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2,000년간 천동설(天動說)을 비판하고 지동설(地動說)을 믿고 속아 살았다, 1548년 이탈리아 브루노는 가톨릭이 서방을 뒤흔들던 시절 지동설과 범신론을 주장하는 이단자로 몰려 1600년 화형으로 52세로 생을 마감해다. 누가 브루노의 생명은 보상할 수 있는가? 가짜와 사이비 종교에 속지 않기 위해 순간순간 냉철하게 통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연못에 돌을 던져놓고 떠올라라, 떠올라라, 하고 불공을 올린들 그 무거운 돌이 떠오르겠느냐. 저 흙 속에 잡초 씨앗을 뿌려놓고 쌀이 되어라 쌀이 되어라, 하고 불공을 드린들 잡초 씨앗에서 벼 이삭이 나올 수 있겠느냐?' 불공보다 물에 들어가 돌을 건져내고, 잡초가 아니라 진짜 벼를 심어놓고 김을 매는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종교는 사람들이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없는 행복한 삶을 안내하는 안내서이다. 종교가 사람을 거짓과 엉터리로 안내하면 귀중한 인생을 헛살게 된다. 거짓 종교는 행복을 주기는커녕 종교의 억울한 희생양으로 제물이 된다. 나는 이 세상의 주인공인데 나 대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태양신을 섬기던 중남미(中美)의 아즈텍 인들은 혹시라도 태양이 다음날 떠오르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들은 높은 피라미드 위 제단에서 수백 년 동안 매일매일 사람을 죽여 태양신에게 심장을 제물로 바쳤다. 하지만 이 일이 태양이 떠오르게 한 원인은 아니였다. 이 인신공희(人身供犧)는 1520년 스페인 사람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태양은 여전히 떠올랐다.
거짓, 사이비 종교는 죽은 나무와 같다. 죽은 나무는 생명이 없다. 가짜 종교를 허무한 인생을 산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는 기복 불교, 제사 불교, 푸닥거리 불교가 진짜불교로 둔갑되어 있다. 비불교적인 것이 불교로 포장되어 불교처럼 행세를 하고 있다. 사주, 부적, 삼제 풀이, 삼제 기도, 방생, 성지순례, 인등, 수능 합격기도, 신년 기도, 만년 위패, 산신 기도, 용왕 기도 등등이 모두 비불교적인 것이다. (거제 연등사 도안스님)
사주를 보고, 점을 치거나, 삼재 풀이를 하면 마음에 어두운 기운이 들어온다. 금산 효심사 절은 절대로 사주풀이, 삼재풀이를 하지 않는다. 불교는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불성을 찾아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종교이다. 사주와 삼재 풀이, 정월보름에 속옷 태우기는 우리를 어리석고 허무한 짓이다. 무슨 달에 물 조심하고, 무슨 달에 불조심하라고 하면 그 달까지 어둠의 노예가 된다. (효심사 성담스님)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종교이다. 인연법 따라 살면 삶이 편안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과보(因緣果報)는 일반적인 권선징악(勸善懲惡)적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원리와 법칙입니다.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공덕이면 공덕으로, 그것이 빚이면 빚으로 기꺼이 받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불교는 타력적인 기복이 아닌 자력에 의한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스님이 신통력에 의지하게 되면 수행의 목적이 왜곡될 수 있다. 불교 수행은 쓸모없는 신통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번뇌를 끊고 열반과 해탈을 얻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 전파한 핵심은 공(空), 무아(無我),무상(無常), 계정혜(戒定慧) 삼학과 인연과보법(因緣果報法)이다. 부처님은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불성(佛性)이 있어 모두 다 존귀한 존재라고 설파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참되고 바르게(戒) 생활을 하면, 마음이 안정(定)되고 바른 지혜(慧)를 얻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이 불법이다. 부처님은 그래서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고 하셨다.
한 불교 신도가 효봉 스님에게 물었다. “왜 부처님을 믿어야 하는지요.” 효봉 스님은 바로 대답했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실천하면 집안이 바로 극락이 되고 마을이 극락이 되고 온 세상이 극락이 되는 것이니, 우리 모두 극락을 만들어 극락에서 살자는 것이지요.”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이다. 해탈은 아무런 속박이 없는 자유로움이고, 열반은 아무런 괴로움이 없는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고 나쁜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려면 좋은 일도 흥분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나쁜 일도 너무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일이든 원하지 않는 일이든 담담히 받아들여라. 좋은 일은 하되 보상을 바라지 마라. 좋은 일을 하는 그것이 곧 복이다, 알맹이 없는 곡식이 빈껍데기를 만들듯이 얼빠진 인생살이는 빈껍데기 삶이 된다. 인연따라 사는 세상 어떤 상태에 처하든 활발발하게 살면서 해탈과 열반의 경지로 나가야 한다.