라라고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마르셀라(Marcella, 약 325-410년)는 17세에 과부가 되자 로마의 아벤틴 언덕에 있는 그녀의 집에
경건한 여자들을 모아서 성서 연구, 기도, 영적 훈련에 힘썼다. 그녀는 특히 겸허하고 청빈한 삶을 살면서 성서 연구에 전력했다. 제롬이 로마에
왔을 때 마르셀라는 그를 간곡하게 설득하여 여자들에게 성서 연구를 지도하게 했다. 제롬은 그녀를 성서학자로서 높이 평가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제롬, 파울라 등이 팔레스틴으로 피신하였으나 마르셀라는 따라가지 않고 로마에 남아 있다가 410년 로마가 고트족의 침략을 받은 직후 그들에게
받은 고초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
카파도키아 교부들 중 가에사랴의 바질과 닛사의 그레고리의 누이인 소(少) 마크리나(Macrina
the Younger, 약 327-379/80년)는 높은 학식과 경건한 신앙으로 동생들에게 깊은 감화와 영향을 끼쳤다. 그녀의 할머니 노(老)
마크리나(Macrina the Elder)는 네오가에사랴의 감독인 그레고리(Gregory Thaumaturgus)의 제자였다. 손녀 마크리나는
12세에 약혼자가 죽자 독신으로 살 것을 결심하고 어머니 에멜리아와 함께 소아시아 폰투스 지방에 있는 안네시에 정착하여 수녀원을 세우고
원장으로서 성서 연구와 영적 훈련에 전념했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마크리나가 임종하기 직전 그녀를 방문하여 만난 장면을 기록했는데 그가 얼마나
누이를 사랑하고 존경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문 가까이 온 나를 보았을 때 그녀는 팔꿈치에 의지하여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심한 열로
힘이 다 빠졌기 때문에 내게 가까이 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마루에 손을 디디고 가능한 한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경의를 표했다. 나는 달려가서
바닥을 향해 숙인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치켜들어 바로 앉게 했다. 그리고 조금 전처럼 편안한 자세를 취하게 했다. 그녀는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고 말했다. "오 하나님 제 소원을 저버리지 않고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당신의 종이 하녀를 방문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녀는 내 마음을
서글프게 하지 않으려고 신음 소리를 죽이고 호흡이 힘든 것을 감추며 가능한 한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다. 그녀는 질문을 함으로써 마음에
있는 주제들을 이야기했고 나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었다. 대화 도중에 대 바질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서 가슴이 내려앉았다[379년 죽음]. 나는
얼굴을 숙였고 눈물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감정에 빠져 낙심하지 않고 성자[바질]에 대한 회상을 높은 철학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녀는 자연 현상에 대해서 말했고, 슬픈 일들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했으며, 미래의 삶에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했다. 그녀는 마치 성령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내 영혼이 마치 인간의 본성을 떠나 들어올려져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았고, 그녀의 말의 인도로 천상의 성소에 서있는 것 같았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마크리나를 교사요 수도자요
신앙 지도자로 묘사하면서 그녀를 제2의 데클라로 조명하고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견준다. 그러나 데클라나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마크리나가 추구한 순결은 『바울과 데클라 행전』에서 제시한 육체를 거부하는 형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자유였다." 또한
마크리나는 기독교의 소크라테스라고 불릴 만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애정을 덕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마크리나의
기독교적 관점에서 애정은 분명한 기독교의 덕목이었다.
신분 높은 로마 여인이었던 노(老) 멜라니아(Melania the Elder, 약
342-410년)는 남편이 일찍 죽자 로마를 떠나 이집트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서 루피누스(Rufinus of Aquileia)와 함께 감람산에
남자와 여자를 위한 수도원을 각각 하나씩 세웠다. 팔라디우스는 그녀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밤을
낮 삼아 모든 고대 주석가들의 글을 읽었는데 그 중에는 오리겐의 글 3백만 줄과 그레고리, 스테판, 피에리우스, 바질 외에도 권위 있는 저자들의
글 2백 50만 줄이 포함된다. 그녀는 그 글들을 단지 한 번 대충 읽은 것이 아니라 각각의 책을 일곱 번 내지 여덟 번씩
정독하였다.
멜라니아의 높은 학식은 제롬에 의해서도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오리겐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루피누스를 지지하여
제롬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멜라니아의 신앙심과 학식은 그녀의 손녀인 소(少) 멜라니아에게 이어졌다.
로마의 귀족 부인인
파울라(Paula, 347-404년)는 노 멜라니아와 함께 제롬의 제자요 동료였으며 선구자적인 여성 지도자였다. 다섯 명의 자녀를 둔 그녀는
남편을 여의자 33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수도와 선행의 삶을 시작했다. 파울라는 베들레헴을 순례하고 그곳에 남자 수도원, 여자 수도원과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를 세웠다.
그녀는 남자를 위한 수도원을 세워서 남자들에게 맡긴 외에도 수녀원을 세우고 각 지방에서 모집한 많은
동정녀들을 세 집단으로 나누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귀족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중류와 하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 세 집단은 따로 작업과
식사를 했지만 시편 찬송과 기도를 위해 함께 모였다.... 그들은 새벽, 제3과, 제6과, 제9과, 저녁, 한밤중에 차례로 시편을 낭송했다.
모든 수녀는 시편을 익혀야만 했으며 매일 성서의 특정 부분을 공부했다. 그들은 주일에만 숙소에서 벗어나 각 집단의 수녀원장을 따라 교회에
갔다.
파울라의 수덕적 삶과 선행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녀는 성서에 담겨 있는 영적 진리를 깨우치고 싶어했으며 이를
위하여 히브리어도 공부하여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제롬은 파울라의 성서에 대한 탐구 정신과 의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마음으로 성서를 알았고 그 속에 담긴 역사가 진리의 기초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것을 사랑했지만 그 밑에 있는 영적 의미를 여전히 찾고 싶어했고
그것을 영혼 안에 세워진 영적 건물의 초석으로 삼았다. 그녀는 딸과 함께 나의 지도를 받아 신ㆍ구약성서를 통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나는 처음에 겸손하게 사양했지만 그녀가 뜻을 굽히지 않고 끈질기게 재촉했기 때문에 결국 허락하고 내 스스로 깨우친 것이 아닌- 왜냐하면 자만심은
가장 나쁜 교사이기 때문에- 교회의 가장 잘 알려진 저자들로부터 배운 것을 가르쳤다.... 파울라는 그것[히브리어]을 배우기로 마음을 정하자
아주 성공적이어서 시편을 히브리어로 낭송할 수 있었고 라틴어의 독특한 억양 없이 그 언어로 말할 수 있었다.
제롬은 파울라를
칭송하는 글을 그녀의 딸인 유스토키움에게 보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유스토키움. 너는 눈부신 유산을
물려받았다.... 너의 어머니는 오랜 순교 끝에 이제 면류관을 썼다.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이 피를 흘리는 것만은 아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흠
없는 봉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매일의 순교(daily martyrdom)이다. 전자의 경우가 장미와 제비꽃 면류관을 쓰는 것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백합 면류관을 쓰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여집사인 올림피아스(Olympias, 약 365-410년)는 명문가 출신으로서
부귀영화를 버리고 헌신적인 삶을 산 그리스도인이었다. 서방 로마 쪽에 소 멜라니아가 있었다면 동방 그리스 쪽에는 올림피아스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18세에 결혼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남편이 죽자 독신으로 살 것을 결심하였다. 올림피아스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같은
삶의 길을 걸었던 요한 크리소스톰의 어머니 안두사의 영향이 컸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녀의 재혼을 종용했지만 올림피아스가 거절하자 콘스탄티노플
시장에게 명하여 그녀가 30세에 이르기까지 재산을 위탁 관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자신의 재산권을 되찾았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필루스는 돈을 얻기 위해 찾아와서 그녀의 무릎에 입을 맞추기까지 하였다.
올림피아스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여집사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여집사로 임명되는 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인 넥타리우스에게 금 1만 파운드,
은 2만 파운드를 헌금하였고 또한 드라스, 갈라디아, 카파도키아, 비투니아에 있는 모든 재산과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3채의 궁전을 교회에
헌납하였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하여 육류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고 아플 때 외에는 목욕을 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위장병이
생겨 큰 고통을 받았다. 올림피아스는 교회 옆에 수도원을 세우고 젊은 여인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했는데 겸손한 행동과 누추한 옷차림으로 인해
아무도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올림피아스와 절친한 사이였던 요한 크리소스톰은 그녀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 17통이 남아있으며 또한
『올림피아스의 생애』를 기록했다. 그 글 중 올림피아스를 칭송하는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녀는 "주님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면서"(벧전 2:13) 밤낮으로 한없는 눈물을 흘리며 흠 없이 살았다. 그녀는 모든 사람을 공경하여 성자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사제들을
존경하고, 수도자들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동정녀들을 염려하고, 과부들을 돕고, 고아들을 키우고, 노인들을 보호하고, 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죄인들에게 애정을 갖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인도하고, 모든 사람에게 연민을 가졌는데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까워하지 않는
연민이었다.
올림피아스는 요한 크리소스톰을 비롯한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후원했다. 그러나 요한 크리소스톰이 왕비
유도키아와의 불화로 모함을 받고 귀향을 가자 그를 변호하였으며 결국 자신도 재판을 받고 귀향을 가게 되었다. 올림피아스의 청빈한 삶과 박애
정신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소(少) 멜라니아(Melania the Younger, 약 383-439년)는 노 멜라니아의
손녀로서 남편 피니안과 함께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고트족의 침략이 있기 전에 이탈리아를 떠나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어거스틴을 만났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어거스틴과 함께 예루살렘에 와서 감람산에 수도원을 세우고 신학 연구와 자선 사업에 힘썼다. 멜라니아의
전기는 그녀의 후계자인 수도승 게론티우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그는 멜라니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많은 원로원 의원들의 부인들과
신분 높은 남자들이 정통신학을 논의하기 위해서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 안에는 성령이 거하고 있었으며, 그녀는 아침부터 밤까지 신학을 논하면서
길을 잘못 든 많은 양들을 정통교회로 돌아오게 했고 회의에 빠진 사람들을 도왔다. 한마디로 그녀는 가르침을 받으려고 찾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감으로 도움을 주었다.
세속을 떠나 황야에서 수도생활을 한 사라(Sarah), 신클레티카(Syncletica),
데오도라(Theodora), 탈리스(Talis)와 같은 황야 교모(Amma: desert mother)들도 있었다. 황야 교부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교부들의 가르침』(Apophthegmata Patrum: Sayings of the Fathers) 중에는 황야 교모들의 가르침도
수록되어 있다.
보물이 드러나면 그 가치를 잃는 것처럼 미덕은 알려지면 사라지게 된다. 초가 불 가까이 있으면 녹듯이 영혼은
칭찬에 의해서 파멸되며 모든 수고한 결과를 잃게 된다.
어떤 수도자가 악령들에게 물었다. "무엇이 너희를 쫓을 수 있느냐?
금식이냐?"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철야기도냐?" "우리는 잠을 자지 않는다." "세상에서 멀어지는 것이냐?"
"우리는 황야에서 산다." "그러면 어떤 힘이 너희를 몰아낼 수 있느냐?" 그들이 말했다. "어느 것도 우리를 정복할 수 없고 오직 겸허 만이
할 수 있다."
어떤 수도자가 수많은 유혹에 시달리다 못해 "나는 이곳을 떠나리라"고 말했다. 그는 신발 끈을 매다가 또 한 사람이
역시 신발 끈을 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수도사에게 말했다. "네가 이곳을 떠나려는 것이 나 때문이냐? 나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항상
너보다 앞서간다."
(6) 저술가.
초대 기독교 여성들의 글 중 현존하는 것은 몇 편밖에 없다. 앞에서 소개한 페르페투아는
자신과 동료들이 고난 당하는 내용을 글로 남겼고, 에게리아는 순례기를 썼으며, 프로바는 시문(詩文)을 지었고, 유도키아는 성 키프리안의 순교
이야기를 남겼다
스페인 출신의 수도자 에게리아는 4세기말에 서부 유럽으로부터 이집트를 거쳐 팔레스틴에 이르렀다가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순례 여행을 하면서 일기를 썼다. 그녀는 출애굽 여정을 따라 여행하면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장소들, 예를 들면 네보 산, 하우란의 카르네아스에
있는 욥의 무덤, 에뎃사의 사도 도마의 무덤, 카르해의 아브라함의 집 등과 데클라 순교 성소를 탐사한 내용, 팔레스틴의 관습과 그 지방 교회의
예배 의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에게리아는 성서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하나의 연속적인 거룩한 글임을
시사하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예배 의식에 대한 기록은 예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며 또한 순례기는 초대교회의 건축 양식
연구에 큰 도움을 준다. 에게리아의 순례기 중 예루살렘 교회의 세례 준비 과정에 대한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부활절에
세례 받을 사람들이 어떻게 교육받는지를 기록하겠다.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은 사순절이 시작하기 전에 이름을 등록해야 하며 사제는 모든 이름을
기록한다.... 사순절이 시작하는 날 대교회 중앙에 감독의 의자가 놓여진다....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한 명씩 나온다. 남자는 아버지와
함께 여자는 어머니와 함께 온다. 그러면 감독이 입장하는 각 사람의 이웃에게 묻는다. "이 사람이 선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부모를
공경합니까? 술주정뱅이이거나 거짓말쟁이가 아닙니까?" 그는 인간에게 있는 더욱 심각한 악덕에 대해서 질문한다. 만일 그 자리에 참석한 증인들에게
질문한 모든 것에 대해서 잘못이 없음이 인정되면 감독은 그 사람의 이름을 자신의 손에 적는다. 그러나 만일 어떤 부분이라도 고발된다면 감독은
"그 사람의 행동을 교정하게 하고 고쳐졌을 때 세례 받으러 나오게 하라"고 말하고 그 사람의 퇴장을 지시한다. 그는 남자와 여자를 이런 식으로
조사한다. 그러나 만일 낯선 사람일 경우 그 사람을 아는 증인을 찾지 못한다면 세례 받기가 쉽지 않다.
프로바(Proba)는
기원전 1세기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버질(Virgil)의 시에 나타나는 용어와 형식을 답습하여 총 694행의 시문(cento)을 썼다(약
351년). 이 시문의 전반부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후반부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활동, 수난, 승천
등을 다루고 있다. 그녀의 시문은 시를 익히기 위한 교과서로 쓰이기도 했다.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의 왕비인
유도키아(Eudocia, 약 400-460년)는 안디옥 출신의 이교도였고 원래의 이름은 아데나이스였다. 그녀는 421년 황제와 결혼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고 '선한 의지'라는 뜻의 유도키아란 기독교 이름을 받았다. 그녀는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소 멜라니아와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성 스데반의 유물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간통죄로 고소되어 재판을 받고 예루살렘에 유배되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반(反)
칼케돈주의자들을 지원했었으나 시므온(Symeon Stylites)과 로마 감독 레오의 노력으로 정통교회로 되돌아왔다. 유도키아는 여러 편의 시와
함께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를 배경으로 한 『성 키프리안(Cyprian of Antioch)의 순교』를 썼다.
5. 나가는
말
초대교회의 여성들은 결코 가정주부나 어머니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수동적이고 보조적인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때로는 남성들의 동역자로서 때로는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봉사와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였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박해를 극복하고 승리하여 제국 전역에 전파되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교부들도 깊은 신앙과 덕행으로 기독교의 발전에 기여한
여성 지도자들의 역할을 인식하고 높이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여성으로서 인정하기보다는 남성으로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취약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했다는 것이다. 초대 기독교 여성을 연구한 여성학자의 결론대로 "후기 제국의 거룩한 여성들은 실로 제국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교부들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다."
바티칸은 1976년 '사제직에 여성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관한
교령'(Declaration on the Question of Admitting Women to the Priesthood)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인 그리스도의 몸을 닮을 수 없다는 근거를 내세워 사제직에서 여성을 제외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여성신학자들은 이러한 결정에 반발하면서
성서와 교회 전통에서 여성의 지도력과 사제직에 관한 역사적 근거를 발굴하여 제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 역사 기술이
'남자의 이야기'(his story)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이제 '여자의 이야기'(her story)도 찾아내어 들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다. 초대 기독교 여성의 경우 그들에 대한 대부분의 글은 교부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여성에 의해 기록된 글 중 현존하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밖에 여성이 쓴 편지의 내용이 교부들의 글 속에 단편적으로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여성, 특히 고대 여성에
대한 문헌적 연구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비문헌적 자료들, 예를 들면 비문(碑文)이나 파피루스, 기념 유물, 예술품, 장례 유물, 소수의 문서
단편들, 문헌에 들어있는 구두 전승 등을 연구해야 한다. 또한 여성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역사적 상상력"(historical
imagination)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문헌과 자료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행간(行間)을 읽는 방법을 통해 드러내는 노력도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전통 속에서 숨겨져 있는 여성들의 삶과 가르침을 찾아내고 새롭게 조명하여 균형 있는 역사를 기술하는 일은 역사가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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