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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레지스탕스의 두 얼굴⌟의 조선 멸망, 김좌진, 동학농민운동 이야기
역사 기록이 사상과 이념, 권력의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팩트를 팩트로 기록하는 역사서를 쓰고 싶었다.
영웅의 역사서, 권력자들의 역사서, 운동가들의 역사서가 아닌 애국애족의 열정을 비록 프로 직업 독립 운동가들에게 이용당하였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순백의 영혼들의 희생을 기리는 역사서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능력과 시간이 부족한 나로서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진명행이라는 학자는 독립운동사에서 과장되고 왜곡된 사건과 인물들의 진상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조선 레지스탕스의 두 얼굴⌟이라는 책을 썼다. 재미있게 읽었다. 이미 역사서가 주문되고 선택되어 제작되는 것이라는 알았기 때문에 기존의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를 포함하는 학자들의 강의와 역사서에 아부하거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쓴 용감한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가 말하는 내용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공감이 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의심스러운 것도 있고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지만 그가 신(神)이 아니므로 그의 관점과 주장에 오류와 오판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교과서 중심의 정사 독립운동사에 세뇌된 한국인들에게 권면하고 싶다. 민족주의 계열의 책에 세뇌되었거나 사회주의 계열의 저서에 세뇌된 분들이 읽으면서 같은 사건과 사람에 대한 기록이 이토록 다를 수 있는가를 보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조선 멸망의 원인이었다.
츠등학교 시절부터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이 망했다고 배웠고 추호도 의심 없이 그 사실을 믿으며 일본을 향해 울분을 터뜨렸는데 연변에서 나온 역사서를 살펴보니 조선은 참으로 망해도 싼 나라였다. 조선은 일본이 침략하기 전에 이미 망한 나라였다. 왕조의 부패와 무능, 매관매직과 사대주의, 조선 양반관료 사대부들의 착취와 수탈로 백성들이 자기 나라에서 살 수가 없어 소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도망쳤다.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난 1907년에 연변에 도망나온 조선인이 1만 5,356세대 7만 2,076명이었으며 한일합방 1년 전인 1909년에 연변 조선인은 3만 4,133세대 18만 4,867명이나 되었다.1) 1860년대 나라가 망하기도 훨씬 전부터 함경도와 평안도의 주민들은 조선의 학대와 수탈을 견디지 못하여 만주로 도망을 쳤다. 뿐만 아니라 서간도와 러시아 연해주로 도망친 조선인도 그에 못지않게 많은 숫자였다. 두만강과 압력강변의 조선인의 탈출은 조선이 스스로 썩어서 무너진 존재임을 증명해준다.
양계초는 ⌜조선 멸망의 원인⌟에서 “합병조약이 발표되자 주변국 사람들은 조선을 위해 비통해 하는데, 조선인들은 술에 취해 놀며 만족했다. 고위 관리들은 더구나 날마다 출세를 위한로비를 하고, 새 조정의 영예로운 벼슬을 얻고자 분주하게도 즐겼다”고 기록하고 있다.2)
또 양계초는 ⌜일본병탄조선기⌟에서 일본의 임시 추밀원회의에서 합병 발표를 1910년 8월 25일에 공포하기로 하였으나 대한제국 정부가 황제 즉위 4주년 기념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발표하는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발표일을 29일로 미루었다고 한다. 일본이 무력으로 침략하여 강점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 조선의 그 왕실은 합병 일을 황제 즉위 일에 맞추어 파티를 열어 축하하고 침략국 당사자들과 함께 건배를 하며 기념하였다고 한다.3)
지배층은 합병으로 오는 힘의 실세 변화에 주목하며 자신들의 보위에 급급하였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망국을 왕조가 바뀌는 것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삼정의 문란과 왕실의 향략과 사치,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과 수탈로 백성들은 윤효정의 기록에 의하면 ⌜대한제국아 망해라⌟라고 기원할 정도였다고 한다. 황현은 망국의 군주인 고종에 대하여 ⌜매천야록⌟에서
“고종은 등불을 환히 밝히고, 새벽까지 놀다가 새벽 4~7시경이 되면 비로소 잠을 자다가 오후 3~4시에 일어났다”고 전한다. 고종과 민비는 파티광이었으며 날마다 새벽까지 파티를 열어 먹고 마시며 소중한 역사의 전환점에서 정신을 차려 개혁을 주도해 나가야할 시점에서 자신들의 권력유지와 영화를 위하여 조선을 퇴행시키고 망국의 길로 몰아갔다.4)
김좌진장군에 대한 쇼크는 참으로 컸다.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하는 기사를 쓰는 분에게 김좌진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맨붕상태에 빠졌다. 그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을 하얼빈 영사관에 고발해서 여러 명을 죽게 하였고 감옥에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정미소의 기계는 당시 만주에 몇 대 없는 최신식 기계로 그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고발의 대가로 일본에게 받았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세금을 걷는 문제로 비적 두목과 다름이 없었다. 그의 횡포를 견디지 못한 빈주현 사람들이 신민부의 보호를 거부하고자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김좌진일파 무장대원 25명이 대회장에 난입하여 주민 여섯 명을 그 자라에서 격살하였다. 세칭 ‘빈주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는 조선인들에게 공공연하게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신민부와 함께 지역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던 공산주의 단체가 공도진를 보내서 그를 암살하였다. 공도진은 일제에 사주를 받은 친일파가 아니고 현재 중국에 항일열사로 등록된 검증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좌진은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김좌진장군을 이해하고 변명하고자 여러 책을 섭렵하면서 자여스럽게 그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그를 영웅으로 부상시키며 그와 관련된 많은 것들을 미화시키며 과장 하였는가가 절로 이해되었다.
리광인과 김송죽이 쓴 ⌜백포 서일장군⌟을 통해서 그가 북로군정서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안 되어서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으로 임명을 받았다는 것과 그가 북로군정서군을 데리고 이만까지 갔으나 일부를 데리고 이만에서 밀산으로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너무 배고픈 나머지 민간을 약탈하기 시작하였고 전후사정을 가리지 않고 약탈하다 토비와 한 통속인 송곰보의 양곡상을 털어버린 것이다. 독립군에 의해 양곡 창고를 약탈당한 송곰보는 매제인 청보산의 토비를 불러서 이만에서 돌아온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몰살하였다. 이 토비 떼의 습격으로 밀산에 둔병제의 독립군 후방기지를 건설하고자 서일장군과 함께 당벽진에 남아있던 북로군정서의 마지막 병력마저 피바다에 쓰러졌다. 포교를 위해 당벽진을 떠나있던 서일은 늦게야 참변의 소식을 듣고 당벽진으로 돌아와서 참상을 보고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서일장군은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였다.5) 이만에서 돌아온 김좌진장군과 북로군정서의 군인들의 중국인 양곡상 습격이 서일장군을 자살로 이르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 역사는 기록하지도 기억하지도 않는다. 서일은 죽음으로 자신을 정리하였지만 김좌진장군은 몇 명의 부하와 함께 당벽진을 떠났다. 그리고 9년 후에 공도진의 총에 저격을 당하였다.
강룡권과 김석이 쓴 ⌜홍범도장군⌟을 통해서 김좌진장군이 청산리전투를 치루기 전에 단체 대표들의 연석회의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교과서가 말해주는 것과 너무 다르다.6)
나는 20여권의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단행본 책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책들이 동학농민운동과 녹두 장군 전봉준에게 어마어마한 찬사를 바친다. 전봉준은 이미 조선을, 한국을 근대로 이끈 신이 되어 있다. 그런데 저자는 ⌜조선 레지스탕스의 두 얼굴⌟에서 동학란에 대하여 아주 심플하게 일고의 고민도 하지 않고 네 가지로 정리를 한다.
첫째 동학란 내지 동학혁명은 계급투쟁이 아니다.
당연한 말씀이다. 레닌의 10월 혁명은 1917년에 일어났고, 공산주의를 이해한 조선인들이 최초로 당을 결성한 것은 1918년인데 어떻게 1894년에 조선 한반도의 농민 봉기에서 계급투쟁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 당시도 조선은 주자가례 충효사상의 공고한 지배아래 있었다.
둘째 토지 균등 분배, 계급 철폐 등이 담긴 ‘폐정개혁 12조’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것은 오지영이 쓴 소설 ⌜동학사⌟ 에 처음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가 쓴 패정개혁안도 초고본에서는 세 개 조항이었다가 출간본에서는 두 개로 줄고 대신에 청춘과부의 개가와 같은 조항이 추가되는 등 오지영이 자의적으로 조항을 첨삭했다는 정황이 유추된다.
오지영은 전라도 익산지역의 집강소 사무를 맡았던 자로서 동학혁명이 좌절된 후 이후에 천도교 내부의 분파적 갈등을 겪다가 모세처럼 익산 지역 주민 200여 명을 인솔하고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만주에서 고려혁명당에 가입하여 공산주의자로서 길을 걸었다. 토지 균등 분배와 계급 철폐 같은 사회주의 색깔이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그런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현재로서 사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폐정개혁 12조’는 오지영의 소설에서만 확인되므로 처음부터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국정 교과서에 폐정개혁 12조가 등장하고 있으니 이는 역사 왜곡이라 아니할 수 없다.
셋째 동학란은 흥선대원군의 사주로 발생하였으며 그의 환궁과 집권 회복이 목표였다.
전봉준은 여러 해 동안 대원군을 찾아 다녔다. 대원군은 전봉준을 사주하며 지원하였다.
1894년 5월 22일 전봉준이 나주 관아 삼공형에게 발송한 공문, 음력 4월 16일 영광에서 창의소 명의로 완영유진소에 보낸 통문, 음력 4월 23일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보낸 14개조 개혁안,
음력 5월 4일 전봉준이 전주화약 직전 관군 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소지문에서 그는 ‘국태공을 모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대원군은 음력 6월에 집권하자 체포한 동학도를 구제할 방도를 지시하고 대거 석방하였다. 그러나 실각하자 동학도에 대한 대규모의 숙청작업이 이루어 졌다.
넷째 동학란은 일본 국수주의 단체인 천우협의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았다.
저자는 동학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동학란은 초기에 지방 토호의 학정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무력 봉기한 사건임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 위세가 전국으로 들불같이 번지기에 이르자, 권력에 병적으로 집착했던 대우너군이 이들과 결탁하여 일종의 정변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동학란의 성격은 결코 혁명적이지도 않고 근대성도 갖추지도 않은 반란이었을 뿐인데, 오늘날 정치적인 이유로 이에 대한 평가가 너무 과장되고 미화된 것입니다.7)
진명행의 동학란에 대한 명쾌한 정리, 계급투쟁이 아니라는 주장, ‘폐정개혁 12조’는 오지영의 날조라는 주장, 대원군 배후설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누구나 공감하기가 어렵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일본인 요시쿠라 등 14명이 통행증 없이 순창으로 와서 전봉준을 만난 것은 사실이나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봉준이 그들의 도움을 받았는지 여부는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운동은 진명행이 말하는 것처럼 농민들의 실패한 무력봉기, 대원군에 의해 변질된 정변의 하나로 단정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으며 수탈당하는 농민이 연합하여 정부군, 관군과 전투를 치루며 주도적으로 27개조 폐정개혁안을 내걸고 협상을 벌일 정도로 농민들의 정치의식과 주권의식이 성장하게 된 대사건이었다.
최근에 읽은 동학에 대한 자이니치 강덕상의 글이 흥미롭다. 그러나 아직 전체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나는 몇 가지 동학농민운동에 관하여 막연한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누군가가 나의 우문에 현답을 줄 것을 기대하며 계속 책을 찾고 있다.
첫째, 최제우가 사망한 후 30년이 되는 해, 1894년 조선에 과연 그렇게 많은 동학교도가 있었을까? 단 시간에 그렇게 많은 동학 포교가 조선 팔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졌을까?
둘째, 남접의 모든 장군과 접주들은 다 교수형을 당하였고, 동학운동에 참여한 자는 평민이라 할지라도 관군과 일본군 그리고 민보군에 의하여 9족이 멸하는 참변을 당했는데 북접의 최시형과 손병희는 그 당시에 위태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죽음을 모면하고 살아났을까?
(2대 교주 최시형은 1898년 교수형을 당하였는데 그의 죄목은 사교를 전파한 것이다.)
셋째,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반 동학군 지도자이고 김구는 동학군 접주로 나오는데 그들이 과연 실제로 만난 것일까? 아니면 기억의 왜곡일까? 김구가 과연 동학의 접주였을까?
저자는 자신의 글이 일본 극우와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라거나,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논리라는 등 그런 숱한 비난을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굳이 책을 펴는 것은 끊임없이 누군가는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냄으로써 이 사회를 제 정신으로 돌려놓는 반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일제가 박은 쇠말뚝”의 낭설처럼 오랜 시간 사람들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왜곡되고 편향된 정보들에 대해 작은 물음표와 함께 팩트를 추구함으로 전체주의적이고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민족주의를 뛰어넘고자 한다.
미 주
1) 심영숙 저 ⌜중국 조선족 력사독본⌟, 30, 31쪽, 민족출판사, 2016
2) 진명행저 ⌜조선 레지스탕스의 두 얼굴⌟, 21쪽, ㈜ 양문, 2021
3) 위의 책, 21쪽
4) 위의 책, 26쪽
5) 리광인, 김송죽 저, ⌜백포 서일장군⌟, 423~434쪽, 민족출판사, 2009
6) 강룡권, 김석 저, ⌜홍범도장군⌟, 175~ 185쪽, 연변인민출판사, 1991
7) 진명형 저, 조선 레지스탕스의 두 얼굴⌟, 64쪽, ㈜ 양문, 2021
참고문서
진명형 저, 조선 레지스탕스의 두 얼굴⌟, ㈜ 양문, 2021
첫댓글 ?????
역사학자들은 어디 있는가
무엇이 진실인가
혼란스럽네~~~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혼란스럽지요.
저도 그 혼란에 빠졌어요.
역사는 1차 사료가 있어요.
1차 사료는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의 사람들이 기록한 것을
1차사료라고 하는데 이 사료를 가지고 역사를 써가는 거지요.
그런데 1차 사료를 무시하거나 2차 사료만으로 글을 쓰는 분들이 많아요.
특별히 자기들의 이념이나 사상, 이익과 목적을 위하여
1차 사료를 왜곡하거나 일부만 편향적으로 사용하거나 아예 무시하고 '카더라' 통신을 가지고
역사서를 기술하는 학자들도 있고요.
그런데 한국은 파쇼민족주의가 강하기 때문에 그런 책에 대하여
아무런 검증 없이 그런 글들이 실제인양 받아들여져요.
예를 들자면 김구가 만든 광복군이 다 합쳐야
500명도 안되요. 그리고 그들은 항일독립전쟁에 참여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 역사는 그들이 엄청난 전투를 한 것처럼 생각하도록 이미지로 역사 교육을 시켰어요.
강단사학자들이나 재야사학자들이나 1차 사료를 사용하지 않거나 편향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 그런 부류라고 봐야되요. 저는 학자가 아니지만 책을 많이 읽다보니 안목이 생겼지요.
책을 다독하세요. 자기 성향만을 고집하지 말고 다양하게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