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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5(마5:1-12)-긍휼히 여기는 자
1. 새해 팔복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팔복은 여덟
가지 복인데, 이런 마음을 가진 자들이 행복하다는 말씀이에요. 팔복은 예수님께
서 가지셨던 생각과 마음가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팔복을 생각하고 그 마음을 구하면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습니다. 첫째 복은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음이 가난한 자가 행복한 사람의 첫째 조건이고 최고의 마음가짐
입니다. 가난은 “열심히 일해도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없을 정도의 가난”입니
다. 우리가 아무리 힘써도 스스로 천국에 갈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비천에 처한 자들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은 이런 사람들의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은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에요. 나의 힘과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좌절감을 맛본
사람의 마음에 다음 작용이 일어납니다.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애통이란 말은
감상적인 슬픔이 아니고, “심장을 꿰뚫는 슬픔”입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니 가슴
을 부수고, 창자가 끓어질 것 같고, 뼈를 갉을 만한 그러한 슬픔입니다. 이런 사
람들을 하나님께서 위로하세요.
2. 세 번째 복은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함은 온순함과 달라요. 온유한 사람은 “올바른 근거로 분노를
느끼며, 적당한 대상에게, 바른 방법으로, 적절한 시간에, 그리고 알맞은 시간
동안 화를 내는 사람”입니다. “너무 성급하지도 않으며 너무 우유부단하지도 않
은 사람, 화를 내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는 화를 내지 않으며, 화를 내야 할 사
람에게는 화를 내는 사람”입니다. 자신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화를 발하지
않지만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필요시에 화를 발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땅-하나님의 기업(나라)을 얻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 복은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
이요.” 앞의 세 가지 복과는 달리 강한 열망과 정열, 열정이 솟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매우 시급한 상태를 말합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세계가 다급해진 것처럼. 주림은 단순히 요기를 채워야 하는 정도의 주림(배
고픔, hungry)이 아니라 무엇인가 먹지 않으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
(starving-아사)라는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말하고, 또 하나님 자신을 말씀합니다. 주리고 목마름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강
한 열망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3. 오늘 다섯 번째 복을 나눕니다. 7절,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
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팔복은 앞의 네 가지 복과 뒤의 네 가지 복
의 특징이 다릅니다. 앞의 네 가지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복이고, 뒤의
네 가지 복은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복이에요.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첫째 복이
긍휼히 여기는 것이에요. 내가 남을 긍휼히 여기면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은 대상에 따라 달리 표
현됩니다. 나보다 나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존경이고요. 나와
동등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정입니다.
나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이 긍휼함이 바로 하
나님의 성품-속성이에요. 하나님은 긍휼의 근본이세요. 구약에서 긍휼(hesed)이
란 말이 150회 나옵니다. 시145:9,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
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시103:13, “아비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신약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여러 곳에서 말씀합니다. 엡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4. 로이드 존스는 긍휼을 측은함과 행동이 합쳐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에요. 너무 불쌍하다고 여긴 나머지
그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고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하
나님의 긍휼하심이 가장 잘 나타난 사건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성육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
에 순종하며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
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은 본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
입니다. 율법이 이렇게 되려면 사람이 율법에 100% 순종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613개의 율법을 완전히 행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선(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을 행하는 사람도 한 명도 없습니다.(시14:1, 롬3:10)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완전히 행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는 위선일 뿐이었습니다.(외
식) 이대로 두었다가는 하나님께서 최고 걸작품으로 만드신 사람들이 모두 지옥
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비참함을 참아보지 못하
셨어요. 인간을 향해 긍휼을 베푸셨어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인간 예수는 아무도 이루지 못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의인)
십자가에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5. 예수님은 이 땅에서 긍휼함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긍휼의 극치는 십자가 위에서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며 누군가를 향해
기도하셨어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니이다.” 자신의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어요.
우리를 향하신 측은함과 행동이 완벽하게 나타난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수님
의 3년 동안의 공생애 활동은 온통 긍휼을 베푸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각종
병든 자들을 보시며 창조주로서 주님의 마음은 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최고 걸작품인 사람들에게 죄가 들어 온 후 각종 질병이 사람들을 괴
롭혔습니다. 예수님의 일그러진 사람들의 몸을 보셨습니다. 나병이나 중풍병자,
맹인, 손이 마른 자, 귀신들린 자들을 보실 때 마음이 아프셨어요. 그들을 보시
며 “민망히(불쌍히) 여기셨어요.” 주님은 몸이 지치고 피곤하셔도 밤늦게까지 치
유 사역을 멈추지 않으셨어요. 유대 종교인들의 눈총을 받으시면서 안식일에도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제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게 2010년부터 치유 사역을 하
고 있습니다. 22일에 하는 회복 캠프를 중심으로. 치유 기도를 하다보니 다양한
질병을 이해하게. 질병으로 고통받을 때와 해방될 때 차이를 직접 발견하게 되
요. 귀신들렸을 때 모습과 회복되었을 때 차이도 봅니다.
6. 이것을 보면서, 고통당하는 자를 외면할 수 없어요. 국내외 누구든지. 우리
교회에 귀한 마음-귀한 사역을 주셨어요. 우리 교회로 오는 자들을 섬기고, 못
오면 국내외 전화로, 선교지에 직접 가서. 전화로 치유와 회복을 받은 메릴랜드
집사님이 회복 캠프에 와서 간증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
이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배고파할 때, 오 천명의 사람들에게 먹을 양식을 공
급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정신적 문제로-육체 문제로 방랑하는 사
람들의 상담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만
나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어요.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많
은 긍휼을 베푸셨어요. 그들과 함께 하시며 관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도록 비유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무
슨 비유일까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눅10:30 이하에 이 비유가 있습
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
살렘은 고산지대이고, 여리고는 낮은 지역입니다. 이 길은 사람들의 여행 발걸음
이 잦은 곳이에요. 강도들이 사람들을 노리기에 좋은 지형이었습니다. 강도 떼들
이 자주 출현하는 곳이었어요.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비 비유 말씀을 들을 때
쉽게 이해했어요. 강도들이 잠시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이 사람 혼자 걸을 때
급습했습니다. 물건과 돈을 다 빼앗았습니다. 옷을 벗기고, 때려 큰 상처를 입히
고 갔습니다. 이후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몇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7. 일반인도 지나가고, 제사장도 지나가고,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강도 만난 자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 길을
지나가다 그 사람을 보고 긍휼히여겼습니다. 긍휼은 측은함과 행동이 따른다고
했지요.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 긍휼히 여기고 바로 응급처치
를 했습니다. 당시 응급약이라고 해봤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뿐이었어요. 사마
리아인은 자기가 타던 짐승 위에 그 사람을 태우고 여관으로 가서 돌보아 주
었어요. 자기는 자신의 볼일을 봐야 했기에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부탁했
습니다.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긍휼을 몸소 실천하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을까요?
배경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긍휼을 베풀 줄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 고대 세계에서는 더욱 긍휼함이 무시되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들은
patria potestas라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가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리면 아이는 살아났어요.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면
아이를 물에 빠트려 죽이라는 신호였어요. 딸들이 희생을 많이 당했습니다. 쌍
둥이들은 불길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죽이든지 팔든지 맘대로
하였습니다. 주인들은 노예들을 때리며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즐거워했
습니다. 사람들이 참 잔인하고 악해요. 노예는 주인에게 대항할 권리가 없었
습니다. 고대 세계는 인권의 사각지대였습니다.
8. 긍휼이란 말이 무색한 시대에 우리 주님이 긍휼을 베풀라고 가르치시고 친히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긍휼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자들을 사도 바울은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
라” 말씀합니다.(롬1:31)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긍휼이란 말이 쉽지
않아요. 긍휼을 베풀려면 자기의 시간을 제공해야 해요. 그러면 사마리아 사람의
여행이 더뎌집니다. 스케줄 지연을 감수해야. 또 긍휼을 베풀려면 물질도 제공해
야 합니다. 사랑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자기 것을 절제해야 해
요. 요한 웨슬리는 이런 긍휼함을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
했습니다.
윌리암 바클레이도 긍휼은 남을 자기와 똑같이 여기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런
자기희생을 어떤 사람이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
까? 긍휼히 여김을 받아 본 사람이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눅6:36, “너
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다섯 번째
복인 긍휼의 복이 첫 번째 복으로 나오지 않아요.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네 번째
도 아니에요, 다섯 번째 복으로 나오고 있어요. 앞의 네 가지 복 있는 마음을
가진 자라야 긍휼히 여길 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만이 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9. 긍휼은 말로-구호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옮겨질 때 긍휼히 여기
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 받는 복이 무엇이에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주기도에도 여기에 해당되는 말씀이 있어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주기도를 암송할 때마다
가장 마음에 찔리는 것이 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오늘 다른 형제를 용서하지 못
해도 이 기도는 부지런히 외워야 합니다. 이 기도를 외우는 것은 하나의 훈련
입니다. 수백 번 수천 번 외우다 보면 훈련이 반복되어 우리가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날이 옵니다. 그러나 못한다고 외우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주시는 복의 약속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장차 우리가 하
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
어갈 수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세상에 살면서 긍휼히 여긴 자가 누구
냐고 물으실 때, 여러분이 할 말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약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
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어느 목사님은 자녀들을 가르치는데
걸인을 만나면 백 원짜리 동전 하나라도 언제나 건네라고 했답니다. 동전이 없
으면 가게에 가서 동전을 바꿔서라도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라고 가르쳤어요.
10. 아이들이 목사님의 말대로 따라서 했답니다. 이런 정신을 자녀들에게 가
르쳐야 해요. 우리가 배울 귀한 정신입니다. 김홍섭 판사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
죠. 그는 5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어요. 그는 늘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했고요.
그는 피고인을 감옥에 보내고 피고인과 가족을 향한 긍휼을 베풀며 인생을 살
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따라 실천한 분입니다. 뉴욕 시장을 지낸 라과디아도
긍휼히 여길 줄 알았습니다. 그가 판사 시절, 한 노인이 빵을 훔쳤다가 붙잡혔
습니다. 심문 중 노인이 너무 배가 고파 범행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노인에게 벌금 10불을 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10불을 내고
재판정에서 자기 모자를 벗어 돌려 즉석 모금을 했어요. 나는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배불리 먹고 인생을 즐겼다고 고백했어요. 뉴욕시가
이 인물을 기억하고 뉴욕 시내에 있는 공항 이름을 라과디아라고 부릅니다.
세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긍휼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긍휼의 마음은 강요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하늘에서 땅에 내리는 단비처럼
이중의 축복이 된다.
베푼 사람에게 축복이요
받는 사람에게도 은혜가 된다.
그것은 강자 중의 강자요
보좌 위에 앉은 왕관보다 귀하다.
긍휼은 이 세상의 임금의 지위보다 더 위에 있고
그것은 왕의 가슴속에 군림한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 긍휼하심이 내게 임하면 나도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어요. 이후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고 할 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긍휼을
알고, 긍휼을 베푸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말씀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