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옥같은 산상수훈
산상수훈의 보물은 <팔복>입니다. 여덟은 진복 팔단, 역학에서의 팔괘나 불교에서의 팔정도를 문뜩 생각하게 됩니다. 여덟은 이스라엘에선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수입니다. 이새의 아들 중 여덟째 아들 다윗이 왕이 됩니다. 예수도 다윗의 손이라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심령이라 굳이 이야기하는 것은 포괄적 존재성을 뜻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종교이지 심리학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프뉴마티' (Tπνεύματι)란 무엇일까요. 영적이란 것은, 우리가 육신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개 돼지처럼 먹는 것에만 급급한 존재가 아니란 뜻입니다.
정신적인 존재, 별을 보고 꽃을 보는 존재, 타자를 끌어안는 존재,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이는 영적 존재란 뜻입니다. 프뉴마(πνεύμα)란 인간 실존의 내재적 실체입니다.
가난한 자는 누구일까요? 경제적 가난을 얘기할 때는 ‘페네스’, 영적인 가난은 ‘프토코스’입니다. 물질적인 가난은 무엇을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난이라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라고 쓰인 마태복음과 달리 루가복음엔 '가난한 자'라고만 말합니다. 가난은 히브리어로 ‘아나임’이라고 하는데, 이는 진정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처절한 가난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가난뱅이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마카리오스’는 복, 충족을 말합니다. 복이란 음식점에서 물을 따르는 풍경을 생각하면 됩니다. 가득 따르는 것이 복입니다.
히브리어 '아쉬레'는 물질적 축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선 인생의 최악에서 건져진 ‘존재 그 자체의 축복’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서 천국은 국가 체제처럼 ‘바실레이아’를 당당하게 밝혀 씁니다. 나라를 갖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는 하나의 나라이며 정부입니다.
서럽게 운다고 합니다. 우는 자란 누구인가요. 우는 것은 순환이지만 참는 것은 정체요 정지, 억누름입니다. 정체는 병을 부릅니다. 울어야 순환되고 건강합니다. 가난한 자는 눈물로 살아갑니다만 울기에 웃음의 명약을 또 알게 됩니다. 배고픔의 눈물이 가장 아픈 눈물입니다. 천사의 빵, 파니스 안젤리쿠스, 하늘의 만나를 먹어야 합니다. 네 번째 복에 그 서러움의 원인이 드러납니다. “너희를 위해 내 몸을 내준다”는 말씀이 그래서 훗날 이어집니다.
온유라는 단어를 읽을 때 그 순간조차 온유해집니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거친 것 보단 유순하고 온유할 때 빛납니다. 복음교회 창립자 최태용은 소하고 순하라 하였습니다. 순하라 하신 말씀이 온유를 뜻합니다. 온유는 약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강한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두고 보세요. 거친 말을 내뱉는 사람은 분명 후회가 들게 됩니다. 물론 무식한 이들은 그렇지 않지만요.
긍휼은 스플랑크조마이, 창자를 끊듯 아픈 사람을 말합니다.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연민하는 마음, 사회 약자를 향한 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교회는 목회서신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제가 총무이니 초안을 썼습니다. 10. 27 광화문 집회는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 없는 자들의 폭력적 집회입니다.
<목회서신>
반목과 갈등의 세상을 사귐과 평화로 이끄시는 우리 주님을 찬송합니다.
우리 총회는 민주화와 인권신장,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분투해온 역사를 자랑합니다. 보수 교단측과 태극기부대 연루자까지 포함된 10월 27일 광화문 집회는 한국교회 공공성과 위상의 실추, 공동체 분열을 조장하는 동원 집회인바 우려와 염려를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총회 가족들이 해당 집회에 참석하는 일은 없기를 바라며 권면의 말씀을 올립니다. 복음의 순전함으로 나라와 미래, 성가정의 평화를 빌어주시기를 원합니다.
2024년 10월 25일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 윤창섭
평화 에이레네는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주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다투지 않는 평화를 위해 다가서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평화를 향해 나아갈 때 예수님과 관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디카오쉬네'라 썼습니다. 이 ‘의롭다’란 한 개인의 ‘의’도 의지만 ‘사회 정의’를 말할 때 주로 쓰입니다. 배부르다는 건 '코르타스 데 손타이'라 합니다 '코르토스 클로로스' 란 먹이와 풀을 연결한 말이죠.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핍박은 ‘에피’란 단어를 썼습니다. ‘에페레아조’라는 협박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주님의 생애가 핍박받는 삶이었습니다. 감수하면서 나아갈 때, 희망을 속삭이는 사람에게 희망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태양을 보고 달려가는 사람은 어둠의 그림자, 그늘을 볼 겨를이 없습니다.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기뻐하다'(카이로)는 벅찬 기쁨의 상태를 말합니다. ’‘즐거워하다'(아갈리아오)란 환희심에 가득한 놀라워하는 상태의 표현입니다. 받을 상(미스도스)이란 무얼까요? 보상을 받는, 준비된 그런 상이 아닙니다. 뜻하지 않게 거저 받는 상을 말합니다.
산상수훈엔 전통적 지혜(33절), 전복적 지혜(3-9절), 실천적 지혜, 이상 세가지를 담아냈다고 신학자 김학철은 이야기합디다. 5장 38절부터가 실천적 지혜이지요. 찬찬히 살펴보면 재미 있습니다. 악한 자에겐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합니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십니다. 악의 순환을 멈추게 만들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라 합나다. 그렇다고 복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품위를 지킬 때,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신과 권력에 마음 기울이지 말고 인간의 존엄, 품위있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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